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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대흥동헌과 임성아문, '의 좋은 형제' 효제비

모산재 2016. 6. 1. 12:55

 

대흥초등학교 단풍나무 그늘 정자에서 휴식을 취하다 대흥동헌(大興東軒)으로 발길을 옮긴다.

 

 

 

지금은 예산군 소속의 작은 면소재지에 불과하지만 대흥은 일제강점기에 예산군으로 편입되기 전까지만 해도 독립된 고을이었다. 조선 후기까지 작은 고을 현이었던 대흥은 숙종 때 군으로 승격되었을 정도... 좀 떨어진 교촌리에는 예산보다 100년 앞선 1405년에 문을 연 대흥향교도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읍성과 객사·옥사 등 관아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동헌의 북쪽에는 대흥면사무소가 자리잡고 있고, 그 앞에는 대흥을 상징하는 '의 좋은 형제상'이 세워져 있다.

 

 

 

 

의 좋은 형제상

 

 

 

 

 

슬로시티의 상징인 주차장 마당의 '달팽이미술관'

 

 

 

 

'달팽이 미술관'은 대흥면 보건소를 신축한 뒤 남아 있던 옛 보건소 건물을 슬로시티에 걸맞게 미술관으로 재구성하고 슬로시티의 상징인 '달팽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동헌 앞 250여 년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

 

 

 

 

 

 

 

동헌의 정문에는 '임성아문(任城衙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대흥은 백제 때 임존성(任存城)이라로 불리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임성군(任城郡)으로 개칭되어 조선시대에도 그 이름으로 불린 모양이다. 아문(衙門)은 글자 그대로라면 '관아의 문'이라는 뜻이겠지만 일반적으로 관청을 두루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수령(사또)이 정무를 보던 대흥동헌(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4호)

 

 

 

 

 

1407년(태종 7)에 창건되어 예산 지역에 유일한 관아 건물로 남은 대흥동헌은 정면 6칸(14.4m), 측면 2칸(4.8m), 처마 높이 3.3m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앞쪽으로 반 칸 넓이의 마루가 이어져 있고 북쪽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대청이 설치되어 있다.

 

상량문에는 영락(永樂) 5년(1407년)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강희(康熙) 42년(1703년)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현재의 건물은 숙종 때(1703년) 대흥이 군으로 승격될 당시 지은 조선 후기 건물로 짐작된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대흥면이 예산군에 통합되면서 대흥면사무소로 개조되어 해방 후까지 사용되었고, 대흥면사무소가 현 위치에 신축되면서 1979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원래 객사에는 정청 3칸, 동대청 12칸, 은사정 14칸, 서헌방 16칸, 하마대 4칸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동헌과 아문 2동만 남아 있다.

 

 

 

뒷뜰에서 바라본 동헌

 

 

 

 

 

 

동헌의 남쪽 방향 내아 위치에 지어진 건물은 회벽을 칠한 한옥인데 멀리서보아도 좀 낯선 양식이다.

 

 

 

 

 

들어서서 보니 고을 수령의 살림집인 내아(內衙)는 복원되어 있지 않고 마당 한 귀퉁이에 온돌방이 없이 4분합문을 단 별당이지 싶은 맞배지붕 건물에 가마솥을 둔 부속 건물이 하나 서 있다.

 

 

 

 

 

 

그러고 보니 한쪽에 드라마 <산 넘어 남촌에는>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그러니까 저 건물은 드라마 세트장으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동헌 뒤뜰에는 영조 임금의 딸인 화령옹주 태실과 대원군이 전국에 세운 척화비가 자리잡고 있다.

 

 

화령옹주 태실과 태실비

 

 

 

 

 

 

화령옹주(和寧翁主, 1752∼1821)는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淑儀文氏)의 장녀로 사도세자의 이복 동생이며 정조의 고모이다.

 

청성위 심능건과 결혼하였다. 생모 숙의 문씨는 정조 즉위 직후 사도세자를 무고한 혐의로 사사되었는데, 두 딸은 정조가 감싸주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동생인 화길옹주는 결혼하였지만 19세에 요절했다. 능원은 서울시 노원구에 있다고 한다.

 

 

척화비

 

 

 

 

 

후문 밖에서 바라본 동헌

 

 

 

 

 

 

임성아문 앞 아름드리 느티나무 곁에는 '의 좋은 형제'의 주인공인 이성만 형제 효제비(효제비)가 비각 속에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비슷한 내용인데 무슨 안내판을 둘이나 세웠는지...

 

 

 

 

 

 

 

고려시대 효성이 지극한 이성만과 이순 형제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1497년(연산군 3)에 세운 화강암 비석. 교과서에도 실렸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여기서 비롯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대흥현'조에 전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전기, 호장(戶長)인 이성만 형제는 부모 생전에는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봄과 가을에는 술과 떡을 하여 부모에게 드리고 친척들과 나누어 먹었으며, 부모가 죽은 뒤에도 형은 아버지 묘를 지키고 동생은 어머니 묘를 3년 동안 지켰다. 또한 형제간 우애가 지극하여 아침에는 형이 아우의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으로 가서 아침밥과 저녁밥을 같이 먹었으며, 한가지 음식이 생겨도 형제가 함께 있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성만 형제의 의좋은 행실을 왕에게 보고하자 조정에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고 자손에게 영원히 모범이 되게 하기 위해 173자가 기록된 비를 세웠다.

 

이 비는 원래 개뱅이다리(佳芳橋) 옆에 세워져 있었는데 예당 저수지 수몰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해마다 9월이면 의좋은 형제 이야기를 소재로 내건 '예산 옛이야기 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