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벚꽃 만발한 선운사 참당암을 찾다

모산재 2016. 4. 11. 20:20


소리재에서 참당암(懺堂庵)으로 내려가는 길은 고즈넉하고 호젓하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용문굴과 낙조대 쪽으로 향할 뿐, 참당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비어 있어 산책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그 길의 끝에서 참당암이라는 암자를 만난다.


그런데 암자가 아니다. 이름만 듣고 선운사에 소속된 작은 암자이겠거니 하고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겠다.




신작로를 따라 잠시 오르자, 아름드리 벚나무에 벚꽃이 환하게 피어 있는 법당 마당 너머로 늘어서 있는 당당한 전각들 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살펴보니 웅장한 맞배지붕 대웅전 옆에는 응진전과 명부전을 들인 6칸짜리 전각이, 그 뒤편에는 지장전이 늘어 서 있고, 남동쪽과 북서쪽 마당에는 7칸짜리 요사채를 비롯하여 모두 6채의 전각과 당우가 들어서 있는 제법 큰 사찰이지 않은가?









참당암은 선운사 부속 암자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지금은 선운사의 부속 암자로 격하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참당사(懺堂寺), 대참사(大懺寺) 등으로 불렸던 큰절이었으며, 검단선사가 창건한 절은 지금의 선운사가 아니라 바로 이 참당암이었다는 설도 있다. (전설에 따르면 해적과 산적들의 소굴이었던 선운산에 검단선사가 해적들에게는 소금 만드는 법을, 산적들에게는 숯 굽는 법을 가르쳐 불교도로 교화시키고 선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581년(백제 위덕왕 28), 신라 승려 의운(義雲)화상이 진흥왕(진평왕이라는 설도 있음)의 도움으로 창건하여 '대참사'라 하였는데,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 차례 중수가 있었다. 당시 법당 동쪽에 승당, 서쪽에 미륵전, 위로는 약사전, 아래로는 명부전 등 여러 전각을 갖추어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독립된 사찰로서 번성하였으나, 조선 성종 이후 선운사가 중심 도량이 되면서 차츰 사세가 약화되었다고 한다.






벚꽃 그늘 아래에서 법당을 바라보며 잠시 왜 이름이 참당암(懺堂庵)일까 생각에 잠겨 본다.

 

'뉘우치는 집'이라니... 부처님께 귀의한 스님이 암자에서 뉘우쳐야 할 죄나 과오가 무엇일까? 단순히 자신만의 죄업을 씻기 위해 참당이란 암자가 필요한 것은 아닐 텐데...



나중에 여러 자료를 찾다보니 불교에서 '참(懺)'은 산스크리트어 '크사마(kṣama)'의 음역으로 '인(忍)'을 의미한다는 구절을 발견한다. 불교에서 '참(懺)'은 타인에게 자기 죄의 용서를 비는 뜻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석가 당시부터 '참(懺)'이 중시되어, 포살(布薩) 및 자자(自恣)라고 불리는 참회법이 행해졌다고 하는데, 포살은 보름에 한 번 계본(戒本)을 외워 죄과의 수를 세고 자기가 범한 죄가 있으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참회하고 연장의 승려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이며, 자자는 안거(安居) 동안의 마지막 날에 승려들 서로가 서로를 비판하며, 각자 참회 고백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신라에서는 <점찰경(占察經)>에 따라 '점찰법회(占察法會)라는 참회의 법회의식이 원광(圓光)에 의해 처음 열렸고 삼국통일 후 진표(眞表)에 의해서 융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회의 방법으로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사참은 부처님 앞에서 진심으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날로 선업을 쌓아 가는 것이며, 이참은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과 삼독오욕, 사심잡념을 제거해 가는 것. 진정한 참회를 위해서는 죄업의 근본이 되는 탐(貪, 탐욕)ㆍ진(瞋, 분노)ㆍ치(癡, 어리석음) 삼독(三毒)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참당암(懺堂庵) 대웅전은 보물 제803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


 

  

현존하는 참당암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건물이지만 부재와 치목(治木), 기법 등으로 보아 선운사 대웅전보다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앞면 3·옆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집이다. 그런데 앞면에는 기둥 사이에도 공포가 있는 다포 양식인데, 뒷면은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을 취하고 있는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건물을 수리할 때 고려시대의 부재를 재활용한 것이라 짐작한다.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여래좌상 좌우에 관음보살좌상과 세지보살좌상을 배치한 목조삼존불상이 안치돼 있다. 삼존불은 1561(명종 16)에 봉안되었으며,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1900년에 조성되었다.

  







불전의 두 대들보 위에 마주보는 한 쌍의 봉황 조각을 배치한 것이 눈길을 끈다. 주변 벽화들은 소박한 민화풍을 보이는데, 18세기의 경향과 솜씨를 반영하고 있.




서쪽 벽의 탱화





대웅전 동쪽으로는 긴 6칸 전각이 자리잡고 있는데, 응진전과 명부전이 각 3칸씩 나누어 차지하고 있는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니 건물이 좀 이상한 모양이다. 6칸의 간격이 일정치 않은 점도 특이한데, 기둥은 칸에 비해 매우 굵은 편이며, 주춧돌은 지나치게 커서 주춧돌과 주춧돌이 거의 닿을 듯 배열되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6칸 건물임에 비해 지붕이 아주 낮은 편이다. 그래서 이 전각은 이전에 있었던 여러 전각들의 재목을 재활용하여 지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된다. 



명부전의 지장보살과 시왕들의 표정은 근엄하기보다는 자애로운 모습에 더 가까운 듯하다. 그러나 너털웃음이 번지는 선운사의 명부전만큼 유쾌하지는 않다. (☞ 선운사 명부전 => http://blog.daum.net/kheenn/7049709, http://blog.daum.net/kheenn/15854109)






응진전 뒤편에는 지장전이 있다.




지장전 안에는 석조지장보살좌상(유형문화재 33호)이 모셔져 있다.





오른손에 보주를 쥐고 있어 약사여래로 알려져 왔고 현재 문화재청에도 '선운사 약사여래불상'이란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머리에 두건을 쓴 모습이 전형적인 지장보살상이다. 굴곡이 적은 직선적인 신체, 크고 넓적한 얼굴, 직선적으로 가늘게 그어진 눈매와 딱딱한 표정, 평판적인 옷주름 표현 등으로 조선 초기의 것임을 짐작케 하는데, 이는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과 도솔암 도솔천내원궁의 금동지장보살상(보물 제 280호, ☞ http://blog.daum.net/kheenn/15854111)과 아주 비슷한 특징이다.


대좌 상대석이 사각형인 점도 특이해 보인다.  



그런데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대사찰이라고 할 수 없는 암자급 사찰에 명부전과 지장전을 두어 지장보살만 두 존을 모셨다는 것 아닐까? 명부전, 시왕전, 지장전을 동류의 전각으로 보는 상식을 파괴하는 전각 배치...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성불()을 하지 않겠다."고 석가모니에게 서원한 지장보살!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지옥에 몸소 들어가 죄지은 중생들을 교화, 구제에 나선 지장보살이야말로 진정한 '참(懺)'을 이루고자 하는 대승불교의 진면목이 아닐까 싶다. 참당암의 두 존의 지장보살은 이 세상의 모든 죄업을 씻고 극락 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민중의 소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지...  





대웅전 앞에서 바라보는 천왕봉(303m)과 소리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