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예산 봉수산 대련사,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 '임존성'

모산재 2016. 6. 2. 13:00


대흥 동헌을 돌아본 뒤 봉수산()과 임존성을 오르기로 한다.


봉수산은 봉의 머리를 닮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대흥의 진산이지만 서쪽 고을인 홍성의 안산 역할을 하는 산으로 그 기슭에는 주류성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의 주요 근거지인 임존성이 자리잡고 있다.




임존성 남문 쪽에서 오르기 위해 동산리로 이동하여 대련사()까지 승용차로 오른다. 동산리 마을 좁은 길에까지 관광버스가 들어와 등산객들을 부려 놓고 있다.




임존성 아래에 자리잡은 대련사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듯 아름드리 나무 그늘 속에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600년 되었다는 느티나무





대련사는 멀지 않은 서산의 가야산에  자리잡고 있는 수덕사의 말사로 백제 멸망(660년) 직전인 656년(백제 의자왕 16)에 의각()과 도침() 두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천년 고찰이다. 대련사()라는 이름은 이 사찰을 내려다보는 임존산성에 연꽃연못()과 연꽃우물()이 있어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천 년 세월을 훌쩍 뛰어 넘은 고찰의 법당,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극락당은 소박하다.




언뜻 보면 지붕 양쪽이 사다리꼴로 벌어져 보여 팔작지붕집인가 싶은데, 지붕 양 옆으로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풍판이 달려 있으니 맞배지붕집이다. 맞배지붕인데도 다포계여서 다소 부조화스럽다. 본래 '원통보전'으로 불렸는데 1975년 해체 보수할 때 중수상량문과 함께 '극락보전'이라는 현판이 발견되어 극락전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법당 앞 마당에는 작은 삼층석탑이 있다. 





이 사찰을 창건한 도침스님은 나당연합군에 맞서 백제 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쳐서 멸망시키자, 백제의 왕족 복신과 함께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고 주류성(지금의 한산 또는 서천의 건지산성)을 근거로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이라 칭하고 임존성에서 기세를 떨쳤다고 하니, 대련사는 바라 도침의 활동 근거지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반목하던 복신에게 피살됨으로써 백제부흥운동은 실패하게 된다. 




700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와 요사채 심검당





심검당 맞은편 요사채에는 현판이 안 보이는데, 대개 심검당과 짝을 하여 적묵당()이라 부른다.


'지혜의 칼을 찾는 집'이라는 뜻의 심검당은 마지막 무명()의 머리카락을 단절하여 부처의 혜명()을 얻는다는 뜻을 담고 있고 적묵당의 고요이 참선한다는 뜻을 담은 것. 대개 심검당은 강원으로 적묵당은 선원으로 이용된다.






함박꽃이라 불리는 작약꽃





법당 앞 화단에는 원예종 돌나물 세덤이 번성하고 있다.






높은 석축 위 요사채 뒤편 뜰에는 스님들이 즐겨 드시는 듯, 고수나물도 밭을 이뤄 꽃을 피웠다.





백련사를 잠시 둘러보고 임존성을 향해 숲이 우거진 산길로 접어든다.


5월의 막바지에 이른 한낮의 날씨는 숲속이어도 덥게 느껴진다.


느릿느릿 15분쯤 오르자 무너진 옛 성터가 나타난다.





위쪽으로 올라서자 풀과 덤불에 묻힌 옛 성곽의 흔적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성곽은 봉수산 남동쪽 비탈을 포위하듯이 두르고 있다. 동쪽과 북쪽의 성곽은 무너져내린 옛 모습 그대로이지만 나중에 돌아보게 될 남서쪽  성곽은 최근에 복원해 옛 모습이 사라졌다





백제 시대 최대의 테뫼형 산성으로 둘레가 2450m라는데, 오른 곳에서는 시야가 한정되어 규모가 실감되지 않는다.


 

일단 성곽을 따라 가지 않고 능선의 등산로로 들어선다. 얼마쯤 걸으니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끊어진 탓으로 길이 흐릿해지며 나뭇가지들이 진행을 방해한다.   



족도리풀





20여 분을 능선을 헤치고 가자 성곽을 따라 조성된 내포문화숲길과 만난다.






봉수산 정상은 성곽의 바깥 쪽에 낮게 솟아 잇다.





산골무꽃





봉수산 정상은 넓은 공터가 조성되어 있어 정상에 선 감흥이 반감되는 기분이다.






이 풀을 만나고 난초 종류일까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넓은잎각시붓꽃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성곽길 언저리에는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 김의털이 흔하게 보인다.





다시 성곽길로 되돌아와 대련사 방향 서쪽 성곽길로 내려서기로 한다.





꿀풀





광대수염





넓은잎각시붓꽃으로 보이는 풀잎





남쪽으로 내려서는 성곽길은 계단을 이루며 많이 가파르고 좁다.


내려서는 길 건너편 남쪽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 하나가 이마에 닿을 듯이 보이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 산을 '웬수산'이라 부른다고 한다. 지도를 보니 내상산(384m), 나당연합군이 이 산에 올라 임존성 안을 훤히 들여다보고 부흥군을 공격하여 왔기 때문에 원수 같은 산으로 여기게 된 것이란다.  





남쪽으로 내려서던 성곽길이 동쪽으로 방향을 틀자 비로소 남쪽의 복원된 성곽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등성이를 포위하듯 두른 성곽은 바깥쪽만 성돌을 쌓고 안쪽은 자연 지형을 이용한 테뫼식 석성이다. 축성 방식은 안으로는 흙을 파내서 다지고 밖으로는 축대를 쌓는 내탁외축()형 방식...


'둘레 2,450m'나 되는 '백제 시대 최대의 테뫼형 산성'이라는 표현이 비로소 실감이 난다. 구불구불 휘감아 도는 웅장한 성곽이 햇살을 받아 빛나는 모습이 제법 아름답다.





임존성은 주류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흑치상지와 의자왕의 사촌 복신과 승 도침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옹립하고 임존성과 주류성에서 백제 유민을 이끌고 모여 3년 반에 걸쳐 결사항전을 벌였다. 하지만 내부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부여 풍마저 살해하려다 도리어 살해당하고 만다.


백제가 멸망할 때 의자왕을 따라 항복했던 흑치상지는 당군의 횡포에 분개하여 백제부흥운동에 합류하여 3만 백성을 무장시키고 200여성을 회복하며 위세를 떨쳤지만 내부 구ㅝㄴ력 다툼에 실망하던 중 당 고종의 회유에 항복을 하고 당군의 선봉에 서서 임존성을 함락시킨다. 663년 백제부흥군과 일본 구원군이 백강구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대패하자 부여풍은 고구려로 망명하며 백제부흥운동은 종말을 고하고 만다.



이후 임존성은 후백제 견훤과 고려 왕건이 패권을 다투고, 몽고 침입 땐 대몽항쟁의 거점으로 격전을 치렀던 곳이기도 하다.




열매를 단 시무나무






※ 봉수산 임존성 안내도




임존성 백제 복국운동 기념비





성곽 아래에 있는 묘순이 바위 전설.


어린 시절 '전설 따라 삼천 리'라는 책에서 보았던 남매 장사 전설의 무대가 이곳!





성벽 밑(또는 성밖 숲속)에 ‘묘순이 바위’로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 엄청난 힘을 가진 장사 남매가 한집에 태어났는데, 한 집에 장사가 둘이 나면 하나를 반드시 희생시켜야 한다는 관습 때문에, 내기 끝에 성을 다 쌓고도 어머니의 방해로 오빠에게 져 희생된 여동생 묘순이의 전설이 깃든 바위다. 이 바위에 올라 돌로 두드리며 묘순이를 부르면, 흐느끼는 듯한 울림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감절대





광대수염





산성에서 내려와 태안 안흥항이 있는 신진도로 향하는 길, 오후 2시를 지난 시각 어느 중화요리집에서 짬뽕으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아직 정식 오픈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문한 만 원짜리 문어짬뽕, 맛이 괜찮다.





쟁반짜장면도 맛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