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여행

인도 (24) 사르나트 녹야원,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아소카 석주, 다메크 스투파

모산재 2016. 3. 22. 20:13

 

수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사르나트 유적지 한 귀퉁이에 지어 놓은 불교 사원, 물라간다쿠티 비하르를 돌아본 다음 폐허로 남은 녹야원(鹿野苑)으로 향한다.

 

 

 

서쪽 끝에 있는 매표소로부터 녹야원 유적지로 들어서자 드넓은 공터에 붉은 벽돌의 사원 흔적이 시야를 채운다. 현재 중요 발굴 유적으로 본당과 2개의 탑(다메크탑, 다르마라지카탑), 그리고 7개의 승원과 아소카 석주 등이 있다.

 

 

오전 한 나절이 지날 무렵이지만 안개가 자욱하게 낀 듯 흐릿하기만 한데, 바라나시의 한적한 교외 사르나트는 쓸쓸한 폐허만 남은 유적지와 어울려 묘한 정서에 젖어들게 한다.

 

 

 

 

 

1400여 년 전인 637년, 이곳을 순례한 현장 스님은 <대당서역기>에서 당시 인도에는 불교 사원이 1000 곳이 넘고 출가 수행자는 5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발길 닿는 곳의 종교 분포는 불교 반, 자이나교, 힌두교 등 외도(外道) 반 정도였다고 전한다. 이곳 녹야원에는 1500여 명의 스님이 등신불이 있는 황금지붕의 정사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아소카석주와 거대한 높이의 불탑, 사원들이 즐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루나 강에서 약 4km의 거리에 녹야원 가람이 있다. 8개 부분으로 구획된 대가람은 아 름답게 장엄되어 있다. 약 1500명의 승려가 소승 정량부(소승 20개 부파의 하나)를 공부하고 있다. 담장 안에는 높이 61m의 정사가 있어 그곳 지붕은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사 내부에는 청동제 등신불이 있다.

 

 

 

사르나트는 굽타 시대에는 벽돌 구조의 고층 탑 건축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굴 조사에 의하면 1변이 약 20m의 정방형 건물지가 있으며 이곳을 방문한 현장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그 건물 높이가 200여 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래는 예술역사가 퍼시 브라운(Percy Brown,1872–1955)이 만든 7세기경 사르나트 불교사원 복원도로, 보드가야 고층탑과 같은 건물 형태가 대담하게 묘사되어 있다.

 

 

 

 

사르나트의 사원 유적은 아쇼카왕과 사카(Saka)와 쿠샨(Kushan)왕조의 후원 아래에 번창했다.

 

 

석가모니 입멸 후 약 200년이 지나 BC 3세기 경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은 이곳 사르나트에 높이 약 30.4m에 이르렀던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와 다메크 스투파 등 불탑과 승원 건물, 아소카석주 등을 건설하였다. B.C. 2∼1세기의 슝가 왕조 기간에는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주위에 석주 난간들을 만든 것으로 보이며 AD 1세기 경 쿠샨 왕조의 카니시카 왕 때에는 마투라 지방에서 건너온 비구 발라가 붉은색 사암으로 대규모의 불상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AD 4∼6세기의 굽타 왕조기를 맞아 사르나트는 인도 불교의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사원들은 확장되고 수많은 조상들이 조성되었다. 다메크 스투파는 중수 되어 외벽에 감실이 만들어지고 기하학적 문양이 조성되었다. 찬드라굽타 2세(376∼414년) 때 이곳을 찾았던 법현의 <불국기>에는 사르나트에 4개의 스투파 및 2개의 승원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있다.

굽타왕조의 뒤를 이은 불교 왕조인 팔라왕조(750-1174년) 시대에도 사르나트는 그 위세를 대체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멀리 금빛 시카라의 자인교 사원이 나타나고 오른쪽으로 5번 승원(monastery) 유적이 시야에 들어선다.

 

 

 

 

 

20세기 다르마팔라에 의해 불교사원이 다시 서기 전까지 이곳은 힌두교와 자인교 사원이 점령하고 있었던 곳.

 

 

11~12세기, 이슬람의 북인도 침입이 본격화되며 인도 불교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고 사르나트도 역사로부터 사라지게 된다.

 

팔라왕조 말기인 1017년 마흐무드 가즈니(Mahmud of Ghazni)의 침공으로 바라나시 일대가 점령당하며 사르나트가 많은 피해를 입는다. 그 와중에서도 다르마챠크라 스투파를 복원하고 8대 영장에 바치는 새로운 사원이 건립되고 가하다발라 왕조의 고빈다찬드라(1114∼1154) 때 '다르마챠크라 지나 비하라'라 불리우는 대규모의 승원이 조성된다. 그러나 1194년 초대 술탄으로 노예왕조를 연 쿠트부딘 아이바크(Qutb-ud-din-Aibak : 그는 델리 정복 기념으로 쿠틉미나르를 세운다)에 의한 무슬림의 침공으로 사르나트는 완전히 폐허에 묻히고 만다.

 

 

그런데, 인도 불교는 단순히 이슬람의 침공이란 외부적 요인으로 무너진 것은 아니라 한다.

 

A.D. 637년 경 현장이 이곳을 방문했을 즈음 힌두 교단에 새로운 기풍이 거세지고 불교는 점차 그 영향을 받아 금강승 불교의 한쪽, 좌도밀교의 탄트라적 경향이 짙어져 가고 있었고, 방종과 도덕적인 해이도 매우 심각했다고 한다. 거기에 힌두교 대철학자 샹카라의 등장으로 힌두교는 크게 융성하고 불교는 탄트라적 성격이 짙어지면서 불교의 정체성이 모호해지면서 점차 힌두교에 흡수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바로 앞 7번 승원 유적 너머로, 멀리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와 본당 유적이 시야에 들어선다.

 

 

 

 

 

 

사르나트의 발굴은 1815년 매킨지(C. Mackenzie)에 의해 시도되다 1835년부터 영국 왕립 고고학회 커닝햄(Alexander Cunningham)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발굴한 것이 사원, 탑, 수도원이고, 이를 통해 사르나트 유적의 전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외르텔(Friedrich O. Oertel)이 중심 사원 근처에서 4마리 사자가 조각된 아쇼카 석주, 가르침을 펼치는 부처상, 카니시카 시대의 불상 등 500점 이상의 유물을 찾아냈고, 이들 유물은 현재 사르나트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르나트의 중심적인 유적은 본당, 아소카 석주, 다르마라지카(Dharmarajika) 스투파, 다메크(Dhamek) 스투파이다.

 

 

※ 사르나트 발굴 유적 안내도

 

 

 

 

 

'초전법륜사(初伝法輪寺)'로 알려진 다르마라지카 스투파(Dharmarajika Stupa) 유적.

 

지름 13.49m의 거대하고 둥근 터만 남은 모습이다.

 

 

 

 

 

현장법사에 따르면 이 탑의 높이는 100자가 넘었다고 하며 그 앞에는 70자 가량의 석주(아소카 석주)가 세워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르나트에서 출토된 최초의 보살상 및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초전법륜상 역시 이곳에서 출토되었는데, 이들은 탑의 감실에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사르나트 남쪽에 자리잡은 '영불탑(迎佛塔)'이라 불리는 차우칸디스투파에서 석가모니가 다섯 수행자와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와 무상정각의 법을 최초로 설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초전법륜사(初伝法輪寺)라고 한다.

 

 

아소카왕이 스투파를 세운 뒤 쿠샨 왕조대에 첫 번째 증축이 이루어지는 등 무려 여섯 번에 걸친 보완공사를 거쳐 30m 높이까지 거대한 규모로 지어졌다고 하는데 중간에 헐어버려 지금은 그 흔적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탑은 18세기까지 그런대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1794년에 바라나시의 마하라자가 자신의 건물을 짓기 위해 이 탑을 헐었다고 한다. 안타가운 것은 그 때 글씨가 쓰인 함을 발견하였지만 해독을 하지 못하고 사리병에 들어있던 부처님 진신사리를 갠지스 강에 버렸다고 한다. 그 사리함과 사리병은 뉴델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었다고 한다.

 

 

 

자인교 사원 저쪽으로 아까는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다메크탑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사원 유적 석재들...

 

 

 

 

 

본당 서쪽에 자리잡은 아소카 석주(Pillars of Ashoka)에 이른다.

 

 

 

 

현재는 2m 정도의 밑부분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높이 15.25m, 직경 71.1cm에 이르는 돌기둥으로, 그 기둥 머리에 올려진 네 마리의 사자상과 법륜은 고고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석주는 B.C. 250년 이곳을 순례한 아소카왕이 조성한 것으로서석주 표면에는 고대 인도의 브라흐미(Brahmi) 문자로 새겨진 아소카왕의 법칙과 함께, 당시 코삼비 및 바라나시를 통치하였던 아슈바고사 왕의 명문('아슈바고사 왕 40년 겨울'이란 각인이 새겨져 있다) 및 '소승 독자부의 정량부 부파 소유' 라 적힌 초기 굽타시대의 기록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네 방향으로 향하는 네 마리의 사자상은 부다에 대한 왕의 신분과 왕의 법령이 전국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자상 원형은 현재 사르나트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기둥머리는 종 모양의 연꽃 위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코끼리·말·황소·사자 네 마리의 동물과 법륜(Dharma wheels)을 의미하는 수레바퀴 네 개가 조각된 원형의 판이 올려져 있다.

 

 

석주에 새겨진 아소카 왕 법칙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승가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분열될 수 없음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그러나 만약 어느 비구나 비구니가 이 승단의 화합을 깬다고 하면 그는 곧 흰옷을 입고 그 승단에서 축출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승단의 화합을 유지하는 금계이다.

 

 

승단의 파괴를 경고하는 내용의 명문은 산치의 석주에도 남아 있어 당시 승단의 분열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아소카 석주의 사자상은 현재 인도의 국가 문장(National Emblem)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인도 지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수레바퀴 모양의 도안은 인도 국기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 아소카(Ashoka)왕 (재위 : B.C. 273~232)

마가다 왕국 마우리아 왕조 3대 왕으로 인도 최초의 통일자인 찬드라굽타(Chandragupta)의 손자이다. 부친 빈두사라의 사후 형을 죽이고 고대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으로 올라 인도 남단 타밀 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를 정복하고 인도 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을 세우고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를 건설하였다.

또한 불사리를 8만 4천 개로 나누어 제국 각지에 탑파(塔婆)를 세우는 등 인근 국가들에 불교를 적극적으로 포교함으로써 동남아 소승불교의 터전을 닦은 인물이기도 하다. 불교 전설이나 설화의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하는 아소카왕은 고대 인도 종교와 신화에서 통치의 수레바퀴를 굴려 세계를 통일, 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 즉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상을 충족시킨 인물, 즉 세속의 전륜성왕으로도 일컬어졌다. 전륜성왕은 무력이 아닌 정의와 정법(正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제왕이기도 하다.

 

 

 

폐허로 남은 본당 유적들...

 

기단과 일부 구조들은 긴 석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벽체는 모두 붉은벽돌로 되어 있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인지 나중에 입힌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벽이나 불상 곳곳에 입혀져 있는 금박 흔적들이 남아 있다.

 

 

 

 

' Monolithic Railing'이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는 안쪽에는 이런 조형물이 자리잡고 있다.

 

 

 

 

정사각형으로 이어진 석재가 원래 하나로 되었다는 뜻일까...? 1904년부터 1905년까지 외르텔(Friedrich O. Oertel)이 발굴한 것 중의 하나라는데,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의 꼭대기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찬란한 금박이 붙어 있는 본당(물라간다쿠티)의 중심. 

 

이곳을 '근본여래향실'이라고도 부른다. 부처님을 모신 곳으로 보이는데, 지금도 향을 사르는 참배객들이 줄을 잇는 듯 흔적이 어지럽게 남아 있다.

 

 

 

 

 

무너져 내린 석재에는 섬세한 조각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팔자 좋은 견공 님들.

 

표정을 보면 저들이야말로 성불한 듯 평화롭기만 하다.

 

 

 

 

 

본당 부근의 승원 유적들

 

 

 

 

 

본당 앞 동쪽으로 난 길 양쪽을 따라 회랑처럼 긴 건물 기단 흔적들이 이어진다.

 

 

 

 

 

본당 앞 한족에 자리잡은 판차이탄 템플(Panchaytan Temple). 이곳은 5비구가 수행하던 자리라고 하던가...?

 

 

 

 

'Panchaytan'은 오르차의 시노타프 건축 양식에서 이미 자주 보았던 용어인데, 중심 신전 사방에 부속 신전이 있는 건축 형태를 일컫는 말이다. 이 건축도 자세히 살펴보니 중심을 두고 네 귀퉁이가 돌출된 구조를 보이는 판차이탄 스타일이다. 

 

 

 

 

 

언덕에 기대고 있는 유적의 일부. 작은 불상과 도안들이 아주 섬세하다.

 

 

 

 

 

언덕 위의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여행 동료들이 보고 있는 장면은...?

 

 

 

 

바로 이 장면...! (강 선생님 작품)

 

 

 

 

그렇게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던 유적은 바로 이것!

 

 

 

 

 

그리고 벤치가 있는 언덕 위에는 4번 승원 유적이 자리잡고 있는데, 섬세한 조각띠가 인상적인 아름다운 한 쌍의 돌기둥이 눈길을 끈다. 

 

 

 

 

 

 

석주 뒤편으로 보이는 철망 너머로는 사슴 동산이다. '녹야원(鹿野園 - 므리가다바)'의 의미를 살려 사슴을 기르고 있다. '녹야원'이라는 이름은 부처의 전생담에 나온다.

 

 

때를 알 수 없는 과거에 사르나트 숲속에는 1천여 마리의 사슴이 살았다. 이때 사슴떼의 왕이 바로 전생의 부다였다.

당시 바라나시의 마하라자는 사냥과 사슴고기를 즐겼다. 매일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사슴무리의 왕은 마하라자를 찾아가 그렇게 사슴고기가 먹고 싶다면 사슴들이 순번을 정해서 매일 한마리씩 죽을테니 사냥을 중지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사슴들은 그날 이후로 매일 순번을 정해 한마리씩 죽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슴 중 한 마리가 죽을 차례가 되었는데,공교롭게도 새끼를 밴 사슴이었다. 자비심 많던 사슴 왕은 이 어미를 위해 자신이 대신 죽기로 결정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마하라자는 자신이 사슴만도 못한 자비심의 소유자라는 걸 깨닫고 그 이후 사르나트에 있는 사슴을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언덕 안쪽 낮은 터에는 긴 주춧돌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데, 어떤 형태의 건축물이 서 있었는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언덕 아래 본당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포장길, 언덕쪽으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일정한 형태의 작은 붉은벽돌 구조물이 주춧돌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어쩌면 주줏돌이 아니라 묘탑 기단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끝에는 다메크 스투파가 자리잡고 있다.

 

 

 

 

 

스투파 바로 아래 본당에서 이어지는 동쪽 포장길 끝에는 묘탑처럼 생긴 석조물들이 서 있고 벽면에는 불상이 남아 있다.

 

 

 

 

 

귀여운 인도 소녀.

 

좀 떨어진 곳에서 슬쩍 찍는데 하필 그 순간 눈맞춤을 한다. 쏘리~~.

 

 

 

 

 

 

'법안보탑(法眼宝塔)'이라고도 불리는 다메크 스투파(Dhamekh Stupa).

 

사람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 흰 천(타르촉)을 돌에 매달아 던져 올린 탓으로 천조각이 많이 걸려 있다.

 

 

 

 

2층의 원통형 탑으로 높이가 33.53m로 기단부까지는 42.06m이며 아랫부분 지름은 28.5m이다.

 

기원전 249년 아소카 왕이 세우고 기원 후 500년경 굽타 시대에 증축되었다고 한다. 높이 11.2m에 이르기까지는 큰 돌을 쌓았으며 그 위에는 벽돌로 되어 있다. 기단부는 아소카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메크는 '진리를 관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로, 중생들이 형색과 겉모습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경계하여 진리를 마음으로 바로 보라는 뜻에서 조성하였다고 한다. 또는 부처님께서 다섯 비구들에게 처음 설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하며, '법륜(法輪)을 뜻하는 '다르마 차크라 스투파'라 불리기도 한다.

 

 

1835년 발굴을 위해 스투파의 중심부를 수직으로 파내려가던 중 정상에서 91.4cm 정도의 아래 부분에서 둥근 석판에 새겨진, 브라흐미 문자로 6~7>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법신게(法身偈)를 발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생겨난다.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 나의 스승은 대성왕(大聖王 석가모니)이시고 이것이 그분의 가르침이네.

(諸法從緣生 是法緣及盡 我師大聖王 是義如是說)

 

 

원형 벽 중앙에는 8개의 벽감이 있는데, 불상을 모셨던 흔적으로 보이지만 불상은 남아 있지 않다.

 

원형 벽 아래쪽에는 여러 가지 문양의 기하학적 무늬와 보살, 새, 연꽃과 식물 등의 문양을 장식했는데, 조각이 섬세하여 굽타시대의 예술적 우수성을 헤아릴 수 있다.

 

 

 

 

 

 

다메크탑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어디서 들리는 가냘픈 "헬로우"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옆 울타리 바깥에서 동양 그릇을 옆에 놓고 철망 틈으로 새 다리 같이 가는 팔을 들여 밀고 구걸을 하는 인도 여인들...

 

여행 내내 마음 편치 않은 인도...

 

 

 

 

사르나트 유적지를 돌아본 다음 사르나트고고학박물관(Archaeological Museum, Sarnath)으로 향한다.

 

또 한떼의 마른 아이들이 따라 붙지만 여행자는 애써 외면하고 갈 길을 갈 뿐이다.

 

 

 

박물관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카메라를 비롯한 모든 짐을 맡기고 입장한다.

 

 

박물관 입구 한쪽에 모여 있는 인도 사람들

 

 

 

 

입구 출입문 사이로 사르나트고고학박물관 전경을 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사르나트 고고학 미술관은 1904년 사찰(Sangharama) 형태로 지어졌고 5개의 전시관과 2개의 베란다가 있다. 입구에서 왼쪽은 BC 3세기부터 AD 12세기까지 불교 유물을, 오른쪽은 시바신상 등 힌두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박물관 입구 중앙 현관에는 인도의 국가 문장으로 쓰이는 아소카 왕의 석주 상부인 라이언 캐피탈(Lion capital)이 자리잡고 있다.

 

 

출처 : 구글 검색

 

 

네 마리의 사자들이 사방을 바라보며 사자후를 토하고 있는 모습, 통일국가를 이룬 아소카왕의 위엄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아래 쪽에는 사방으로 4개의 법륜이 있고, 그 사이에는 코끼리, 사자, 황소, 말이 새겨져 있다.

 

 

중앙 현관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끈 것은 커다란 석조 우산. 1세기 쿠샨왕조 때의 작품으로 지금 304cm로 초대형이다.

 

 

출처 : 고고학박물관 홈페이지

 

 

 

그런데, 한떼의 초등학생들 입장하더니 나에게 몰려들어 악수를 청하고 질문 공세... 관람을 하는 내내 서투른 영어로 이들과 대화를 해야 했다. 여행 내내 그랬지만 인도 아이들은 외국인들에게 참 스스럼 없는 면을 보인다.

 

 

그리고 이 박물관의 보물은 뭐니뭐니 해도 5세기 굽타 왕조의 최고 걸작인 '초전법륜불좌상(初轉法輪佛坐像)'이다. 

 

 

 

 

 

다르마라지카 탑지에서 발견된 사암 불상으 박물관 왼쪽 불교 작품 전시실의 맨끝에 자리잡고 있다. 광배에는 두 인물상, 팔꿈치 옆에는 천마상, 좌대에는 공양인물상 등이 각각 조각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그 외에도 11세기의 연화수보살(Bodhisattva Padmapani)상 등이 인상적이었지만, 아쉬움을 남기고 다음 일정을 위해 바라나시로 가는 오토릭샤에 올라야 했다.

 

 

 

 

여행 당시에는 전혀 주목하지 못했던 곳, 릭샤를 타고 가다 오른쪽으로 솟아 있는 독특한 탑이 눈길을 끌었는데 나중에 확인하니 바로 '영불탑(迎佛塔)'이라 부르는 '차우칸디 스투파(Chaukhandi Stupa)'였다.

 

고고학박물관 남쪽 400m 지점에 있는 이 탑은, BC 528년 35세의 석가모니가 다섯 비구를 처음 만났다는 자리에 세운 탑이다.

 

 

출처 : 구글 검색

 

 

 

A.D. 637년 경 이곳을 순례한 현장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가람 서남쪽 서남쪽 2∼3리에 높이 3백여 척 되는 스투파가 있 다. 기단은 넓고 높으며, 장식도 별나게 진귀한 것이다. 기단 위에는 감실이 없고 곧바로 복발이 놓여져 있으며, 산개는 세워졌지만, 그 위에 상륜부는 없다. 교진여 등 5명이 부처님을 영접한 곳이다.

 

 

이후 원래의 스투파층 위에는 8각으로 된 3층의 건물이 세워지게 되는데, 이것은 1588년 무갈 제국의 악바르 황제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서, 악바르 황제의 아버지 후마윤이 쉐르샤에 좇겨다닐 당시 맘타라 불리우는 비구니의 도움으로 이곳 스투파 위에서 몸을 숨겼다는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라고 한다.

 

1835∼36년 컨닝햄은 스투파의 중앙에 나있는 수직 통로 속에서 사리를 안치하는 작은 벽실을 발견하였으나 사리는 출토되지 않았다. 한편 3층 건물 외벽에는 감실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 모셨던 것으로 추정되는 굽타시대의 불상과 몇몇 부조들이 이곳에서 발굴되기도 하였다.

 

 

 

 

날씨는 하루 내내 흐릿하다. 바라나시의 숙소 수리야 호텔로 돌아오니 오후 2시 30분에 가까워졌다.

 

시원한 망고 라씨를 한 잔 마시고 볶음밥으로 늦은 점심 식사를 한다. 인도에서 여행 내내 만족도가 가장 높은 영혼의 음료는 라씨!

 

 

 

 

 

그리고 오후의 나머지 한 나절을 2시간을 쉰 다음 다샤스와메드 가트에서 열리는 아르티 푸자(Arti Puja)라는 힌두 의식을 보러 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