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여행

인도 (22) 시간이 멈춘 도시 바라나시, 가트 풍경과 인도 전통음악

모산재 2016. 3. 7. 10:19

 

레스토랑 베트와 타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 아마르 마할로 돌아와 바라나시로 떠나기 위해 배낭을 꾸린다.

 

 

오후에 맑게 개었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저녁 8시 20분, 오토릭샤 네 대를 불러 빗속에 잔시를 향하여 출발한다.

 

 

9시 30분쯤 잔시역에 도착.

 

역내로 들어서니 마치 전쟁 피난민들이 몰려든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역사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고, 소들은 먹이를 찾아 사람들 사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다. 순하고 맑은 소의 눈...

 

 

 

 

 

 

밤이 깊어지면서 으슬으슬 추워지고,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아예 플랫폼에 자리를 깔아 담요를 덮고 드러누웠다.

 

 

 

 

 

10시 30분 기차. 우리 일행들도 짐을 한 곳에 모아 놓고 하염없이 기차를 기다린다. 무료함을 달래느라 이 선생님이 꺼내 놓은 위스키도 한 잔씩 홀짝거리며...

 

인도 기차는 연착이 다반사라는 말을 믿고 델리에서 정시에 떠나는 카주라호행 기차를 두 눈 멀건히 뜨고도 놓친 아픈 경험이 있는지라 10시 20분이 넘자 열차 번호를 확인하며 잔뜩 긴장...

 

 

 

 

 

 

10시 30분, 바라나시행 기차는 제 시간에 들어선다.

 

열차 번호를 확인하고 오르니 좌석의 출입문 입구에는 승객 명단이 붙어 있다. 우리가 타는 기차는 2층 침대 냉방 칸인 2AC.

 

이내 기차는 출발하고 나는 4인 1실칸에서 따로 떨어진 한 자리를 받아 바로 취침에 들어간다. 바라나시에는 내일 아침 10시 5분에 도착할 예정이니 무려 12시간이 넘는 긴 여행...

 

내 자리 맞은편 침대칸은 부녀지간일까 싶은 남녀... 날씬한 몸매의 처녀에 절로 눈길이 간다.

 

 

 

 

미지의 바라나시를 향해 기차는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덜컹거리며 밤새 달린다. 아침 7시 무렵 잠에서 깨어나니 맞은편 2층의 예쁜 처녀와 눈길이 마주친다.

 

 

 

아침을 굶은 채 동료들은 커피를 끓여 마신다. 과일과 컵라면이 조금 있었지만 양이 얼마 되지 않아 일부 사람들만 조금 맛을 보고...

 

 

차창 밖으로 파란 밀(?)이 자라는 넓은 들판 풍경이 펼쳐진다. 하지만 햇살이 비치지 않고 안개가 낀 듯 흐릿하기만 한 날씨... 높은 산과 맑은 물이 흐르는 풍경이 그리워진다.

 

 

 

10시 50분 도착 예정이었던 기차는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연착. 12시 30분에 바라나시에 도착한다. 역 후문으로 나와(정문으로 나오면 숙소까지 시간이 더 걸린다) 릭샤 네 대를 불러 숙소인 수리야 호텔까지 이동.

 

호텔로 가는데 릭샤꾼들이 길을 모르는 모양인지 한참을 헤매고서야 호텔에 도착한다. 배낭을 숙소에 풀어놓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

 

 

태양신 수리야의 이름을 딴 수리야 호텔(Hotel Surya)

 

 

 

 

 

샤워를 한 뒤 바라나시의 대표적 풍경인 가트(Ghat)로 이동...

 

거리로 들어서자 18~19세기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한 풍경. 길거리를 가득 메운 차량 대부분은 페달을 밟는 자전거와 릭샤이고 모터를 단 오토릭샤와 오토바이 등도 간간히 섞여 있다. 엉키어서 달리는 차량들이 마구 울려대는 경적소리로 귀가 따갑다.

 

 

 

 

 

그런데 릭샤꾼들을 보니 하나같이 장딴지가 새다리처럼 가는데 페달을 밟느라 삐쭉거리는 엉덩이는 살이 없고 깡말랐다. 하지만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탄 사람, 또는 인력거 뒤에 탄 사람들은 대부분 통통한 모습이다. 외모에서부터 인도인들의 계급은 뚜렷이 드러난다.

 

이방인에게는 별로 춥지 않은 날씨지만, 목도리로 깡마른 얼굴을 칭칭 감싸고 있는 표정은 몹시 추워 보인다. 인도인들이 추위에 약한 듯 작년 델리에서는 1000여 명이 동사했다고 한다.

 

 

가트가 가까워질수록 인파도 늘어나 발길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다. 가트 주변의 마지막 블록에서는 모든 차량이 통행 금지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바라나시를 대표하는 가장 큰 가트인 다샤스와메드 가트(Dashashwamedh Ghat)로 들어선다.

 

 

 

 

 

 

가트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풍경은, 갠지즈강이 아니라 줄지어 앉아 있는 걸인들!

 

넓은 계단을 따라 누추한 천으로 머리를 감싸고 온 몸을 두르고 웅크리고 앉은 있는 걸인들이 가트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향해 안타까운 눈빛을 보낸다. 마음이 불편해진다. 잡상인들이 따라 붙기도 하고 안마를 하라며 손을 붙들고 따라 붙는 사람도 있다.

 

 

 

이들을 뿌리치고 나서야 비로소 깃발이 나부끼는 가트와 그 아래로 펼쳐지는 갠지즈강(강가강)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 다샤스와메드 가트는 큰 화장터 곁에 있는 마니카르니카 가트(Manikarnika Ghat)와 함께 바라나시에서 가장 유명한 메인 가트이다.

 

 

다샤스와메드(das:10, aswa:말, meth:희생)는 창조신 브라흐마가 열 마리 말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이 가트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아르티 푸자(Arti Puja)라는 힌두교 예배의식이 거행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내일 저녁에는 그 푸자 의식을 구경할 예정이다.

 

 

 

 

 

 

계단식으로 된 가트는 쓰레기와 오물들이 널브러져 있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비위가 상하고 거북해지며 얼른 돌아보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가까이 다가서 본 갠지즈(강가) 강물은 혼탁하기만 하다. 이 세상 온갖 배설물들과 쓰레기들이 다 섞여서 흐르는 듯한 강물은 손을 담그기조차 겁나 보이는데, 사람들은 물속에 들어서서 몸을 담그고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는다. 심지어 그 물을 손으로 떠서 마시고 뭐라고 주문을 외기도 한다.

 

강가 강은 시바 신이 거하는 히말라야의 카일라스 산에서 발원한다. 그래서 힌두교도들은 갠지스강을 성스러운 어머니 강으로 숭배하고 그 강물에 몸을 담그고 죄업을 씻고 그 강물에 육신을 돌려보냄으로써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고 믿는 것이다.

 

 

 

죽음처럼 무겁게 흐르는 강가 건너편으로는 끝없는 모래밭 풍경이 흐릿한 안개 속에 잠겨 있는데, 망자의 혼백들인양 사람들이 느릿느릿 거닐고 있다.

 

저곳이 저승의 세계는 아닐까... 피안(彼岸)이라고 하였던가. 번뇌와 생사고해의 차안(此岸) 세계를 건너면 도달한다는 건너편 바라밀다의 세계...

 

 

 

 

 

 

강의 상류쪽(서쪽) 문쉬 가트(Munshi Ghat) 쪽으로 잠시 발길을 옮긴다. 

 

 

 

 

 

문쉬 가트 를 걷고 있는 나, 우택 형이 담아 주었다.

 

 

 

 

 

곳곳에서 수행자인지 그냥 주민들인지 모를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다.

 

정자처럼 생긴 저 작은 건물은 무얼까... 성스러운 바라나시의 강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길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음을 기다리는 집(묵티 바반)이 있다고 하는데 혹시 그런 용도일까 싶기도 하다.

 

 

 

 

 

 

문쉬가트에서 다시 마니카르니카 가트로 향하다 강물을 바라보는데 뭔가 둥둥 떠가는 것이 보인다.

 

마대 비슷한 포대로 묶인 눈사람 모양의 물체... 이상한 느낌에 뚫어지게 쳐다보니 분명 시체다. 가트 곳곳에서 지린내 같은 퀴퀴한 냄새에 기분조차 다운되어 있는데 강물에 떠 있는 시체까지 보게되니 몸서리가 쳐지고 가트를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런데 조금 뒤 대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혼자서 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머리를 짧게 깎은 한 한국인 청년이 내게 다가와 시체를 보았다며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그냥 맨몸뚱이인 채로 물에 둥둥 떠 있는 시체... 본 곳으로 이끄는데 실물을 직접 보니 진저리가 난다. 시체가 둥둥 떠다니는 바라나시의 갠지즈강... 그리고 바로 몇 백 m 하류에는 큰 화장터인 잘라사인가트(Jalasayin Ghat)가 자리잡고 있지 않은가...

 

 

그 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저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바라나시의 강가에는 6km에 걸쳐 모두 84개의 가트가 있다고 한다. 보통 힌두교도들이 몸을 담그는 장소로 이용되지만 빨래터이기도 하고 화장터의 역할도 한다. 대부분 마라타왕국(1674-1818)이 통치하던 18세기 무렵에 건설되었다.

 

강가는 비슈누의 발에서 솟아 나와 은하수로 하늘을 흐르다 시바 신의 머리타래를 타고 지상으로 떨어진다고 믿는다. 강가는 그 지류인 야무나 강과 함께 독자적인 여신으로 신봉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도인에게 강가는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신성한 인공간이며 생과 사를 잇는 윤회의 상징이기도 한 공간이다. 힌두교도들은 강가 물에 몸을 담금으로써 죄업을 씻고 강가에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Sri Ram Jay Ram Jay Jay Ram."

 

Ram은 라마를 뜻하는 말일텐데, 무엇을 뜻하는 진언일까. 인도 명상음악에도 자주 등장하는 구절인데... 

 

 

 

 

 

 

다시 메인가트를 지나 순례자들이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마니카르니카 가트를 지난다.

 

 

 

 

 

마니카르니카는 보석 귀걸이(mani : 보석, karnika : 귀)라는 뜻으로, 바로 곁에 있는 계단식의 깊은 연못인 마니카르니카 연못(manikarnika Kund)에는 이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비슈누가 수천 년의 금욕적인 고행을 마친 뒤 카시(바라나시)라는 성스러운 도시를 파괴하기 않도록 시바를 기쁘게 하기 위해 강가 강둑에 시바와 파르바티가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차크라로 연못을 팠다. 그런데 시바와 파르바티가 여기에서 목욕한 후 기쁨으로 머리를 흔들자 그만 귀걸이가 연못에 떨어졌고 그래서 이곳을 마니카르니카로 부르게 되었다. (참고 : 위키피디어)

 

 

 

마니카르니카 가트로 향하자 뿌연 연기들이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있다. 큰 화장터 또는 '메인 버닝 가트'로 불리는 잘라사인 가트(Jalasayin Ghat)가 시야에 들어선다. 

 

흔히 마니카르니카 가트를 화장터라 하는데, 엄밀하게는 바로 곁에 있는 잘라사인 가트가 화장터이고 마니카르가트는 힌두교도들이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는 곳이라 한다.

 

 

 

가까이 다가서니 몰려드는 연기와 냄새가 눈과 코를 자극한다.

 

 

그런데, 힌두교인들이 꿈에도 그린다는 생의 마지막이 바로 이런 장면이었단 말인가.

 

가트 맨 바닥에는 열을 지어 이승의 한 생을 마감한 주검이 불길이 되어 타오르고 있고, 시신을 태울 장작 더미들은 사방에, 강변 나룻배에도 어지럽게 쌓여 있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이별을 슬퍼하며 예복을 갖춰 입고 예를 표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누가 가족인지 누가 화장을 집행하는 불가촉 천민인지조차도 알 수 없이 사람들이 어지럽게 엉켜 서 있고 불길만 타오를 뿐이다. 통곡 소리도 없다.

 

 

그리고 사람만큼 많은 소들이 무슨 일로 이 화장터에 이렇게도 어슬렁거리는지... 개들도 돌아다닌다. 그리고 대나무로 엮은 들 것 위에 원색의 천으로 덮은 사신들이 속속 화장터로 내려온다.

 

 

 

 

 

강가에 도착한 시신은 엄숙한 의식의 과정도 없이 죄업을 씻기 위해 강가 강물에 적셔지고 쌓아 놓은 장작 위에 올려져 불이 붙는다. 장작 속에서 검게 탄 시신의 형체가 보인다. 다 탄 시신은 재가 되어 강가 강물 속으로 뿌려진다.

 

시신을 나르는 사람들을 '찬달(chandal)'이라 하고 화장을 집행하는 불가촉천민은 '돔(Dom)'이라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24시간 이내에 화장한다고 한다. 그래서 성스러운 강가에 최후의 육신을 담그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곳 바라나시 가트에 있는 '묵티 바반(Mukt Bhavan)'이란 '해탈의 집'에서 죽음을 기다린다고 한다.

 

그런데 수행자나 어린이, 임산부 등은 죄가 없어 화장하지 않고 수장한다고 한다. 나무값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도 수장되는 모양이다. 아까 보았던, 강물에 떠다니는 시체들도 이러한 사정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화장에 드는 나무 값이 3,000~5,000루피라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렵다고 한다. 장작을 많이 사지 못해 시신이 다 타지 못한 경우에는 개가 먹기도 한단다.

 

 

 

그런데, 이곳에서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데 무심코 셔터를 누르다 사단이 일어났다. 나는 화를 피했지만 J형이 사진을 찍다 바로 곁에서 감시하는 화장터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큰 곤욕을 치렀다. 검은 얼굴에 표독한 눈빛을 보이는 그는 경찰서에 가자고 J형을 위협하며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한다. 결국 가이드가 개입하여 겨우 달래어 많은 돈을 지불하고서야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타오르는 화장터의 불빛에 드러나는 불가촉 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맘이 몹시 불편해진다. 저들의 후손들은 대대로 이 화장터를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이 아닐까... 인도 인구의 약 15%로, 1억 8천만 명이 카스트에 의해 대대로 천민의 굴레를 쓰고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할당'이라는 제도의 도움으로 수많은 불가촉천민들도 고등교육을 받고 관료나 정치가, 교수와 의사 등으로 진출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카스트 제도 하에서 허덕이고 있다.

 

 

 

 

잘라사인 가트를 벗어나 우리는 한국인이 운영하고 여행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곳이라 한국인이 많이 찾는다는 라가 까페로 이동한다. 화장터로 연결된 좁은 골목이라 시체를 메고 들어서는 운구 행렬을 만난다. 화장터의 연기도 우리를 따라 올라오고 있다.

 

 

식당에 도착하니 정전이 되었다. 저녁 식사로 된장찌개와 참치김치찌개를 주문하였는데, 된장찌개는 먹을 만하였지만 참치김치찌개는 김치찌개 맛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영 아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인도 전통음악을 감상하기 위해 수르사리타 음악교실로 향한다. 식당에서 가까운 화장터 골목, 가트에 있던 검은 소 한 마리가 골목 비좁게 어슬렁거리며 올라오는데, 또 시신을 멘 운구행렬이 쏜살처럼 바쁘게 골목길을 따라 내려간다.

 

 

 

수르사리타 음악교실은 어둡고 침침한 작은 공간이어서 우아한 무대공연을 기대한 우리에게 다소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검고 깊은 눈을 가진 사내가 손바닥으로 타블라를 치고 백발의 노인이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시타르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이내 우리는 인도 전통 음악의 선율과 리듬 속으로 빠져 들었다.

 

 

시타르(Sitar)와 두 개의 북으로 된 타블라

 

 

 

 

시타르는 인도의 대표적인 현악기로 페르시아 악기인 세타르(setar)를 개량한 것이라 한다. 탄부르나 타블라(tabla) 등과 함께 독주 악기로 사용되거나 북부 인도의 카타크춤(kathak dances)을 출 때 반주용으로 사용되었다. 5줄의 멜로디 현, 때로는 5, 6줄의 저음 현으로 되어 있으며 가는 목 안에 있는 볼록한 프렛 아래에는 9∼13개의 공명 현이 자리잡고 있다.

 

 

 

 

오른쪽 큰 드럼이 타블라, 왼쪽 작은 드럼은 바야(두가)라고 하는데, 타블라는 고음으로 조율되며 오른손 손가락 끝으로 섬세한 리듬을 탄다. 바야는 저음으로 조율되며 왼손으로 친다. 손바닥으로 치며 가죽의 위치를 바꾸어 많은 소리를 구별해서 낸다.

 

 

명상으로 이끄는 듯 깊고 그윽한 선율의, 노인의 시타르 연주가 끝나자 이번에는 젊은 친구가 등장하여 사로드(Sarod)를 연주한다. 젊은이의 연주는 빠르고 경쾌하고 감미롭다. 그리고 현대적이다. 뭔지는 모르지만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젊은이의 빠른 연주를 따라 타블라와 바야를 두드리는 손길은 더욱 빨라지고 터치는 오묘해진다. 깊고 크고 선한 그의 눈망울에는 신명과 환희로 가득차 오르며 빛을 뿜는다. 

 

 

사로드 (Sarod)

 

 

 

사로드는 시타르보다 작은 악기로 2개의 공명판을 가지고 있으며 공명판은 염소가죽으로 씌워져 있다. 25개의 금속현 가운데 15개는 공감현이며 10줄의 연주현 아래에 위치해 있다. 10줄의 메인현은 4줄은 멜로디를 형성하고 2줄 혹은 3줄은 리듬을 강조하며 나머지 줄들은 선택한 라가의 속음에 맞추어 조율되어져 있다.

 

 

 

사로드 연주가 끝나자 대금처럼 생긴 악기가 연주된다. 이 악기는 반사리(Bansari)라는 악기로 플룻이라 부르기도 한다.

 

 

반사리(Bansari)

 

 

 

반사리는 대나무를 뜻하는 '반세(Banse)'에서 나온 이름으로 대나무로 만든 플룻을 가리킨다. 요즘은 금속으로 만들어지고 있는데, 2옥타브의 음계를 가지고 있다.

 

 

그 밖에도 프랫이 없는 현악기로서 활로 연주하는 사랑기(Sarangi)라는 악기도 있는데, 감상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아쉬웠다.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일행들은 숨을 죽인 채 음악의 세계로 빠진다. 진지하게 들어주는 청중들의 태도에 연주자들도 더욱 깊이 몰입하여 연주하는 표정에는 감격의 빛이 충만해진다. 

 

 

연주가 끝나고 다 함께 기념 촬영 시간을 가진다.

 

 

 

 

이 분들이 연주한 음악을 담은 디스크

 

 

 

 

 

수리 사르타 음악교실을 나와 골목길을 벗어나니 황금사원(비슈와나트 사원)이 나타난다. 사원 주변은 경찰들이 총을 들고 지키고 있는데 힌두교도 외에는 들어갈 수 없고 사진조차 찍지 못하게 한다. 17세기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가 철저히 파괴해 버렸는데 18세기 재건한 사원이다. 

 

 

밤이 되어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 바라나시 거리는 밀려드는 인파로 더욱 혼잡해졌다. 화장터에서 올라온 연기 탓인지 기는 흐릿하고 냄새는 매캐하다. 보행 거리를 벗어나 다시 오토릭샤를 잡아타고 수리야 호텔로 돌아온다. 

 

 

엊저녁 14시간의 힘든 기차여행을 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여& 바라나시에서의 첫 밤은 쉬기로 한다. 내일은 바라나시 북쪽, 부처님이 처음 설법한 사르나트의 녹야원으로 간다.

 

 

 

 

 

 

※ 바라나시에 대해

학창 시절은 '비나레스'라는 이름으로 배웠던 불교의 성지 바라나시. 과거에는 '빛의 도시'라는 뜻의 '카시(Kashī)'로 불렸다. 인도 북부 갠지스 강 중류에 위치하는데, 두 강 바루나(Varana)와 아시(Asi) 사이에 자리하고 있어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바라나시는 '신성한 물을 차지한다'라는 뜻이다. 강물이 흘러 들어오는 서쪽 지역을 신성한 지역이라 하여 힌두 교도들이 매일 아침 이 곳에서 해뜨는 동쪽을 보며 기도한다. 인구는 약 120만으로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자 힌두교에서 가장 신성한 도시로 간주된다. 힌두교 최대의 성지로 1,500개가 넘는 힌두교 사원이 있다. 동시에 시크 교, 자이나 교, 불교에서도 성지로 꼽고 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카시왕국의 수도로 번성했다가 이후 코살라왕국, 마가다왕국에 지배되었다. 11세기경부터는 이슬람 침략자들에게 약탈당하기 시작해 무굴제국 아우랑제브 황제 때 도시 대부분과 여러 힌두교 사원이 파괴되었다. 당시 파괴된 사원 중 대표적인 것은 흔히 '황금사원'이라고 부르는 비슈와나트 사원이다.

연간 100만 명인 넘는 순례자들이 방문하여 성스러운 갠지스강에서 목욕재계를 하고 전생과 이생에 쌓은 업이 씻겨 내려가길 기원한다. 그들 순례자를 위해 갠지스강변에는 길이 약 4km에 걸쳐 '가트(Ghat)'라는 계단상의 목욕장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그 한쪽에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화장해 그 재를 갠지스강에 뿌리는 화장터도 있다. 도시 북쪽으로 10km 지점에는 석가모니가 처음 설법한 장소인 사르나트 녹야원(鹿野苑)이 있다.

오랫동안 인도의 문화와 종교, 학문의 중심지로서 카비르(Kabir), 툴시다스(Tulsi Das), 라비 샹카르(Ravi Shankar) 등 많은 철학자·시인·작가·음악가를 배출했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17년 설립된 바라나시 힌두대학교(BHU)를 비롯한 여러 교육기관에서 인도 예술·음악·문화·철학 교육 및 산스크리트어 연구가 진행된다. 또한 바라나시는 수공예로도 유명하며, 실크 사리, 비단, 금은사(金銀絲), 현악기, 유리 팔찌, 놋쇠기구 등 전통적인 수공예가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