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여행

인도 (18) 오르차, 제항기르마할 · 쉬시마할 · 라이 프라빈 마할

모산재 2016. 2. 15. 11:13

 

라자 마할 뒤편에는 쉬시 마할의 넓은 정원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정원을 지나 건너편에 제항기르 마할 궁전이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며 솟아 있다.

 

 

한눈에 보아도 라자 마할에 비해 훨씬 웅장하고 화려하며 요새와 성채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듯하다. 조화로운 상상력과 유기적 솜씨의 예로써 중세 인도 이슬람 건축 발전의 정점으로 평가 받고 있다.

 

 

 

 

 

쉬시 마할(Sheesh Mahal)은 제항기르 마할의 부속건물로 라자 마할과 제항기르 마할을 이어주는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호텔(왼쪽)과 레스토랑(중앙 1층)으로 개조되어 일반 관광객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쉬시 마할 레스토랑

 

 

 

 

 

제항기르 마할은 분델라 왕조의 마하라자 비르 싱 데오가 무굴제국의 악바르 황제에 반란을 일으키고 도망온 살림 왕자(나중 제항기르 황제가 됨)를 위해 지은 궁성으로 알려져 있다. 오르차 유적 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하여 건축 양식이 돋보이면서도 원형 또한 가장 잘 보전되고 있다.

 

 

 

 

 

바라보이는 쪽은 제항기르 마할의 내부라 할 수 있고 궁전의 앞쪽은 내부를 통과한 반대쪽이다.

 

건물 정면에는 테라스가 있고, 왼쪽은 쉬시마할로 이어지는 계단 오른쪽은 제항기르 마할 중정(中庭)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인다.

 

 

 

 

 

무굴제국의 시조 바부르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을 근거지로 일어나 1526년 인도에 침입하여 북인도를 지배하게 된다. 그런데 무굴제국은 장자 상속제가 없었던 탓으로 왕위 계승을 놓고 끊임없이 부자간 또는 형제간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악바르의 아들 제항기르는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시도한 끝에 황제가 되었고, 제항기르의 아들들 또한 권력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반란을 일으킨 샤 자한이 황제가 된다. 나중 샤 자한도 셋째아들인 아우랑제브에게 아그라성에 유폐되었다 생을 마감한다.

 

그 중 제항기르 마할과 관련된 이야기를 정리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2대 후마윤에 이어 아들 악바르('위대한 인물'이란 뜻) 대제가 뒤를 잇는다. 악바르는 13년 동안이나 후사가 생기지 않아 이슬람 성자인 샤이크 살림 치스티를 찾았고 살림 치스티는 악바르가 3명의 자식을 얻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 이듬해에 인도 출신의 왕비로부터 아들을 얻는다. 너무나 기뻤던 악바르는 아들 이름을 성자의 이름을 따 살림이라 부르고 그 보답으로 수도를 성자가 살고 있던 파테푸르시크리로 옮기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아들 살림은 악바르의 말년에 자신이 황제에 오르기 위해 아버지를 제거하려는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에 실패한 왕자는 1602년 이곳 오르차로 도망을 오게 되고, 당시 이곳을 다스리던 분델라 왕국의 비르 싱 데오가 그를 받아 줌으로써 악바르와 대립하게 된다.

두 사람에게는 천행이랄까, 3년 뒤 악바르 대제가 죽고 살림은 제항기르('세계를 장악한 자'라는 뜻) 대제로 등극하였으며 제항기르는 어려운 시절에 도와준 비르 싱 데오을 잊지 않고 후원하며 분델라 왕국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후 22년 동안 오르차를 자주 방문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게 진실은 아닌 모양... 이따가 남은 이야기를 진행하기로 하자.

 

 

 

계단을 지나 내부로 들어서면 정사각형의 중정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라즈마할보다도 더 반듯한 ㅁ자형 철옹성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방이 모두 132개라고 한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 꼭대기의 돔으로 솟은 공간이 왕자의 침실이라고...

 

 

 

 

계단을 내려오는 인도인 탐방객 행렬...

 

 

 

 

실내 출입구의 정교한 조각

 

 

 

 

중정 가운데에는 우물 모양의 연못을 두었다. 더위를 식히는 역할을 하였을 듯...

 

 

 

 

 

위층으로 오르며 내려다본 라자 마할. 그리고 건너편으로 보이는 차투르부즈 사원과 람 라자 사원

 

 

 

 

 

라자 마할과 쉬시 마할 사이로 보이는 차투르부즈 사원

 

 

 

 

 

채색이 보이지 않는 그림은 흐릿해서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아보기가 어렵다. 제항기르 마할의 모든 방들도 그림으로 꾸며져 있었지만 현재는 일부 방에만 남아 있다.

 

 

 

 

골이 패어진 돔형 지붕. 독수리들이 머물기도 한다.

 

 

 

 

 

앞에서 제항기르 마할이 반란에 실패해 도망온 살림 왕자를 위해 분델라 왕이 지어준 궁성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건 그저 속설로 널리 퍼져나간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며 실상과 거리가 멀다.

 

비르 싱 데오 시절(1592~1627) 내내 분델라들은 무굴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한다. 1594년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스러운 무굴제국에 대항하여 비르 싱 데오는 악바르에 저항을 시작하였고, 16세의 제항기르는 1598년 무굴제국을 적으로 선언하고 항쟁한 비르 싱 데오를 패퇴시키고 항복을 받았으며 그 후 무굴 양식의 제항기르 마할을 지은 것이라 한다.

 

그러나 제항기르가 죽고 그의 아들 샤 자한('세계의 왕'이라는 뜻)이 황제가 된 뒤 관계는 급속도로 식어 갔고, 비르 싱 데오는 1627년 반란을 일으켰지만 무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비르 싱 데오의 뒤를 이은 주자르 싱(Jhujhar Singh, 1627~1636)도 1635년 독립을 위해 다시 무굴에 저항하지만 샤 자한의 13세 된 아들 아우랑제브에 패퇴하고 만다. 이 싸움은 무슬림인 아우랑제브의 이교도 불관용의 첫번째 사례로 알려지고 있는데, 싱의 여자 친족들은 노예가 되었고 두 아들은 개종을 해야 했으며 개종을 거부한 아들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The capture of Orchha by invading Mughal forces (October 1635)

 

 

출처 : https://en.wikipedia.org/wiki/Orchha_State

 

 

분델라 왕조는 1783년 수도를 오르차에서 티캄가르로 옮겼고 수도 오르차는 폐허로 변하게 된다.

 

 

 

바로 아래로 라이 프라빈 마할이 보인다. 멀리 오르차성의 성벽이 두르고 있고 그 안 쪽에 제항기르 마할로 들어서는 성문(게이트). 바로 곁 건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물, 접견소일까 ...

 

 

 

 

 

내부를 통과하니 비로소 제항기르 마할의 앞쪽이다.

 

입구는 테라스를 높게 올려 양쪽으로 계단을 설치하였다. 테라스의 높이는 코끼리를 타기에 알맞게, 계단은 낙타나 말을 탈 수 있도록 설계한 것으로 보인다.

 

 

 

 

두 마리의 코끼리가 지키고 있는 제항기르 마할의 정면 출입구. 비누를 다루듯 정교하게 조각하고 장식한 이 모든 건축과 조각의 재료가 암석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제항기르 마할 정면 모습

 

 

 

 

'소돔의 사과(Sodom apple)'라 불리는 박주가리과(또는 협죽도과)의 관목 칼로트로피스 프로체라(Calotropis procera) 꽃이 아름답게 피었다.

 

 

 

 

 

 

뒤편에는 운트카나(unth khana)라는 건물. 보통 '카멜 하우스'(낙타 마굿간)라 불리는데, 단순한 외관인데다 비교적 높은 천장 등으로 낙타 마굿간으로 추정한 듯하다.

 

 

 

 

그러나 건물의 용도를 다르게 보기도 한다.

 

어떤 이는 군사시설로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내부 천정 장식이 품격이 있고 베트와강 등 주변 경관을 조망하기에 좋은 곳이어서 궁중 여인들의 거주 공간이나 유락을 위한 정자(pleasure pavillon)로 보기도 한다.

 

 

 

 

이제 제항기르 마할 북쪽 언덕 아래 평원에 자리한 라이 프라빈 마할로 이동할 차례...

 

 

 

 

라이 프라빈 마할(왼쪽)과 자항기르 마할(오른쪽)의 정문이 내려다 보이고...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제항기르 마할의 웅장한 위용...!

 

 

 

자항기르 마할의 정문과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 하나.

 

이 건물의 정체는 뭘까? 어떤 이는 접견실인 디완이카스라고도 하고 또 다른 이는 목욕탕인 카나 하맘이라고도 하는데... 또 다른 어떤 자료에는 'Purushotham Das Kothi'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뭔 뜻인지...

 

 

 

 

 

그리고 라이 프라빈 마할(Rai Praveen Mahal)...

 

 

 

 

 

라이 프라빈은 분델라국의 마하라자(대왕) 인드라마니 싱(Indramani Singh 또는 Indrajit Singh, 1672~1675)이 사랑했던 여인! 그녀는 매혹적인 미를 가졌을 뿐 아니라 음악가이자 시인으로 '오르차의 나이팅게일'로 불리는 다재다능한 여인이었다. 우리의 황진이 클라스였던 매력적인 여인이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악바르 대제가 그녀에게 홀딱 반해 아그라의 궁정으로 부르게 된다. 힘없는 군주는 거부하지 못하고 라이 프라빈은 악바르에게 가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황제 앞에서 다음과 같은 풍자 가요(couplet)를 불렀다고 한다.

 

 

Vinit Rai Praveen ki, suniye sah sujan  현명하신 분이여, 라이 프라빈의 기도문에 귀 기울여 주세요.

Juthi patar bhakat hain, bari, bayas, swan. 오직 천민(bari)과 바야새(bayas), 개만이 남이 먹다 남긴 것을 취한답니다.

 

 

물론 '현명하신' 악바르는 그녀를 오르차로 돌려보냈다.

 

 

이층 중앙 홀 벽에는 라이 프라빈을 연상시키는, 인도 전통무용인 Nritya Mudra 장면을 담은 그림이 있다. 이 사진은 미처 담지 못해 인터넷 검색 자료를 대신 올려본다.

 

 

출처 : https://orchaa.wordpress.com/2012/06/08/the-legends-of-rai-parveen-mahal/

 

 

라이 프라빈 마할은 푸른 숲속의 정원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사시사철 푸른 정원을 유지하기 위해 지하에 배수관을 설치하여 물이 계속 흐르게 했다. Anand Mandal Bagh라 불리는 정원이 담장에 의해 둘로 나뉘어져 있다.

 

 

여기서 잠깐. 함께 여행한 우택 형의 라이 프라빈에 대한 감성 충만한 여행기 한 부분을 소개해 본다.

 

 

라이 프라빈 마할은 지금 폐허로 남아 있다. 벽은 허물어지고 지붕은 사라진 작은 성채. 폐허는 새로운 꿈을 꾸게 한다. 이 자리는 생명이 노래하고 숨을 쉬던 곳이다. 사람은 텅 빈 땅으로부터 왔다. 사람들은 폐허 위에서 역사를 기억하고 행복한 시간을 찾아낸다.

아름다운 침묵의 정원에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는 노래하며 영혼의 시를 읊어댄다. 꽃밭의 작은 수로에는 물이 흐른다. 키 큰 나무들이 물가에 서 있고 앞무대에는 단장한 무희들이 사르다나 춤을 춘다. 일곱 개의 빛나는 금속현으로 된 비나를 연주하는 라이프라빈. 그녀의 길고 고운 손가락은 호리병박 모양으로 된 비나의 현을 튕기고 있다. 비나의 몸통에서는 경쾌한 공명이 흘러나오고 꿈속의 언어를 노래하는 라이 프라빈. 깊은 눈빛은 그리움에 젖어 입에서 흘러나오는 천상의 노래가 가슴을 끓게 하는구나. 그대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너의 무릎 위에 나의 머리를 누이고 싶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만난 파랑새(?)와 마카크원숭이.

 

 

 

 

긴꼬리원숭이 일종인 마카크원숭이들은 상당히 포악해 보인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넓은 마당을 맘대로 질주하며 으르렁거리는 놈들...

 

 

 

 

 

 

 

※ 분델라 왕조의 통치자들

 

Rudra Pratap (1501-1531)

Bharatichand (1531-1554)

Madhukar Shah (1554-1592)

Ram Shah (1592-1605)

Vir Singh Deo (also spelled Bir Singh Deo) (1605–1626/7)

Jhujhar Singh (1626/7-1635) (brother of Hardaul Singh)

Devi Singh (1635-1641) (brother of Jhujhar Singh)

Pahar Singh (1641-1653)

Sujan Singh (1653-1672)

Indramani Singh (1672-1675)

Jaswant Singh (1675-1684)

Bhagwat Singh (1684-1689)

Udwat Singh (1689-1735)

Prithvi Singh (1735-1752)

Sanwant Singh (1752-1765)

Hati Singh (1765–1768)

Man Singh (1768–1775)

Bharti Singh (1775–1776)

 

<영국 식민지 시절>

Vikramajit Mahendra (1796–1817)

Dharam Pal (1817–1834)

Taj Singh (1834–1842)

Surjain Singh (1842–1848)

Hamir Singh (raja 1848-1865; maharaja 1865-1874)

Pratap Singh (1874-1930)

Vir Singh II (4 March 1930 - acceded 1 January 1950) born 1899, died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