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여행

인도 (5) 뉴델리, 대통령궁과 인디아게이트

모산재 2015. 12. 20. 19:29

 

인도 (5) 뉴델리, 인디아게이트와 인도 사람들

 

2012. 01월 03일 화요일 저녁

 

 

 

 

박물관을 돌아본 다음 바로 합승버스를 타고 부근에 있는 인디아게이트로 향한다.

 

대통령궁과 인디아게이트는 동서를 잇는 라지파트(RajPath)라는 대로로 이어져 있는데, 이 일대는 뉴델리의 중심지다. 라지파트는 '왕'을 뜻하는 인도어와 '길'을 뜻하는 영어가 결합한 말이다.

 

라지파트 주변에는 국회의사당과 정부청사 등 인도의 행정과 정치의 중심적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뉴델리의 핵심을 이루는 이 모든 건축물들은 영국의 건축가 에드윈 루티엔스(Edwin Lutyens)가 설계한 것이다.

 

 

 

대통령궁과 인디아게이트는 거의 2km쯤 거리를 두고 있어, 차창을 통하여 보이는 대통령궁을 사진으로 담는다.

 

 

 

 

 

 

 

 

대통령 관저는 영국 식민지 시절인 1931년부터 1950년까지 총독관저로 사용되었던 건물. 지금은 '대통령궁'이라는 뜻의 '라시트라파티 바반(Rashtrapati Bhavan)'이라 부른다. 국가원수 관저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 대통령궁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이 건물은 인도를 식민지배하던 영국이 1911년 인도 수도를 캘커타(콜카타)에서 뉴델리로 옮기기로 하면서 착공된다. 설계자는 에드윈 루티엔스. 4년 예정이었던 공사는 1차세계대전으로 늦어져 19년만에 끝났다. 예산 부족으로 건축 규모도 2/3 정도로 줄었다고 하는데, 4층짜리 건물들에는 방이 360개나 된다고 한다. 

 

건물 한가운데에 있는 돔은 인도와 영국 양식이 적용됐고 높이는 4층 건물보다 2배 이상 높으며, 건물 뒤편 무굴제국의 정원 양식에다 영국 양식이 가미된 무굴정원'은 매년 2월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고 한다.

 

 

 

 

 

 

 

정말이지 인도의 스모그는 너무도 심각하다. 나중이긴 언론 보도로 안 사실이긴 하지만, 2014년 세계보건기구(WHO)는 뉴델리의 연평균 초미세먼지(PM2.5) 농도가 153㎍/㎥로 인도가 세계에서 대기오염이 가장 심한 나라임을 밝히기도 했다.

 

 

 

라지파트의 동쪽 끝, 교차로 중심에 인디아게이트가 짙은 스모그 속에 모습을 희미하게 드러낸다.

 

 

 

 

 

 

차에서 내려 접근하려 하는데 삼삼오오 밀려드는 인파들...  

 

 

인디아 게이트 주변에 조성된 넓은 공원이 있어 이곳은 델리 시민들의 가족 나들이 장소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하지만 음식과 물건들을 파는 상인들과 뒤섞여 여행자에겐 다소 혼란스런 풍경이다.

 

 

 

 

 

 

 

 

 

높이가 무려 42m에 달하는 인디아 게이트!

 

파리의 개선문과 비슷한 뉴델리의 상징물이지만,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건축물이다. 개선문이라면 당연히 식민지 지배국이었던 영국에 맞서 싸우다 희생한 인도인의 영령을 기리는 건축물이어야 하는데, 이 개선문에는 영국을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인도 군인 8만 5천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어찌된 연유인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무굴 제국 말기 1857년, 영국 동인도회사 용병들의 반란인 세포이 항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3년만에 세포이 항쟁을 진압되고 무굴제국 황제는 버마 랭군으로 유배되었으며 1858년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를 발판으로 아프가니스탄 왕국과 미얀마도 인도 제국에 합병되었다. 영국의 가혹한 식민 통치에 인도 민중은 저항하였고 간디와 인도 국민 회의파의 반영 투쟁이 뜨거워졌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영국은 '인도의 독립'을 조건으로 간디와 네루 등은 영국에 협조하여 인도 병력이 유럽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영국은 태도를 돌변하여 반영 활동을 적법한 절차 없이 체포할 수 있는 롤랫법을 제정하여 인도 국민의 저항을 탄압하였다. 이에 인도 민중은 '비폭력, 불복종 운동'을 주도하여 반영운동을 전개했고 결국 롤랫법은 폐지되었으며, 영국은 1935년 인도에 자치권을 주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영국은 독립을 내세워 인도의 지원을 요구했으나 간디는 이를 거절하였다.

 

 

1차세계 대전에 동원된 인도인은 150만 정도라고 하는데 이 중 절반은 전투 병력이었다고 한다. 이 때 희생된 8만 5천여 명을 기리기 위해 인디아게이트를 세우는데, 설계자는 바로 뉴델리 설계를 주도한 영국인 건축가 에드윈 루티엔스(Edwin Lutyens). 1921년에 착공하여 10년 만인 1931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일제 식민지 지배를 경험한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과정이다. 하지만 인도의 국민회의는 애초에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 협조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한 조직이었다. 간디와 네루도 처음에는 영국에 협조적이었다. 협조를 통해 인도인의 요구를 실현시키려는 것이었지만 영국의 가혹한 탄압으로 간디와 국민회의는 강력한 반영운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특히 독립을 조건으로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영국이 롤랫법으로 탄압하자 비타협적 불복종운동으로 전환하게 된다.

 

 

 

 

인디아게이트 아래에는 1972년 인도 독립 25주년을 기념하여 희생자를 추모하는 '불멸의 불(Amar Jawan Jyoti)'이 점화되어 타오르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거꾸로 세운 소총에 철모를 건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인디아 게이트 바로 뒤편에 껑충한 정자 모양의 아치형 조형물이 서 있는데, 이는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희생된 병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제 3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이라 부르는 이 전쟁은 동파키스탄의 독립에 인도가 개입한 전쟁이다.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인도의 동서 양쪽으로 나뉘어 있던 이슬람 지역은 동서파키스탄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벵골 지방의 동파키스탄은 정치적 실권을 모두 가진 서파키스탄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1970년 사이클론으로 동파키스탄이 수재로 수십 만의 사망자를 내는 참사를 겪는데도 서파키스탄의 중앙 정부가 태만한 모습을 보이자 분노한 동파키스탄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다. 파키스탄의 진압으로 많은 난민이 인도로 유입되자 인도는 동파키스탄 독립을 위해 개입하고 1971년에 전면전이 발발하였으며 그 결과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한다.

 

 

 

 

인디아게이트 주변의 상인들과 시민들 표정

 

 

 

 

 

 

 

 

 

 

 

 

 

인디아게이트 주변에서 한 시간쯤 시간을 보내다 카주라호로 가는 저녁 기차를 타기 위해 니자무딘역으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