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여행

인도 (2) 델리, 무굴왕조의 왕궁성 '랄킬라(레드포트)'

모산재 2015. 12. 12. 19:25

 

인도 (2) 델리, 무굴왕조의 왕궁성 '랄킬라(레드포트)'

 

제2일 2012년 01월 03일(화)

 

 

 

 

인도에서의 첫밤을 인더스빌라에서 보내고 8시에 일어나 아침을 맞는다.

 

아침 식사는 한국식으로 밥에 씨래기국, 그리고 반찬은 계란찜, 브로콜리, 김치, 가지나물 등이다. 이 먼 나라에서 정갈하게 차려진 한국식 음식은 먹을 만했다.

 

 

가이드 성모 씨는 숙소와 교통편은 정해진 대로 하되 세부 일정은 우리의 희망을 반영하여 탄력적으로 진행하겠다 한다. 10여 년 전 학창 시절에 존경했던 선생님과 일행을 위한 제자로서의 배려다. 

 

 

오늘 일정은 델리의 명소들 일부를 돌아보고 밤기차를 타고 카주라호로 이동하는 것.

 

델리 일정은 무굴제국의 왕궁성인 레드포트(Lal Quila), 간디의 화장터이자 추모공원인 라지가트(Raj Ghat), 델리국립박물관, 그리고 인디아게이트까지.

 

 

여행사 '인도소풍'의 본부이자 숙소인 인더스빌라

 

 

 

 

9시 좀 지나서 배낭을 싣고 숙소를 출발한다.

 

희뿌연 스모그로 가득한 대기를 가르며 우리를 태운 버스는 뉴델리 거리를 달린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 하나에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누더기를 걸치고 도로변에서 취사를 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다. 뭘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는데, 처음으로 포착한 이 장면은 인도 곳곳에서 만나는 흔한 풍경 중의 하나라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된다.

 

 

 

 

도중에 환전을 위해 환전소에 들렀다 부근의 시장을 잠시 구경하고~.  

 

 

 

 

 

 

※ 뉴델리 안내도

 

 

 

 

 

숙소를 출발한 지 거의 두 시간 걸린 11시 무렵 무굴제국의 왕성, 랄킬라(Lal Quila) 입구에 도착한다.

 

레드포트라 불리는 랄킬라는 뉴델리의 동북쪽,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올드델리에 있다. 델리로 들어서면 뉴델리에서는 볼 수 없는 릭샤가 달리는 거리 풍경이 전개된다. 뉴델리는 자동차의 거리라면 델리는 릭샤의 거리다.

 

 

무굴제국의 왕궁성 랄킬라는 '붉은 성' 또는 '붉은 요새'를 뜻하는 인도어로 흔히 영명인 레드포트(Red Fort)라 불린다. 인도에서 가장 큰 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도착한 곳은 랄낄라의 남쪽문인 델리문(Deli Gate) 입구.

 

라자스탄에서 가져온 붉은 사암으로 쌓아올렸다는 붉은성의 위용은 참으로 대단하다. 높이가 33m라는 성벽은 그야말로 철옹성!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문이야말로 성 건축의 핵심, 성문 위에 정자(pavilion)를 올린 독특한 양식에 눈길이 간다.

 

 

 

 

 

랄킬라는 야무나 강을 동쪽에 두고 남북 918m 동서 495m의 장방형으로 조성되었다. 성벽의 길이는 2.5km에 이르고 높이는 도시쪽은 33.5m, 강쪽은 18m로 쌓았다고 한다. 4개의 큰 출입문, 2개의 작은 출입구, 21개의 감시탑이 있다.

 

성곽은 이슬람 건축을 바탕으로 설계되었으며 각각의 건물들은 페르시아와 티무르, 힌두의 전통이 융합되었는데, 무굴 건축의 전형적인 요소를 드러낸다.

 

 

 

델리문은 주 출입문이 아니어서 서쪽에 있는 주 출입문인 라호르문(Lahore Gate)문으로 도보로 이동한다.

 

 

성벽 주변에는 깊은 해자를 둘러 야무나강 강물을 끌어들여 채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물이 빠지고 잡초만 무성하게 자랐다.

 

 

 

 

랄킬라는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 샤자한(Shah Jahan)의 작품이다. 페르시아어로 '세계의 황제'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샤 자한은 타지마할을 지은 건축광으로 아그라성으로부터 델리 북쪽 자신의 이름을 딴 도성 샤자하나바드(Shahjahanabad)로 수도를 옮기는 대역사에 착수하여 1638년부터 1648년까지 10년의 공사 끝에 왕궁성 랄킬라를 완공하였다.

 

 

무굴제국의 수도는 델리와 아그라 사이를 오갔다. 

 

무굴제국을 연 태조 바부르는 아그라에 나라를 세웠는데 그 아들 후마윤은 동생에게 배신 당하고 1540년 수르족 수장 셰르 샤에게 패하여 나라를 빼앗기고 페르시아까지 쫓겨갔다 셰르 샤가 죽은 뒤 1555년 나라를 되찾는 데 성공하지만 복위 339일 만에 델리 황성 내 황실 도서관 계단에서 실족하며 머리를 다쳐 사흘 만에 사망한다. 그의 아들 악바르는 셰르 샤의 정책을 계승하고 정복전쟁과 문예부흥, 종교적 관용 등으로 무굴제국을 반석에 세우고 수도를 아그라로 옮긴다. 악바르제의 아들 4대 황제 자항기르도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여 문화의 꽃을 피운다. 샤 자한은 자항기르의 셋째 아들로 형제 간의 왕위 다툼 끝에 제국을 이어받아 아그라성을 다시 짓지만 1648년 수도를 델리로 옮긴다.

 

 

 

 

멀리 보이는 라호르문을 향해 성벽과 해자를 따라 걷는다.

 

 

 

 

 

라호르문의 옹성이라고 해야 할까...

 

 

 

 

 

라호르문은 현재는 파키스탄에 속한 펀잡주의 주도인 라호르를 향해 지어진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라호르는 샤자한 등 역대 무굴제국족의 거처가 있었던 도시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라호르문은 샤 자한의 셋째 아들인 아우랑제브가 나중에 축성한 것이라고 한다. 코끼리가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출입구를 옆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성벽은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지배에 반기를 든 세포이항쟁 때(1857~1859) 많이 파손되어 영국 식민지 시대에 일부 복구되었지만 내부 건물은 상당 부분 철거되어 현재는 15개의 건물만 남았다고 한다. 무굴제국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2세(재위 1837~1857)가 세포이들과 연루된 혐의로 미얀마 랭군으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죽음으로서 랄낄라는 주인을 잃고 만다. 이후 랄낄라는 영국의 식민지 지배와 인도의 독립 선포 등 영욕의 인도 역사의 무대가 되었다. 지금도 8월 15일 독립 기념일 행사는 레드 포트 앞 광장에서 열리며 인도 총리는 이곳에서 독립 기념일 행사를 주관한다고 한다.

 

 

 

스모크가 몹시 심해 정문인 라호르문의 모습이 제대로 잡히지 않을 지경... 

 

 

 

 

 

 

라호르문을 들어서면 '차타 초크(Chhatta Chowk)'라 불리는 시장이 이어진다. 

 

차타초크란 '지붕이 있는 시장'이란 뜻으로 옛날 궁정 여인들이나 귀족들에게 비단이나 카펫, 장신구를 판매하던 시장... 지금도 아케이드형의 건물로 시장이 유지되고 있지만 여행자를 위한 기념품 가게로 전락해 있다.  

 

 

 

 

 

차타초크를 지나면 우리의 누문의 역할을 하는 듯한 2층(3층?) 건물이 나타난다.

 

밖에서 보면 흰색인데 안쪽에서 보면 붉은색인 이 건물은 왕실 음악 공연장으로 사용된 나우밧카나(Naubat Khana), 또는 나카르카나(Naqqar Khana)라 부르는 건물로 '드럼하우스'란 뜻을 가졌다. 1636년에 지은 건물로 현재는 2층이 전쟁기념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나우밧카나에서부터는 코끼리를 타고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건물은 황실의 공간과 바깥을 구분하는 기능을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텅빈 정원 한가운데 홀로 서 있지만 영국군이 파괴하기 전까지는 내부  건물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고 한다. 

 

무굴제국 말기, 이곳에서 두 명의 황제가 살해되었다고 한다.

 

 

 

나우밧카나를 지나면 정면 9칸의 붉은 사암 단층 건물이 나타나는데, 바로 황제의 대접견실인 디완이암(Diwan-i-Am)이다.

 

 

 

60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디완이암은 황제가 사절을 접견하거나 공식 행사를 치르던 접견장. 중앙에는 황제의 대리석 단상이 있는데, 단상 주변의 대리석 구조물에는 꽃 모양을 새긴 색색의 보석이 박혀 있어 그 옛날 제국 전성기의 모습을 잠시나마 상상해 볼 수 있다.

 

 

 

 

 

 

 

 

아우랑재브 재위 시절 황실 의사로 있었던 프랑스인 프랑스와 베르니에르(François Bernier)가 디완이암에서 황제가 접견하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매일 정오 (황제는)옥좌에 앉아있고, 그의 아들들은 좌우에 자리잡는다. 환관들은 왕족의 주변에 서서 공작 꼬리로 파리를 쫒아내고, 큰 부채로 부채질을 한다. 옥좌의 바로 아래에는 고위 귀족들, 지방의 왕들, 외국 대사들이 모두 모여 있다. 참석자들은 모두 시선을 내리 깔고 손은 모으고 있다. 옥좌로 부터 더 떨어진 곳에는 낮은 귀족들이 매우 깊은 존경심을 품은 같은 자세로 서있다.

 

 

정원 한 구석에서 꽃을 피운 냉이 종류

 

 

 

 

 

랄킬라 안내도

 

 

A 카스 마할  B 디와니 카스  C 함맘  D 모띠 마스지드  E 스완 파빌리온 

F 자파르 마할  G 히라 마할  H 바돈 파빌리온  K 다왓 카나  M 하얏트 박쉬

 

출처 : http://blog.naver.com/indosopung0/220340530029

 

 

 

 

 

공적 대접견실인 디완이암 뒤편으로는 황제의 사적 접견실인 디완이카스(Diwan-i-Khas), 황제의 침전인 카스마할(Khas Mahal), 황후의 침전인 랑마할(Rang Mahal) 등 대리석 단층건물들이 일렬로 서 있다.

 

 

랄킬라의 건물들은 모두 장방형의 단층 건물로 조형성은 단순하면서도 세부수법이 정교하다. 건물 사이에 담조차 없는 개방적인 구조가 특징적이다. 

 

 

접견실인 디완이카스(왼쪽)와 침전인 카스마할(오른쪽)

 

 

 

 

정면 5칸으로 된 대리석 건물인 디완이카스는 황제의 집무실이자 소접견실이다. 디완이암에 비해 건물 규모는 작지만 내부는 훨씬 정교한 조각과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라는 상감 기법으로 다채로운 문양을 새기고 있어 화려하다. 

 

 

 

 

 

 

 

이곳은 샤 자한이 만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옥좌인 공작좌(孔雀座)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옥좌에는 꼬리를 부채처럼 활짝 편 두 마리의 공작새를 새겼는데, 수많은 다이아몬드와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를 박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공작좌는 1739년 이란 아프샤르 왕조 창시자 나디르 샤(재위 1736~1747)가 침공하여 약탈해 갔다고 한다.(델리에서 15만 명이 학살된 이 전쟁으로 무굴제국은 크게 기울게 된다). 공작좌는 나중 쿠르드족의 손에 넘어가 분해되었다고 하며, 그곳에 박혀있던 세상에서 가장 큰 다이아몬드는 지금 영국 여왕의 왕관에 박혀 있다고 한다.


 

 

디완이카스의 어느 기둥에는 어느 페르시아 시인의 시구 "지상에 천당이 있다면 이곳이다."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피에트라 두라(Pietra Dura) 기법으로 데리석 기둥에 새겨진 화초 문양

 

 

 

 

 

디완이카스 오른쪽에는 황제의 침전인 카스 마할(Khas Mahal)이 자리잡고 있다.

 

특이한 것은 디완이카스로부터 이어지는 수로가 건물의 중앙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이 수로는 냉방 기능을 한다고 한다.

 

 

 

건물 내부의 조각이 훨씬 장식적으로 정교하고 화려하다.

 

 

 

 

 

내부 공간은 응접실, 침실, 기도실 등으로 분할되어 있다.

 

 

 

 

보수공사 중...

 

 

 

 

넓은 정원과 정자가 수로로 연결된 하야트 바크시 정원(Hayat bakhsh Bagh)의 일부.

 

왼쪽 건물은 사완 파빌리온(Sawan pavilions)

 

 

 

다람쥐들

 

 

 

 

 

 

자파르마할(Zafar Mahal).

 

인도 무굴왕조의 마지막 황제 바하두르 샤 자파르(Bahadur Shah Zafar)의 이름을 딴 건물이다. 귀족들의 쉼터로 원래는 바닥에 물이 잠겨 있고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완 파빌리온(Sawan pavilions)

 

자파르 마할을 사이에 두고 바돈 파빌리온(Bhadon pavilions)이 있는데, 대리석 건물 조각이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다.

 

 

 

 

 

바돈과 사완은 힌두력으로 몬순 시기에 비가 오는 두 달을 가르키는 이름이라고 하는데, 수로로 서로 연결되어 있엇다고 한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흰 대리석의 두 건물에는 벽감이 있는데 이곳은 낮에는 꽃을, 밤에는 등불을 놓았다고 한다.

 

 

 

 

넓은 궁정 건너편에서 바라본 디완이카스, 카스마할, 랑마할

 

 

 

 

황제의 침전 카스 마할 오른쪽에 자리잡은 ‘랑 마할’은 황후의 침전, 랑마할

 

 

 

 

카스마할 왼쪽의 대리석 건물은 왕실 욕탕이 함맘(Hammam). 왼편 끝 건물이 아우랑제브가 세운 궁정 이슬람 사원 모티마스지드(Moti Masjid)이다.

 

 

1662년 샤 자한의 후계자 아우랑제브는 골육상쟁 끝에 화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아버지를 아그라성에 유폐한다. 그는 선대 황제들의 관용적 종교 정책과 반대로 타 종교를 탄압하고 강력한 이슬람국가를 꿈꾸었던 인물. 

 

모티마스지드는 '진주 사원'이란 뜻의 아름다운 작은 사원이지만 타종교 불관용 정책을 상징하는 듯한 건물이다. 아우랑제브 이후 무굴제국은 균힘을 잃기 시작한다.

 

 

모티바스지드를 따로 담은 사진이 없어 위키백과 사진으로 대신한다.

 

출처 : 위키피디어

 

 

랑마할 오른쪽으로는 뭄타지 마할이라는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샤 자한이 큰 딸인 자하나라 베굼에게 준 건물로 부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자하나라 베굼은 어머니 뭄타지 마할이 14번째 자녀를 출산하다 죽은 뒤 황실 내전 책임을 맡으며 샤 자한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남동생 아우랑제브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고 장자인 다라 쉬코를 지지했다 아버지 샤 자한과 함께 아그라의 레트 포트에  8년을 유폐돼 지내며 1666년 아버지의 임종까지 같이 하게 된다. 올드 델리의 전통시장인 찬드니초크 건설을 주도한 인물로 전하기도 한다. 

 

 

 

보리수

 

 

 

 

 

광장에서 바라본 델낄라 라호르문

 

 

 

 

델낄라 라호르문 맞은편, 델리역 앞에는 찬드니초크(Chandni Chowk)라는 전통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달빛 광장'이라는 뜻의 찬드니 초크는 랄낄라가 세워질 당시에 형성된 시장으로 델리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거리라고 한다. 얽히고설킨 골목을 따라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상점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고, 자인교, 힌두교, 이슬람교 사원 등이 모여 있어 볼거리가 풍부하다. 은 시장, 꽃 시장, 향신료 시장, 장식품 시장 등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는데, 특히 대대로 가업을 이어온 보석상들이 은의 무게를 달아 파는 다리바 칼란(Dariba Kalan)이 유명하다.

 

 

 

 

델리의 또 하나의 유적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도 일정표에는 있었지만 가보지 못한 곳. 샤 자한이 지은 건물로 랄낄라와 함께 델리에 남아 있는 두 유적이 바로 자마 마스지드다.

 

라호르문 앞 광장 건너편에 우뚝 솟은 이 건물들이 자마 마스지드인 줄 알고 찍었는데,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자마마스지드는 동쪽에 있고 이 건물은 자이나교 사원이다.

 

 

 

 

이름은 스리디감바르 자이나교 붉은사원( Shri Digambar Jain Lal Mandir). 1656년에 세워진 가장 오래되고 잘 알려진 자이나교 사원이란다. 뒤에 보이는 두번째 건물은 자이나교조류동물병원이라고 한다. 

 

 

 

※ 자이나교에 대해

 

자이나교는 기원전 6세기 무렵, 그러니까 불교가 탄생할 무렵이나 그보다 조금 일찍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 무렵 인도에는 주류 종교인 브라만교에 대항해 자신들의 가르침을 펼치던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하는 여섯 명의 종교인 또는 사상가가 있었다. 이들은 브라만교가 지배하던 인도의 침체된 사상계, 종교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것도 사실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잘못된 사상으로 민중을 현혹시키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부처는 이들을 경계하라는 측면에서 ‘도에서 벗어난 여섯 스승’이란 의미에서 육사외도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가운데 니간타 나타풋타(Nigantha Nataputta)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훗날 마하비라(Mahavira)라고 불렸다. 이는 싯다르타가 ‘진리를 깨달은 이’라는 의미에서 붓다(Buddha)로 불린 것과 유사하게 뛰어난 인물에게 부쳐질 만한 명칭으로, ‘위대한 영웅’이란 의미다. 나타풋타란 나타족의 아들이란 의미로 그의 출신 성분은 크샤트리아였다. 서른 살 무렵 출가한 그는 12년여의 고행 끝에 지혜를 깨달아 자이나(Jina) 또는 지나(승리자란 의미)라고 불리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많은 신자를 모으게 되었다. 자이나교(Jainism)가 탄생한 것이다.

 

자이나교에 따르면 영혼은 순수한데도 속된 물질의 업에 속박되어 비참한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고행을 통해 본래의 영혼을 되찾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자이나교도의 삶은 불살생, 불간음, 무소유, 금욕과 고행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이러한 가르침과 삶은 자이나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탄생한 불교와 썩 다르지 않았다. 이들의 불살생 계율은 불교보다 더욱 철저해 농사마저 짓지 않았다고 한다. 농사를 짓다 보면 땅속의 벌레들을 자신도 모르게 죽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생명 중시 사상은 그 무렵 만연해 있던 동물 희생제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오늘날에도 영적인 사람들이 선호하는 채식주의, 동물 애호, 단식 등의 행위에는 자이나교의 정신이 면면히 살아 숨 쉬고 있다. 또한 간디가 추구한 비폭력 무저항주의도 그 원천은 자이나교라고 할 수 있으니 나타풋타가 처음 주장한 아힘사(ahimsa)라는 불살생의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힘사는 자이나교의 기본 덕목이자 행동의 표준이 되는 것으로, 채식주의가 기본이다.

 

자이나교의 가장 큰 중심 사상은 이원론적 체계다. 고대 애니미즘을 계승한 이 사상은 세계를 생명체와 비생명체의 두 범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한편 불교에서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보는 업(業, karma)을 자이나교에서는 물질적인 실체로 간주하여 이것이 생명체에 개입해 윤회에 얽매이게 한다고 여긴다. 따라서 업의 개입을 막기 위해서 참회와 고행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한편 실생활에서 자이나교는 세상 만물에 대한 관용과 다른 종교에 대한 무비판적 태도를 추구한다. 게다가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들의 종교를 전하는 데도 적극적이지 않다. 그러니 공격적이 아닌 평화로움이라는 종교의 근본이념이 바로 자이나교를 인도의 대단히 좁은 지역에 머무르게 하는 원인임을 알고 나면 도대체 종교가 무엇인지를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1세기 말경 공의파(空衣派)와 백의파(白衣派)로 분열되고, 다시 여러 지파(支派)가 생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4년에 제정된 자이나교의 공식 상징, Jain Prateek Chih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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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기다리는 릭샤꾼들.

 

인도의 하층민들은 대부분 이렇게 깡말랐다. 릭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다들 통통한데...

 

 

 

 

 

레드포트의 북쪽에는 더 오래된 요새인 살림가르포트(Salimgarh Fort) 유적이 있는데, 1546년에 이슬람의 살림 샤 수리(Salim Shah Suri)가 세운 것이다. 살림 샤 수리는 1540년 무굴제국의 2대 황제 후마윤을 격파하고 수르왕조를 연 셰르 샤의 아들이다.  

 

 

 

※ 레드포트 건물 배치

 

출처 : 구글지도(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