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창녕 화왕산 (1) 옥천사지와 관룡사 석장승

모산재 2015. 11. 1. 23:20

 

오늘은 창녕 화왕산(火旺山)으로 출발합니다.

 

화왕산은 봄에는 불꽃처럼 피어나는 진달래꽃으로 가을에는 은빛 물결 일렁이는 억새 평원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산입니다. 진달래나 억새, 단풍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일부러 찾지는 않는 편입니다. 크고 화려한 한 가지 꽃으로 장관을 이루는 명소보다는 작고 소박한 풀꽃나무들이 어우러진 외진 산과 들에 더 마음이 끌립니다.

 

 

기온이 싸늘하게 내려가면서 이제 저 남쪽으로 가야만 그나마 풀꽃들을 만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래서 고른 곳이 화왕산입니다. 억새 관광객들로 북적일 것이 걱정되긴 했지만 따뜻한 남도에 대한 낭만적 환상이 나를 꼬드깁니다. 

 

 

 

창녕읍에서 바라보이는 화왕산, 창녕읍에서도 바로 오를 수 있지만, 옥천 관룡사 쪽에서 오르기로 합니다. 관룡사(觀龍寺)를 둘러보고 관룡산을 넘어서 화왕산성으로, 그리고 창녕읍으로 하산하는 코스로 진행합니다.

 

 

 

 관룡사로 가는 콘크리트 포장도로

 

 

 

 

임도로 들어서 5분쯤 걷자 도로가에 '옥천사지(玉泉寺址)'라는 안내판이 서 있고 오른쪽 숲으로 절터 흔적으로 보이는 높은 석축이 보입니다. 

 

 

 

 

오래도록 폐허로만 전해지는 옥천사는 고려말 공민왕 때 개혁정책을 추진하다 좌절한 신돈이 태어나고 출가한 곳이라고 합니다.

 

<고려사>에는 "어미가 천하므로 그 무리에 참여하지 못하고 늘 산방(山房)에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돈은 어머니가 옥천사 노비였고 아버지가 누군지도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철저한 아웃사이더로 산야에 숨어 살던 그가 어떻게 해서 개경으로 가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분명하지 않은데, 1359년 공민왕의 신임을 받던 김원명의 추천으로 왕을 만나 총애를 받게 됩니다. 개혁을 지향하던 공민왕의 눈에 든 그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해 권문세족에게 빼앗긴 백성들의 토지를 찾아주고 강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 시켜주는 일대 혁명을 실시하여, 백성들로부터는 "성인이 나타났다!"는 찬사를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지 기반이 미약했던 그는 권문세족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고, 노국대장공주의 영전(殿) 사업 강행 등으로 인한 재정 고갈과 공민왕의 친정 복귀 등의 복합적인 정국에 얽히면서 결국 역모 혐의로 죽임을 당하고 고려 왕조의 개혁도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옥천사지는 조선이 건국되자 요승 신돈이 태어난 절이라고 하여 불을 질러 사라졌다고 합니다. 축대 규모로 보아 작지 않은 절이었던 곳으로 보이는데, 축대 아래 비탈에도 주춧돌이나 탑의 부재들로 보이는 유물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화왕산 등산 안내도

 

 

 

 

 

드라마 허준세트장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있는 곳을 지나 관룡사 쪽으로 얼마간 오르니 오른쪽으로 주차장이 나타납니다.

 

 

직진하는 임도로 오르다보니 오른쪽 오솔길이 있는지 오르는 사람들 모습이 보이는데, 바로 그곳에 커다란 석조물이 서 있어 뭔가 하고 다가서보니 바로 그 유명한 관룡사 돌장승입니다.

 

 

 

 

빈터에는 만수국아재비 꽃이 만발하였는데, 기분 좋은 향기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간질입니다. 남아메리카 원산으로 청하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향기가 하도 좋아 청하향초라 불리기도 한 귀화종입니다.

 

 

 

 

아마도 이 길이 관룡사로 오르던 원래의 길일 것입니다.

 

그 길 양쪽에 한 쌍의 돌장승이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이 이보다 더 정겨울 수 없습니다.

 

 

 

 

왼쪽이 남자 장승, 오른쪽이 여자 장승임을 표정만 봐도 금방 알아볼 수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남자 장승은 높이 220㎝ 정도로 상투를 올린 듯한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는데, 툭 튀어 나올 듯한 왕방울 눈 사이에는 콧등주름이 두 줄 새겨져 있어 마치 안경을 쓴 듯한 모습이고 주먹코는 납작하게 퍼져 있으며 꼭 다문 입술 양쪽으로 송곳니 두개가 뻗어 나와 있는 모습입니다.

 

 

 

 

 

오른쪽 여자 장승은 높이 25㎝로 받침돌 위에 구멍을 파서 세웠는데 몸통이 보다 안정감이 있습니다. 상투 모양이 조각되어 있지만 관모를 쓰지 않은 모습입니다.

 

 

 

 

 

장승은 흔히 '벅수'라 부르기도 하는데,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벅수같이 서 있다'고 말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장승은 마을 입구에 세워서 수호신 역할을 하거나 이정표 역할을 하며 지역 간의 경계를 나타내는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풍수적으로 허한 곳에 세워 기운을 불어넣는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절 입구에 세워 놓은 이 돌장승은 실상사 입구에 세워 놓은 돌장승과 사뭇 비슷해 보입니다. 신성한 공간과 세속의 공간 경계를 표시하면서 경내로 잡귀가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뜻으로 이 장승을 세웠을 것인데, 관룡사에는 일주문이 따로 세워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석장승이 일주문이나 금강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듯한데 무리일까요?

 

결국 이 석장승은 칠성각이나 산신각처럼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된 표현된 석조물로 주변적이긴 하지만 민간의 소박한 미의식이 사찰 양식에 잘 반영된 작품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실상사 돌장승 => http://blog.daum.net/kheenn/15853295

 

 

이 장승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아무 기록이 새겨져 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절 입구에 이 돌장승과 풍화 정도가 비슷한 당간지주가 있는데 그 명문에 '건륭 삼십팔 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 장승도 같은 시기인 영조 49년(1773)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돌장승을 돌아보고 관룡사로 발길을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