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천성산(1) 홍롱사(虹瀧寺)와 홍룡폭포, 가홍정(駕虹亭)

모산재 2015. 10. 26. 13:32

 

가을이 깊어가는 10월에 천성산을 찾았다.

 

도룡뇽 소송으로 유명한 지율 스님이 먼저 떠오르는 산, 개인적으로는 우리 나라 유일의 주걱댕강나무 자생지로 늘 궁금해했던 산이다. 

 

또 그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천성산은 양산팔경 중 천성산, 홍룡폭포, 내원사계곡 등 3경을 간직하고 있는 양산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산이기도 하다. (제1경 영축산 통도사, 제2경 천성산, 제3경 내원사 계곡, 제4경 홍룡폭포, 제5경 대운산 자연휴양림, 제6경 오봉산 임경대, 제7경 배내골, 제8경 천태산)

 

 

 

양산을 거쳐 대석리(돌실) 홍롱사 입구 천성산 출발 기점에 도착한다. 천성산 오르는 길은 둘. 오른쪽 능선을 따라 원효암으로 오르는 길과, 콘크리트 길을 따라 홍롱사를 거치는 길이 있는데, 홍롱사 쪽 길을 선택하기로 한다.  

 

 

 

다소 지루한크리트길, 편백나무 숲을 지나고

 

 

 

 

이내 '홍룡사' 안내판이 나타난다.

 

 

 

 

여기서 잠깐!

 

안내판에도 '홍룡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듯, 천성산 남쪽 계곡에 자리잡은 홍롱사의 이름은 '흥룡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찰의 본 이름은 홍롱사(虹瀧寺). '무지개 홍(虹)'자에 '비 부슬부슬 내릴 롱(瀧)'자로 된 이름이다. 그러니까 '용 룡(龍)'자를 쓰는 '홍룡사(虹龍寺)'가 아닌 것! 그런데도 홍룡사로 알려진 것이다. 흔치 않은 한자인 '롱(瀧)'을 익숙한 한자인 '룡(龍)'자로 잘못 읽은 채로 통용되고 있는 셈이다.

 

 

 

안내문에는 원효와 의상의 관음보살 친견설화가 전해져 관음성지로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관음보살을 관음전과 무설전 두 전각에 모시고 있는데, 특히 관음전에는 백의관음과 함께 33관음 중 폭포에 현현한다는 낭견관음(瀧見觀音) 낭견관음을 모시고  있어, 홍롱사는 관음보살만 삼존을 모시고 있다.

 

 

 

홍롱사 일주문. 편액에는 '천성산 홍롱사(千聖山虹瀧寺)'라고 새겨 놓았다.

 

 

 

 

일주문을 지나니 가홍정(駕虹亭)이라는 2층 누정이 나타난다.

 

 

 

 

사찰 경내에 이층누각이라면 이층에 종고루를 둔 천왕문이거나 법당으로 이어지는 누문이 있는데, 사찰 경내에 이렇게 규모가 큰 일반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니!

 

 

이 정자가 세워진 내력을 기록해 놓는 안내문을 보니,

 

이 골짜기 아랫마을인 대석에 살던 가선대부 이재영(李宰榮)이란 분이 노병이 치유되고 난 66세이던 1918년에 자신의 소유지였던 홍룡폭포 아래에 권순도(道)라는 분과 함께 정자를 세웠는데, 당시 지어진 건물이 사라지고 1970년대에 단층 콘크리트로 지었던 자리에 2011년 양산시에서 사진을 토대로 원형을 최대한 살려 복원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재영이란 분의 남긴 '가홍정원운병서(駕虹亭原韻幷書)'란 글이 눈길을 끈다. 글이 읽을 만하여 긴 글을 인용한다.

 

 

내가 병고를 견디다가 늙어갈수록 더욱 무료하여 맑고 한가한 구역 하나를 얻어 자취를 끊고 이름을 숨기고자 생각하였는데, 일찍이 살펴보니 살고 있는 동네 뒷산에 무지개골(虹洞)이 있었다. 골짜기가 깊어서 수십 구비가 됨직하고 구비진 상류에 폭포가 있는데, 무릇 상·중·하벽의 세 절벽으로, 위의 절벽은 높이가 20길 정도이고, 가운데와 아래 절벽은 위의 절벽의 반 정도이다.

 

예전에는 아래 절벽 곁에 기우단이 있어서 날씨가 가물면 당시 군수가 와서 제사하였다. 그 영험이 예전부터 그러하였거니와 또한 천 길 푸른 절벽이 좌우로 둘러싸고, 수많은 수목들이 위아래를 둘러 푸르게 에워싸고 있다. 그러다가 산에 햇빛이 막 비치고, 무지개 그림자가 번뜩거리며, 골짜기의 바람이 한바탕 뒤흔들면, 우레 소리가 펑펑 울리니 참으로 절경이다.

 

이에 무오년 봄에 폭포 곁에다 몇 칸 정자를 얽어서 이름을 가홍정이라 하였다. 간혹 올라가면 잡된 근심이 사라지고 상쾌한 기운이 생겨나니, 만년에 휴식하는 장소로 삼을 만하거니와, 인자는 산을 즐기고 지자는 물을 즐긴다는 경지에 대하여는 함영하는 바를 금함이 없으니 어찌 하겠는가.

 

혹시라도 바깥 사람의 나무람을 불러들일까 두렵지만, 산과 물은 공공의 물건이니 자기에게만 감추어둘 수 없고 사람 사람에게 간직될 수가 있다. 구경하러 오는 사람이 천 사람 만 사람이면 천 사람 만 사람의 소유인 것이다. 이에 천 사람 만 사람이 잡목이나 풀을 깔고 앉는 혐의가 있을까 하여 올라오기에 편하도록 한다. 오호라. 내 또한 천 사람 만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시를 덧붙인다.

 

聖山如畵洞天靑    천성산 그림 같고 동천은 푸른데

一派虹流劈巨靈    한 갈래 무지개 흘러 신령한 구역을 깎아냈네.

別地雷鳴淸晝兩    별유천지 우레소리 맑은 낮에 비 내리고

危巖花笑暮雲屛    깎아지른 바위에 꽃이 피는데 저녁 구름이 가리네.

數楹拙搆堪貽累    몇 칸의 엉성한  건물 누가 될지 모르지만

半世塵愁可喚醒    반평생 세상 근심 깨우쳐 줄 만하구나.

多謝東南行過客    고마워라 동남지방(부산, 동래) 지나가는 길손들

登臨衿珮摠蘭馨    오르는 젊은 선비들 모두가 난초향기로다.

 

* 글은 아래 출처에서 얻은 것이나 한시의 번역은 필자가 임의로 하였음.

<출처 : 지털양산문화대전 http://yangsan.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1400243>

 

 

"산과 물은 공공의 물건이니 자기에게만 감추어둘 수 없고" "천 사람 만 사람의 소유인 것"라고 말하는 이재영이라는 분의 인품이 참으로 아름답게 다가온다. "천 사람 만 사람이 잡목이나 풀을 깔고 앉"을까 정자를 짓는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오늘에도 있을까? 

 

 

이재영이라는 분과 함께 정자를 지었다는 권순도는 어떤 분인가? 면암 최익현의 문인이라는 점과 문묘의 직원을 역임하였으며 만년에 이재영과 더불어 가홍정을 지어 경전을 읽고 시를 읊으며 살았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분에 대한 흥미 있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어 줄거리만 소개해본다. 

 

1860년 물안뜰 마을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권순도는 미국인 선교사로부터 배운 영어를 앞세워 1888년 제3대 부산세관장으로 취임한 영국인 J. H. 헌트 씨의 관사에 일꾼으로 들어가는데, 세관장의 외동딸 리즈 헌트와 사랑에 빠지고 이를 반대하는 세관장을 피해 이 마을로 도피한다. 그러나 수색원의 추적을 받아 권순도는 잡혀 주산 감영에 갇히고 리즈가 권순도를 잊지 못하자 세관장은 근무지를 옮겨 임신한 딸을 데리고 홍콩으로 떠난다. 홍콩으로 간 리즈는 딸을 낳고 잊을 수 없는 권순도에게 편지와 함께 매번 돈을 부쳐왔고 권순도는 그 돈으로 중구 동광동 3가에 포목점을 차려서 거부가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1931년 권순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대석마을에는 '虹龍瀑布 世界人歡迎'이라고 새긴  비석이 서 있는데, 권순도가 세운 것이라 한다.

 

<이야기 출처 : http://www.bsjunggu.go.kr/bsjunggu/junggusub.php?midx=297>

 

 

 

가홍정을 지나니 이내 홍롱사로 건너는 작은 다리가 나타나고, 계곡으로 산 굽이를 이룬 정면 언덕 위로는 산신각, 그 옆으로는 2단와폭이 시원스레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홍룡폭포는 1폭포와 2폭포로 되어 있다는데, 이것이 아래쪽 2폭포인 모양이다. 

 

 

 

 

산신각

 

 

 

 

산신각을 지나 계곡 위쪽으로 오르니 마치 동양화 속으로 들어선 듯한 풍경이 나타난다.

 

 

 

 

천룡(天龍)이 폭포 아래에 살다가 무지개(虹)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는 '홍룡폭포'.

 

폭포수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져 비단폭을 연상시키는데, 이름처럼 폭포 아랫부분에는 고운 무지개가 그려졌다. 무지개 홍(虹) 용 룡(龍), 홍룡폭포, 얼마나 잘 어울리는 이름인가!

 

높이는 14m란다. 앞에서 이재영이란 분이 "상·중·하벽의 세 절벽으로, 위의 절벽은 높이가 20길 정도이고, 가운데와 아래 절벽은 위의 절벽의 반 정도이다. "라고 기록한 내용처럼 폭포 절벽은 삼단으로 되어 있다. 좁은 골짜기임에도 갈수기인 가을에 이처럼 세찬 물줄기를 보이니 예전에 아래 절벽 곁에 기우단이 있어서 당시 군수가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폭포 옆에는 관음전이 있어 백의관음과 함께 낭견관음(瀧見觀音)을 모시고 있다. 낭견관음은 바다 위에 앉아서 폭포(瀑布)를 관하고 보살로 관폭(觀瀑) 관음이라고도 하는데, 홍롱사는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낭견관음을 모신 사찰이다. 

 

 

관음전

 

 

 

백의관음

 

 

 

낭견관음

 

<위의 두 관음상 출처 : 불교저널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13>

 

 

 

폭포에서 계곡은 길이 막히고 되내려와 홍롱사 본전으로 향한다.

 

 

 

대웅전

 

 

 

 

대웅전 불상

 

 

 

 

홍롱사는 통일신라로 갓 접어들던 시기인 문무왕 673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 당시 승려들이 폭포에서 몸을 씻고 원효의 설법을 들었다 하여 낙수사(落水寺)라 하였고, 89암자의 하나로 천성산 제일의 대가람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다가 1910년대에 통도사의 승려 법화(法華)가 중창하였고, 1970년대 이후 꾸준히 중건 및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홍롱사는 조계종 사찰이 아니고 재단법인 선학원(禪學院)에 속하는 사찰이다. 선학원은 일제 강점기 일본 선종인 조동종과의 통합하려던 일제의 사찰 정책에 저항하였던 분들(만공, 만해 등)이 이끌었던 불교 조직을 이어받은 재단이다. 지금도 조계종과 통합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을 모신 무설전(無說殿)

 

 

 

천수천안관음보살

 

 

<출처 : 불교저널 http://www.buddhism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13>

 

 

 

좀더 꼼꼼하게 살펴보고 싶기도 하였지만, 천성산 산행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 무설전 앞을 지나 등산로를 향해 바쁘게 발길을 옮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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