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규슈 (12) 후쿠오카, '학문의 신'을 모신 다자이후 덴만궁

모산재 2015. 3. 16. 20:14

 

다자이후 정청을 둘러본 다음 다자이후덴만궁(天満宮)으로 간다. 덴만궁은 학문의 신인 스카와라 미치자네(管原道眞)를 모시는 신사로 다자이후 시내의 중심부에 있다.

 

 

 

일본의 전통 신앙, 신도(神道)의 중심을 차지하는 신사는 8만 5천여 곳에 달한다고 한다. 경전도 교리도 없는 신도, 신사에 모시는 신은 인격신이 주를 이루지만 자연물을 포함하여 워낙 다양하여 일정하지도 않다. 덴만궁은 헤이안(平安) 시대의 학자이자 시인, 정치가인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真)를 학문의 신, 지성의 신으로 모시는 신사다. 다자이후덴만궁은 교토의 기타노덴만궁(北野天満宮)과 함께 전국 1만 2천여 덴만궁(天満宮)의 총본산 역할을 하는 곳이다.

 

스가와라 미치자네는 9세기 말 중국 문학 연구가로 해박한 학식과 뛰어난 문장 실력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은 학자요 정치가였다. 스가와라 씨라는 점으로 왕인 박사의 후예라는 설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정치적 실세이던 후지하라 도키하라 등의 음모로 901년 이곳 다자이후로 좌천되어 왔다가 2년만에 숨을 거두었다. 스가와라의 유해를 소달구지에 싣고 가던 중 소가 엎드려 움직이지 않게 되자 그 자리에 유해를 매장하였다고 한다. 905년 유해를 매장한 자리에 사당을 세우고 919년 사전(社殿)을 건립한 것이 덴만궁 신사의 시작이다. 

 

 

 

늦은 오후 다자이후의 하늘은 흐리고 어두운데 조용히 비가 내리고 있다. 버스는 덴만궁 뒤편의 주차장에 섰다. 

 

 

덴만궁 후원에서부터 시작하여 역순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 다자이후 덴만궁 경내 안내도

 

 

 

 

 

 

주차장에서 경내로 들어서는 곳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매화가 정원을 이루고 있다.

 

미치자네는 매화를 사랑하여 시를 남기기도 하였고, 또 이곳 덴만궁에는 미치자네의 전설을 간직한 유명한 매화나무가 있는 탓으로 이렇게 매화 정원을 조성한 모양이다. 모두 130종 6천여 그루의 매화로 정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덴만궁 본전 뒤에는 아름드리 '부부장(夫婦樟)'이라는 이름의 녹나무 부부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수령이 1000년을 넘었다는 이 녹나무는 자세히 보면 뿌리 부분이 연결되어 있는 연리지이다. 엄밀히 말하면 가지가 아니라 뿌리가 하나된 것이니 '연리근(連理根)'이라 하는 게 맞겠다.

 

우리 가이드 정 처자는 "이 부부 녹나무 아래를 지나면 절대 헤어지지 않는다 하여 부부들이 한사코 피해가는 나무"라고 하여 우리를 웃겼다.

 

 

 

신사 후원에는 독특한 무덤이 둘 자리잡고 있다.

 

 

그 하나는 필총(筆塚). 

 

후데즈카라 부르는 이 붓무덤은 미치자네가 우대신 자리에 오르기까지에는 자신을 보필한 붓의 공이 컸다 하여 오래된 붓을 모아 만들었다고도 하고, 미치자네의 제자들이 사용한 붓을 묻어 조성했다고도 한다.

 

 

 

 

필총과 관련되어 유명한 사람으로 당나라 회소(懷素)와 수나라의 지영선사(智永禪師)가 있다.

 

회소는 심하게 흘려 쓰는 광초(狂草)에 능했다고 하는 당나라 승려다. 고향에 파초(芭蕉) 만여 그루를 심어두고 파초 잎에 글씨를 연습했는데, 술을 좋아해 흥이 돋으면 붓을 놀려 변화무쌍한 글씨를 썼다고 한다. 쓰다 버린 붓이 쌓이자 이를 산 아래 묻고는 필총(筆塚)이라 불렀다. 왕희지의 7대손이자 구양순이 스승이라는 수나라 지영선사도 평생 쓴 붓을 모아 무덤을 만들고 퇴필총(退筆塚)이라 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작년 연말에 서산의 어느 서예가가 자신이 쓴 붓과 함게 작품을 묻어 퇴필총을 썼다는 뉴스를 접한 적이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특이한 무덤은 '포정총(包丁塚)'이라는 부엌칼 무덤으로 '호쵸즈카'라 부른다.

 

 

 

 

 

후세 사람들이 붓무덤을 본 따 만든 것이라는데, 일본 요리사협회에서 세웠다고 한다. 한편, 미치자네 부부가 이곳에 살면서 자신들의 먹거리가 되어준 동물들을 위해 부엌칼을 묻은 무덤이라는 설명도 있다.

 

 

뒷모습을 바라보며 덴만궁 본전으로 들어선다.

 

 

 

 

 

 

일본적인 특징이 두드러지는 덴만궁 본전!

 

본전 앞마당에는 붉은 꽃 매화와 흰 꽃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왼쪽이 붉은 매화는 황후의 매화, 오른쪽 흰 매화는 바로 이 신사의 주신인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전설을 담은 토비우메(飛梅)다.

 

 

 

 

 

본전은 1591년에 건립되었는데,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도요토미 가문이 일본 전국을 지배한 모모야마(桃山) 시대의 웅장한 건축 양식은 다이묘와 무사가 중심이 된 모모야마 문화의 특성을 드러내는 듯하다.

 

 

 

 

 

신사의 지붕은 여러 모로 일본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사무라이의 투구를 연상시키는 신사 입구의 문을 카라몬(唐門)이라 하고 곡선 양식을 '카라하후(唐破風)'라 하는데, 지붕 측면 합각 자리의 현관 문이나 신사의 문으로 이용되는 건축 양식이다. 카마쿠라(鎌倉) 시대(1185-1333)부터 곡선을 살려 둥글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붕은 노송나무(편백나무) 껍질을 이어 붙이는 히와다부키(檜皮葺). 나라시대에는 도성의 주요 건물은 기와지붕으로, 부속건물은 히와다부키로 했지만 그 이후에는 히와다부키가 귀족의 저택이나 신사에 사용되었다 한다.

 

 

 

 신사 내부 모습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전설이 서린 토비우메(飛梅) 주위에는 연방 사람들이 몰려들어 기념사진을 찍는다.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는 우다천황과 다이고천황의 우대신이 되지만 후지와라 도키히라(藤原時平) 등의 모략으로 다자이후로 좌천되어 2년만에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헤이안시대는 곧 후지와라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권력을 휘두르던 후지와라 가문과 스가와라의 좌천을 둘러싼 당시의 상황은 아래와 같다. 

 

8세기 말 후지와라 씨는 태정관에 많은 공경을 배출하는 등 조정의 세력을 장악하였다. 북가의 후유쓰구는 사가 천황의 신임을 얻어 딸을 닌묘 천황( 833~850)의 비로 만들어 외척으로서 득세하였다. 842년 후유쓰구의 아들 요시후사는 황태자를 폐위하고 닌묘와 준시 사이에서 태어난 몬토쿠 천황(850~858)을 황태자로 만들었고 딸을 비로 만들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고레히토 친왕(惟仁親王)을 황태자로 세웠다. 858년 요시후사는 9세의 세이와 천황(858~876)이 즉위한 후 천황의 외조부로서 섭정하였다. 

요시후사 사후 그의 양자인 모토쓰네(836~891)도 8세로 즉위한 요제이 천황(877~884)의 섭정을 하였고 884년에는 요제이 천황을 폐위하고 55세의 고코 천황(884~887)을 옹립하였으며 우다 천황(887~897) 때 천황의 칙을 철회시키기도 함으로써 후지와라 씨의 세력을 과시하였다. 이처럼 후지와라 요시후사는 어린 천황을 대신하여 외척인 후지와라씨가 천황의 정무를 행하는 섭정의 선례를 열었으며, 또한 모토쓰네는 천황을 폐위시키고 성년의 천황에 대해서도 정무에 관여하는 관백의 선례를 열었다.

모토쓰네의 사후 우다 천황은 섭정과 관백을 두지 않고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를 등용하여 후지와라 씨를 견제하고 정치의 쇄신에 힘썼다. 다이고 천황(897~930)도 미치자네를 우대신(右大臣)으로 삼았으나, 901년 좌대신인 후지와라 도키히라(藤原時平)의 책모로 미치자네는 다자이후의 다자이곤노소치(大宰權帥)좌천되었다.

무라카미 천황(946~967) 또한 섭정·관백을 두지 않고 천황 친정(親政)을 하였다. 969년, 다이고 천황의 아들인 좌대신 미나모토 다카아키가 후지와라씨의 음모로 다자이후로 좌천됨으로써 후지와라 씨의 지위는 확립되고, 섭정·관백은 존속하게 되었다.

 

 

 

미치자네가 죽고나서 여러 가지 흉사가 잇따른다. 

 

909년에 미치자네를 모함했던 후지와라 도키히라가 39세로 죽고, 923년에는 다이고 천황의 황태자가 21세로 급사한다. 천황은 부랴부랴 미치자네를 원래의 우대신으로 추서하고 다자이후로 좌천시킨 칙서를 파기하는 등 미치자네의 명예를 회복시킨다. 하지만 931년에는 궁중 안의 세료덴(清涼殿)이 벼락을 맞고 불타며 다이나곤(大納言) 후지와라 키요츠라 등이 즉사한다. 다이고천황은 공포에 빠지고 3개월만에 45세의 나이로 죽고 만다. 미치자네의 원령이 천황을 죽였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미치자네를 '텐진사마(天神樣)'로 여기고 원령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그의 무덤에 신사를 세운다. 처음에는 벼락의 신으로 모셨지만 점차 학문을 관장하는 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真) 초상

 

 

 

출처 : 위키백과

 

 

 

이제 토비우메(飛梅)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볼 차례...

 

이 매화나무는 수령이 1000년이 넘었다고 하는 신목으로, 덴만궁의 6천여 매화나무 중에서 가장 먼저 꽃이 핀다고 한다. 다른 매화나무가 꽃이 필 무렵에는 꽃이 진다고 하는데, 과연 홀로 만발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치자네는 다자이후로 떠나기 전에 집 정원에 핀 매화를 보며 다음과 같은 와카(和歌)를 읊었다고 한다. (와카(和歌)  : 5-7-5-7-7로 마디를 나누어 31자로 엮은 일본의 단가(短歌)를 가리킨다)

 

 

東風吹かば                         동풍이 불면
にほひおこせよ                    향기를 전해 주렴
梅(うめ)の花(はな)                 매화꽃이여
あるじなしとて                    주인이 없다고 해서
春(はる)を忘(わす)るな            봄을 잊지나 말게

 

 

그가 다자이후에서 쓸쓸하게 생활하며 두고 온 매화나무를 그리워할 때 하루 밤 사이에 그 매화나무가 다자이후로 날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날아온 매화'라는 뜻의 '토비우메(飛梅)'로 불리며 주인 미치자네가 잠든 덴만궁을 지키고 서서 해마다 가장 먼저 꽃을 피우고 있다. 

 

 

 

본전 왼쪽 마당에 꽃망울을 터뜨리는 황후의 매화

 

 

 

 

 

그리고 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다른 매화나무와 봉납 귤나무

 

 

 

 

 

덴만궁 양쪽 회랑채에는 "수험 합격", "기원 접수" "신주(神酒)" 등의 구절이 곳곳에 보인다.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다 보니 입시철을 맞아 펼쳐진 풍경인 듯 싶다.

 

 

 

 

 

마당 가에는 운세를 보는 쪽지인 오미쿠지(おみくじ)를 파는 자판대가 놓여 있다.

 

 

 

 

 

100엔을 넣고 길흉이 적힌 종이를 꺼내어 나쁜 운이 나오면 접어 지정된 장소에 매어 놓고, 좋은 운이 나오면 가지고 돌아가서 다음에 그 절이나 신사에 왔을 때 두고간다고 한다. 요즈음은 결과와 상관없이 매어놓는 사람들이 많다고...

 

 

운세 쪽지인 오미쿠지를 매다는 곳과 소원을 적은 나무팻말인 에마(絵馬)를 매다는 곳을 따로 두었다. 에마는 원래 살아 있는 말을 신에게 바치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는데 나중에는 목판에 말 그림을 그려서 바치거나 걸게 된 것이 변화한 것이라 한다. 

 

 

 

 

 

 

본전을 벗어나서 바라본 누문. 누문 앞으로는 석등이 줄지어 있다.

 

 

 

 

 

 

신사의 유물을 전시하는 보물전 앞에 '소봉시비(蘇峰詩碑)'라는 안내판이 붙은 시비가 눈에 띈다.

 

 

 

 

 

'소봉(蘇峰)이 누구인가?

 

바로 이곳 이웃 규슈 구마모토 출신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전반에 대활약한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 1863~1957)

라는 제국주의 언론인이다. 젊은 시절 서양식 자유민주적 개혁을 주장하며 평민주의를 표방하여 맹렬하게 번벌(藩閥) 정부를 공격하던 그는 청일전쟁 후 군부와 결탁 군비 확장을 주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군국주의를 지지하였고, 1910년 총독 데라우치의 요청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의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 귀족원 의원 등에 추대되고 문화훈장을 수여받는 등 영예를 누리며 제국주의에 앞장섰고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다. 

 

소호 가에는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후예라고 하는 가계 전설이 있었던 듯 이 비석에도 스스로 스가와라 성을 써서 '스가와라마사토(菅原正敏)'라는 이름을 새기고 있다. 92세에 썼다는 이 글은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예찬하고 있는데, 국가주의로 똘똘 뭉친 그의 의식이 미치자네에 깊이 투사되고 있다.

 

시문을 옮겨본다.

 

儒門出大器     유학자 가문에서 큰 그릇 나니
抜擢躋台司     태사에 발탁되어 오르셨네
感激恩過厚     두터운 은덕에 감격하여
不顧身安危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으셨네
一朝罹讒構     하루 아침에 참소에 얽혀들어
呑冤謫西涯     원통함을 삼키며 서쪽 벼랑에 유배되었네
傷時仰蒼碧     다친 마음을 푸른 하늘 우러러
愛君向日葵     해바라기처럼 임금을 사랑하였네
祠堂遍天下     사당이 천하에 두루 퍼져
純忠百世師     순정한 충심은 백세의 스승이 되었네.
  昭和二十九歳 蘇峰菅原正敏 敬頽齢九十二  소화 29년(1954년) 소고 스가와라마사토 퇴령(노년) 92세

 

 

 

소고 시비 뒤편에 세워진 동 기린상

 

 

 

 

 

누문 앞 도리이

 

 

 

 

 

도리이 앞쪽으로 아름드리 상록 고목이 서 있다. 다케오의 3000년을 넘긴 녹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다자이후덴만궁 주변에도 수백 년 또는 천 년 세월을 지켜온 고목들이 가득하다. 참으로 부러운 풍경이다.

 

 

 

 

 

신사 경내는 상록 고목이 숲을 드리운 아름다운 연못으로 경계 지워져 있다.

 

이 연못은 마음 심(心)자 모양으로 조성한 '심자지(心字池)'란다. 그 위로 과거, 현재, 미래를 의미한다는 세 개의 다리가 차례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게 되니 지금 미래에서 현재를 거쳐 과거로 나갈 참이다.

 

 

아치형으로 된 미래의 다리를 건너니 평평한 긴 다리가 이어진다.

 

 

 

 

 

평평한 다리가 시작하는 지점에 시가샤(志賀社)라는 작은 목조 사당이 눈길을 끈다.

 

 

 

 

 

해상 안전을 바라는 바다의 신인 와다츠미(綿津見)를 모신 사당이라 한다. 와다츠미는 옛말로 '바다'를 뜻하는 '와다'와 '신'을 뜻하는 '미'를 관형격을 나타내는 '츠'로 연결한 말이라고 한다. 

 

1458년 무로마치(室町)시대에 지어진 큐슈 내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라는데, 이 작은 목조건물이 600여 년이나 이렇게 온전하게 보존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물은 나무판에 그린 그림인 '에마(絵馬)'를 걸어 놓은 에마도絵馬堂)라는 전각이다.

 

 

 

 

 

이 다리는 타이코바시(太鼓橋)라 부르는데, 우리말로는 '북다리'쯤 되는 이름. 가운데가 반원형으로 불룩한 무지개다리(홍예교)를 일컫는 이름이다.

 

이제 현재의 다리를 지나 다시 아치형으로 된 과거의 다리로 들어선다. 하지만 풍경은 뒷걸음치며 본전 쪽으로 향한 것이다.

 

 

 

 

 

바깥에서 바라본 심자지(心字池)와 타이코바시의 아름다운 풍경

 

 

 

 

 

 

※ 다자이후 덴만궁 안내도

 

 

 

 

 

심자지(心字池)와 타이코바시의 아름다운 풍경

 

 

 

 

 

700년 되었다는 연못 입구 도리이

 

 

 

 

 

도리이 앞에는 연수왕원(延壽王院)의 정문과 황톳빛 담장 풍경이 펼쳐진다. 

 

 

 

 

 

연수왕원 정문 앞에는 1984년 히로히토 일왕이 하사했다고 하는 고신규(御神牛)라 불리는 황소상이 자리잡고 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죽자 그의 시신을 싣수레에 싣고 끌고가던 소가 갑자기 멈춰서서 움직이지 않았고 그 자리에 미치자네를 장례지냈다고 하는데 바로 덴만궁 자리가 되었다. 

 

이 소의 코와 뿔을 만지면 대학에 합격한다는 얘기가 널리 퍼져 이를 만져보려는 관광객들이 줄을 선다. 오후 늦은 시간이지만 이 사진 한 장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덴만궁의 주인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아니라 바로 이 소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지경이다. 

 

 

연수왕원(延壽王院)은 예전에는 덴만궁 참배객의 숙소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덴만궁의 세습신관이 거주하는 집(社家)인 듯하다. 지금 미치자네의 후손이 세습신관을 맡고 있는 듯...

 

 

 

연수왕원 내부 풍경

 

 

 

 

 

연수왕원 담장 곁 에는 스가와라 미치자네 가비(菅原道真 歌碑)가 서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토비우메(飛梅) 전설과 관련된 "동풍이 불면 향기를 전해주렴..."이란 와카(和歌)가 새겨져 있다.

 

 

 

 

 

이곳 매화 숲이 향기로운 풍경(かおり風景) 100선에 선정되었다는 환경대신 인정서가 공원 한 쪽에 세워져 있다.

 

 

 

 

 

헌매비(獻梅碑)

 

 

 

 

 

 

연수왕원 동쪽 앞에는 '우키도노(浮殿)'라고 하는 목조 전각이 자리잡고 있다.

 

 

 

 

 

전각 주변에는 물을 얕게 채워 놓아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부전(浮殿)'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수면에 비치는 전각의 그림자도 아름답다. 

 

 

 

 

 

우키도노 앞에서 바라본 연수왕원 방향의 풍경

 

 

 

 

 

이제 신사의 참배길인 오모테산도(表參道)를 따라 가게가 늘어선 거리로 접어든다.

 

사진은 뒷걸음질치며 보는 풍경, 연수왕원의 정문이 도리이 너머로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도리이. 덴만궁으로 들어서는 첫번째 도리이다.

 

 

 

 

 

오모테산도 주변 가게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야키모치 가게. 야키모치는 '우메가에모치(梅が枝もち)'라는 구운 찹쌀떡을 가리킨다. 이 떡을 먹으면 병마를 물리치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한다.

 

 

 

 

 

우메가에모치에도 미치자네의 전설이 담겨 있다. (이야기 출처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1>)

 

미치자네가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지내고 있을 때 조묘(淨妙)라는 비구니 노파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따뜻하게 구운 찹살떡을 바쳤는데 미치자네가 즐겨 먹었다 한다. 얼마 뒤 미치자네가 죽었을 때 그의 관 위에는 구운 참쌀떡과 매화가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할머니는 다자이후 남쪽 자신의 이름을 딴 정묘원(淨妙院)이란 사원에서 대명신(大明神)으로 모셔지고 있다고 하는데, 팽나무가 많아  에노키샤(榎社)라 불리는 이 사원에서 이 할머니도 에노키샤할머니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미치자네 전설이 담긴 우메가에모치 맛도 보지 못하고 만다. 한 시간 정도밖에 주어지지 않은 이곳 저곳 돌다보니 어느덧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다가 북다리(타이코바시)를 건너지 않고 심자지(心字池) 오른쪽을 돌아 창포지 쪽으로 향한다.

 

 

창포지 방향으로 가는 길에서 바라본 과거의 다리

 

 

 

 

 

창포지(菖蒲池). 300여 개의 용기에 담은 수십 종의 창포를 기른다고 한다.

 

 

 

 

 

창포지의 동쪽으로는 작은 산줄기를 가로질러 규슈국립박물관으로 가는 긴 회랑이 보인다.

 

도쿄, 교토, 나라에 이어 일본의 네번째 국립박물관. '아시아 문화교류 테마 박물관'이라는 상설전시관 관람이 원래 일정에 포함된 것이었는데,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갈 수 없게 되었다. 

 

 

 

 

 

 

빗방울은 좀더 굵어져 창포지 수면에는 수많은 빗방울 자욱이 동심원을 그리며 점점이 번진다.

 

 

저녁식사는 에도이치 고기부페에서...  가이드 정 처자는 일본의 고기가 맛있다고 했지만 그렇게 맛있다고 느끼지 못하고 먹었다. 어쩌면 여러 번 먹은 가이세키의 정갈한 맛에 길들여져서 그런지 모르겠다.

 

식사 후 후쿠오카로 이동해 하카다역 맞은편에 자리잡은 하카다컴포트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거리 구경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