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규슈 (9) 규슈올레 히라도 코스, 가와치캠프장-사비에르기념성당-네덜란드상관

모산재 2015. 3. 10. 18:44

 

가와치 고개를 넘어서 히라도로 내려서는 길로 접어든다. 

 

정상의 초원을 벗어나면서 다시 숲속으로 길은 갈짓자로 구부러지기를 거듭한다.

 

 

숲가에는 유난히 꽃대를 밀어올리고 있는 키 낮은 식나무들이 자주 눈에 띈다. 가끔씩 붉은 열매를 달고 있는 식나무도 보이고...

 

 

 

 

 

그리고 백합과에 속하지 싶은 잎 넓은 이 풀도 아주 흔한데, 만년청(万年青)과 비슷하면서도 달라 보이는 풀이다.


 

 

구불구불 내려가는 길은 결국 가와치 고개를 끼고 돌았던 거다. 오른쪽으로 불탄 가와치 고개 초원의 풍경이 다시 시야를 채운다.

 

 

 


그리고 나타나는 가와치 고개 캠핑장.

 

넓은 야영장은 금잔디가 곱게 입혀져 있고 식수대와 정자, 탁자가 잘 갖추어진 캠핑장. 아래로는 사방이 울창한 상록수 숲, 위로는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 히라도 시민들에게는 꿈의 캠핑장일 듯하다.

 

 

 

 

캠핑장 아래로는 다시 편백나무 등 상록수 숲길이 계속된다,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자주 보이던 나무

 

 

 


 

히라도 시내로 향하는 숲속의 갈짓자 내리막길은 한동안 계속된다.

 

그리고 마침내 숲을 벗어나 히라도 앞 바다가 보이는 산기슭에 자리잡은 종합운동공원이 나타난다. 다케오가 그랬던 것처럼 이곳도 운동장이 높은 산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운동장 뒤편의 공원

 

 

 

 


아카사카(赤坂) 야구장.

 

이 작은 도시에 종합운동장과 야구장을 다 갖춘 일본이 참 부럽다. 게다가 야구장 이용료는 시간당 520엔이라 되어 있다. 5000원도 안 되는 비용!

 

 


 

어디선가 주악대의 소리가 힘차게 들린다.

 

기나긴 올레길을 무사히 마치고 히라도 입성을 환영이라도 하는 듯이... 넓은 운동장 한족에서 소방서 소속 사람들이라는 사람들이 연주 연습을 하고 있다.

 

 

마을로 내려서고 산허리를 끼고 도는 길로 접어든다.

 

 

 

어느 집 정원에 꽃을 피운 마취목. 진달래과 나무인데 말이 잎을 따 먹으면 마비된다고....

 

 

 

나한송이 워낙 흔한데, 이렇게 민가의 울타리로도 쓴다.

 

 

 

 

 

그리고 언덕 위에 자리잡은 성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기념 성당에 도착한다.

 

 

 

 

16세기 중엽 일본에 카톨릭을 전파한 사비에르 신부를 기념하여 1931년에 건축된 고딕 양식의 카톨릭 교회다.

 

 

 

 

정식 이름은 '카톨릭 히라도 교회'라고 하는데, 1971년 사비에르 기념비가 세워지면서 성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기념교회로도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550년 가고시마를 거쳐 히라도를 방문한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신부는 세 차례 히라도를 방문하여 영주 타카노부의 허락을 얻어 히라도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포교했다.

 

 

성당 왼쪽으로는 사비에르 신부 포교 40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기념비와 함께 동상이 서 있다.

 

 

 

 

사비에르 신부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명을 딸 정도로 존경했다는 인물로 로욜라와 함께 예수교회를 창설하고 동양 전도에 일생을 바쳐 '동양의 사도'로 불리며, 일본에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전한 사람이기도 하다.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de Xavier, 1506 ~ 1552)

 

에스파냐 북부에 있던 나바라 왕국 귀족가문 출생으로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534년 27세 때에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와 함께 예수회(Jesuit)를 창설하였고, 1540년 로욜라를 초대 총장에 추대, 교황의 공인을 받았다.

 

또한 예수회의 동인도 관구장(管區長), 교황 특사로서 동양 일대의 선교 책임을 맡아 일하였는데, 1542년에 인도의 고아(Goa)를 거쳐 말레이반도, 몰러카즈(Moluccas) 제도에서 포교하였다. 1549년사쓰마 번 태생의 일본인 무사 야지로를 포함한 7명의 일행들과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 현에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다이묘 시마츠의 초대로 그의 성에 갔는데, 시마츠에게 화승총을 선물했다. 다이묘는 크게 기뻐하며 전도를 허용하는 것은 물론 종교의 자유도 인정하였다. 1년간의 전도로 1백명에서 1백 50명이 신자가 되었다. 하지만 불교 신자들의 반발로 시마츠 다이묘가 기독교에 대해 차가운 모습을 보이자, 1551년 히라도와 야마구치 현을 거쳐 교토에 갔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다시 야마구치에 되돌아갔다. 예수회는 오우치 다이묘에게 화승총 등을 선물하였고 오우치는 기뻐하며 대도사라는 빈 절을 교회로 내줄 정도로 사비에르의 전도 활동을 도와주었다. 야마구치에서 5개월간 전도한 사비에르는 1551년 중국에 갔지만 입국하지 못하고, 이듬해 11월 27일에 광둥 성 앞의 섬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비에르가 전도활동을 한 가고시마와 야마구치에도 하비에르 기념교회가 있다.

 

 

바로크 시대 화가인 루벤스(1577~1640가 그린 그림에는 당시의 모습이 잘 표현되고 있다. 오른쪽에 검은 사제복을 입은 사비에르 신부, 왼쪽 중앙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야지로, 아래 가운데에 두루마기를 입은 조선인 들이 보인다.

 

루벤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교회 앞에 있는 순교자 현창위령비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금교령  선포에 따라 히라도의 순교자는 격증하여 수는 400명을 넘었다고 전해진다. 이 비석은 교회 헌당 50주년에 즈음하여 세워졌다.

 

 

성당 내부, 붉은색과 푸른색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름답다.

 

 

 

 

석위로 꾸며 놓은 정원의 바위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으로 보이는 백합

 

 

 

짜개덩굴

 

 

 

 

사비에르 기념교회를 지나면서 길은 내리막길이다. 

 

불교사원으로 이어지는 계단길, 어디선가 본 듯한 아름다운 길이 눈 아래 펼쳐진다.

 

 

 

 

 

계단을 내려선 곳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절은 코묘지(光明寺)...

 

수백 년은 되었을 법한 소철나무가 지키고 선 산문이 눈길을 끈다.

 

 

 

앞서 간 사람들이 그냥 지나쳐갔지만 나는 빠르게 돌아보기로 한다.

 

 

 

소철나무는 암수딴그루인데, 이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달고 있는 걸 보니 암나무다.

 

  

 

 

본당으로 오르는 계단. 왼쪽은 경당(経堂), 오른쪽은 종당(鐘堂)이다.

 

 

 

본당은 문이 닫혀 있는 듯...

 

 

 

코묘지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952년, 히라도 번의 초대 번주이자 사이쿄지 창건자인 마츠라 시게노부(松浦鎭信)의 아버지 마츠라 다카노부(松浦隆信)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는 왜구조직인인 마츠라당(松浦黨)을 기반으로 쓰시마를 공격하여 히라도 중심의 해상왕국을 구축하고 명과 조선과의 교역에 힘쓰며 포르투갈과 의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산호(山号)는 용계산(龍渓山), 정토진종(浄土真宗) 본원사파(本願寺派)에 속하는 사원으로 아미타불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다고 한다. 

정토진종은 가마쿠라 시대 초기 일본 불교 정토종(淨土宗)의 개조 호넨(法然: 1153~1212)의 제자인 신란(親鸞: 1173~1262)이 호넨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창종한 종파다. "나무아미타불"을 소리내어 한마음으로 외치기만 하면 누구든지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며, 본원사파는 극락왕생을 실현하는 아미타불의 공덕을  믿고 의지함으로서만 구제된다는 친란과 법주 연여(蓮如)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한다.

 

 

코묘지 뒤편으로 보이는 사비에르 기념 성당

 

 

 

 

코모지 아래 쪽에는 즈이운지(瑞雲寺)가 자리잡고 있다. 올레길은 즈이운지 산문으로 들어서 통과한다.

 

 

 

즈이운지의 산호(山号)는 금룡산(金龍山)

 

 

 

즈이운지의 본당

 

 

 

즈이운지는 1402년 마츠라 다이쇼(松浦代勝)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윗대의 마츠라 가문인 듯하다. 조동종(曹洞宗)에 속하는 사원으로 석가모니를 본존으로 모시고 있다.

 

조동종은 에사이(栄西)가 연 임제종(臨済宗)에서 발전한 종파로 도오겐(道元)에 의해서 열린, 좌선을 중시한 종파이다. 에사이는 가마쿠라 막부를 이끌어간 여걸 호죠 마사코(北条政子1156-1225)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임제종은 막부의 보호를 받아 무사들 사이에 급속하게 퍼져나간 종파다.

 

 

이 절에는 네덜란드상관장의 딸 코르넬리아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규슈올레 히라도 코스 안내글에는 임제종 사원 쇼쥬지(正宗寺)와 마츠라 다카노부(松浦隆信)의 묘가 있다고 하는데, 쇼쥬지라는 이름의 사원은 보지 못하고 지난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두 사원을 지나니 높은 언덕 아래로 난 마을길이 줄곧 이어진다.

 

 

 

그 길의 중간, 덴만신사(天滿神社)로 오르는 계단 아래에서 거대한 소철나무(大ソテツ)를 만난다.

 

 

 

고묘지 소철나무보다는 더 커 보이는데 400살이나 되었다고 한다. 400여 년 전의 무역상, '가와사키야(川崎屋)'의 정원에 심었던 것이라고 한다. 

 

비슷한 위도의 제주에서 이런 소철나무를 볼 수 없는 게 아쉽기만 하다. 3000년 녹나무, 400년 소철이 보존되고 있는 일본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철나무는 수놈인 듯 열매가 보이지 않는다.

 

이 마을 일대는 에도시대 초기 가장 번화한 무역상들의 부촌이었다고 한다. 집들이 공간을 두고 늘어서 있어 마을길은 편안함과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아름다운 서향 향기가 마을길에 퍼진다.

 

우리 나라 남부지방에서도 서향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풍성한 꽃을 피우는 것은 보지 못했다.

 

 

 

높은 담장 위에 보이는 작은 꽃을 클로즈업해 본다.

 

 

 

 

길은 사키가타초(崎方町)로 이어진다.

 

네덜란드가 1609년 처음으로 히라도에 입항하여 1641년 무역의 거점을 나가사키(長崎) 로 이전하기 전까지 30여 년간 부두 (埠頭)를 만들고 상관과 주택을 지어 계속 세워가며 동양 무역의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이 골목 중간쯤 왼쪽 높은 계단 위로 히라도 항을 굽어보는 마츠라사료박물관(松浦史料博物館)이 있었는데, 원래 마츠라 시게노부가 지은 번청(藩廳)이었던 곳이라 한다. 메이지 시대에 마츠라 가문의 사택으로 사용되다가 박물관으로 바뀌었단다.

 

 

꽃을 피운 개모밀덩굴

 

 

 

 

길은 히라도 항이 한눈에 들어오는 사키가타공원(崎方公園) 아래 산허리로 이어진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히라도성(平戸城)

 

 

 

 

히라도성은 마츠라 시게노부가 1599년 가메오카산에 쌓았던 히노타케성을 1613년 불태워 버리는 사건이 생긴다. 도요토미와 가까웠던 탓으로 에도막부의 파면과 몰수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한다. 1704년 마츠라 다카시가 히노타케 성터에 새롭게 성을 쌓아 1718년 히라도성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1871년 폐번치현에 의해 폐성이 되고 기타코구치몬, 다누키 성루를 남기고 해체되었는데, 1962년 3층 5단의 모의 천수각이 세워졌다.

 


현재 성터는 가메오카 공원으로 되어 시민운동장등이 설치되어 있다. 

 

 

 

히라도 항을 두르고 있는 시내 전경

 

 

 

그 속에서 멀리 사비에르 기념 성당과 코모지와 즈이운지가 하나의 풍경으로 잡힌다.

 

 

 

히라도항 전경

 

 

 

히라도항을 향해 내려가는 길

 

 

 

애기모람으로 보이는 덩굴나무가 담에 붙어서 자라고 있다.

 

 

 

 

네덜란드상관 주변 거리 풍경

 

 

 

언덕을 내려온 해안에는 오란다 우물(オランダ井戶)이 자리잡고 있다. 오란다는 네덜란드(和蘭)의 일본어 표기, 그러니까 네덜란드 상관에서 일하던 사람의 마실 물이나 배에서 마실 물을 긷던 우물이다.

 

 

 

 

바닷가에는 뱃길의 무사 안녕을 비는 토리이(鳥居)가 서 있다.

 

 

 

 

 

그리고 히라도 최근에 복원한 네덜란드 상관(平戸オランダ商館)...


네덜란드 상관은 일본 최초의 서양 건축으로 1609년에 세워진 석조 창고. 2011년 복원되어 박물관으로 개관했다고 한다. 네덜란드 상선들이 이곳에 바로 정박할 수 있었다.

 

 

 

 

부근 거리는 상관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주거지. 바다에는 이국의 상선들이 떠 있고 거리에는 네덜란드인 등 서양인들이 거니는 당시의 풍경이 선하게 떠오른다.  

 

 

히라도 올레의 끝은 팔탕과 족탕이라 했는데, 우리의 안내인은 사키가타초 거리로 들지 않고 네덜란드 상관에서 바닷가를 따라서 바로 여행안내소로 이끈다. 기나긴 올레를 끝내고 온천에 발을 담그는 즐거움을 생략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여행 안내소에서 이곳저곳 의자를 끌어모아 모여 앉아서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한다.

 


 

 

이렇게 해서 히라도 올레는 모두 끝났다.

 

비가 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해가 난 것은 아니지만 다행히도 날씨는 좋았다.

 

 


 ※ 히라도항 주변 안내도

 

출처 : 규슈올레 히라도 코스 안내 팸플릿

 

 

그리 크지 않아 보이는 히라도 성을 한번 더 쳐다보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오후 일정을 위해 히라도대교를 건너 후쿠오카 다자이후시(太宰府市)의 수성(水城) 유적과, 다자이후 정청(大宰府 政廳) 유적, 그리고 천만궁(太宰府天満宮)을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