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규슈 (10) 후쿠오카, 백제 유민이 쌓은 다자이후 수성(水城) 유적

모산재 2015. 3. 12. 19:49

 

히라도 올레를 끝내고 도착한 후쿠오카현 다자이후(太宰府)시.

 

 

후쿠오카에서 남동쪽 15km 정도 거리에 있는 인구 7만 여 명의 작은 도시이지만,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부터 500년 이상 규슈 지역을 다스린 유서 깊은 고도(古都)다. 나라 시대(710~794년)에서 헤이안 시대(794년~1185년),그리고 가마쿠라 시대(1185년~1333년)까지 다자이후는 일본의 군사적, 행정적 중심지였고 한국과 중국의 외교 사신을 영접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660년 백제 멸망 후 이곳으로 망명한 백제 유민들이 축조한 대야성(大野城)과 수성(水城) 유적, 그리고 그와 연관되는 다자이후 정청(大宰府 政廳) 유적 등이 남아 있다.

 

 

 

 

다자이후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이곳에서 '미즈끼'라 부르는 수성(水城) 유적!

 

 

정면 왼쪽에서 흘러내리던 산줄기가 도로를 건너 뛴 다음 들판 속으로 긴 띠로 달려나가는 숲 앞에서 차는 멈춰섰다.

 

 

모두들 처음 방문하는지라 수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는데, 나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몽촌토성과 다름없어 보이는 저 숲이 수성의 일부라는 것을...

 

 

수성 유적은 대야성이 있는 사왕사산(四王寺山)로 이어지고 있는데 들판에 쌓아올린 토성과 도로에 의해 끊겨진 모습이다.

 

 

 

 

 

 

도로를 건너 오른쪽 다자이후 시내 방향 들판 쪽으로 상록수와 대나무들이 긴 띠 모양의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 토성 아닌가. 바로 몽촌토성의 모습이다.

 

 

663년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해 출병한 왜군은 당나라 수군과 벌인 백강전투(또는 백촌강전투)에서 참패한다. 살아남은 왜군과 함께 백제 귀족 등 유민이 대거 도망쳐 나와  왜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들은 나당연합군이 뒤쫓아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서 토성을 쌓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수성(水城 미즈키)이다.

 

 

눈앞에 보이는 들판은 성을 축조할 당시에는 바깥 해자(外濠)로 조성되었던 곳, 1400여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며 논으로 바뀌어 그 흔적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이 수성은 백제인들의 토성 건축술에 의해 쌓은 것으로 다자이후를 방어하는 바리케이드 기능을 하였다. 다자이후 수성과 대야성 복원도를 보면 수성이 위치가 다자이후를 방어하기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사진 원본 출처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1>

 

 

다자이후는 하카다항으로 열려진 유일한 방향으로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다자이후 방어를 위해 산에는 대야성을 쌓고 열려진 길목에는 수성을 쌓았지만 우려했던 나당연합군의 침공은 없었고 이후 전쟁에는 한 번도 이용되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 속에 지금은 폐허로 남아 있다.

 

 

도로가 나 있는 현재 위치가 동문(東門) 유적이며, 눈 앞에 보이는 토성의 끝에는 다자이후 시내를 가로지르는 미카사강(御笠川)이 흐르고 그 건너편으로 토성 유적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 끝에 서문(西門)유적이  있다.

 

 

 

 

 

 

위의 그림을 보면 성벽을 꿰뚫고 있는 목통(木桶)이 세 군데에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평소에 안쪽 해자에 물을 채워두고 바깥 해자는 비워 두고 있다가 외부의 침공이 있을 때에 목통을 통해 바깥쪽 해자로 물을 내보내 침공을 저지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토성의 길이는 1. 2km라고 하며 높이는 9m이며, 토루의 아래 부분 폭이 23m에 이른다고 한다. 바깥 해자와 안쪽 해자 사이의 토루의 토대는 너비가 77m.

 

 

 

 

 

 

이듬해인 665년에는 수성의 방어선이 무너질 경우를 대비한 2차 방어선을 구축한다.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다자이후 뒷산인 해발 410m의 오노잔(大野山)에 백제 산성 양식으로 오노성(大野城)를 쌓았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는 오노성과 키이성(基肆城)을 백제사람 달솔 억례복유(億禮福留)와 사비복부(四比福夫)가 지휘하여 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노성에서 발견되는 기와 막새와 도깨비 문양 기와는 백제의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고 한다.

 

 

나당연합군이 일본 본토까지 침입할 것을 우려하여 곳곳에 방어용 성을 쌓고 구마모토현 기쿠치성(鞠智城)을 이 성들에게 식량, 무기, 병사들을 보급하는 병참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이런 군사적 행정적 업무를 총지휘했던 곳이 다자이후였다.

 

 

수성 외호(外濠) 쪽

 

 

 

 

 

수성 내호(內濠) 쪽

 

 

 

 

 

도로 건너편 수성 유적 표지

 

 

 

 

 

수성대제비(水城大堤碑)

 

 

 

 

 

산 언덕 위에서 바라본 수성과 다자이후 시 원경 

 

 

 

 

 

백제 부흥을 위해 출병한 3만여 명의 왜군이 백천강 전투에 참패함으로써 일본에 대거 망명한 백제 귀족 등 유민들이 수성과 오노성을 축조하였고, 7세기 후반 다자이후는 "도노 미카도(먼 곳의 조정)"라고 불릴 정도로 외교 및 일본 서부 지역의 군사 방위와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백강전투는 일본의 참패로 끝났지만 일본이 강성한 고대국가로 나아가는 주춧돌이 되었다.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花經)' 비석

 

 

 

 

 

수성에서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곳에 서 있는 수성 관련 표지석

 

 

 

 

 

수성은 1921년(大正 10년)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수성 유적 안내문

 

 

 

 

 

동문 유적 부근에 세워진 시비

 

 

 

 

 

아마도 일본의 고대가요집인 <만엽집>에 실린 작품을 새긴 시비인 듯.

 

다이나곤(大納言)은 다이죠칸(太政官)의 차관으로 우대신(右大臣) 다음의 정부 고관인데, '대반경(大伴卿)'은 다자이후의 장관을 지낸 오토모노다비토(大伴旅人)인 듯하다. 그는 일본의 대표적인 와카(和歌) 시인으로 만엽집에 그의 시들이 전하는데, 오토모 가문의 몰락과 다자이후(大宰府)로의 좌천에 따른 소외감과 망향의 정 등 인생의 애환을 노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로코 고지마(郞子 兒島)는 누구인지...?

 

 

 

 

수성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내려올 때쯤부터 잔뜩 찌푸리고 있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제법 옷이 젖을 정도로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바로 부근에 있는 다자이후 정청 유적지로 이동한다.

 

 

 

 

※ 백강전투, 또는 백촌강전투

백제 부흥군의 요청으로 왜군이 파견되어 663년 지금의 금강에서 당나라 수군과 사이에 벌어진 전투를 한국에서는 '백강 전투', 중국에서는 '백강구 전투', 일본 측에서는 '백촌강 전투'라 부른다.

신라의 요청으로 660년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13만 대군은 김유신의 5만 병력과 합세하여 백제를 공격하고 사비성을 함락시킴으로써 백제는 멸망한다. 하지만 임존성의 흑치상지가 당군에 저항에 나서고 무왕의 당질인 복신과 승려 도침이 백제 부흥운동에 나서 원병 요청과 함께 660년 10월에 왜국에 인질로 있던 왕자 부여풍의 귀환을 요청하고 661년 9월에 부여풍을 백제로 보내면서 3만여 대군을 3차례에 걸쳐서 보낸다.

구원군을 보내기 위해 준비하던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이 661년에 급서한 뒤에 황태자였던 나카노오에가 즉위식도 미뤄가면서 부흥운동 지원에 전력을 다했다. <일본서기>에는 부여풍을 호위하기 위한 1만여 인의 선발부대와 선박 170여 척을 661년 5월 출발시켰고, 2차로 주력군 2만 7천 인이 662년 3월 출발하였고, 3차로 1만여 인 663년 8월 출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백제 부흥군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 661년 복신이 도침을 죽인다. 부흥군의 왕 부여풍이 복신이 도침을 죽인 것을 나무라자 663년 복신은 반란을 노리다가 오히려 암살된다. 이렇게 부흥군의 내분은 극에 달하고 부흥군의 약화로 이어진다. 혼자 남은 부여풍은 왜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고 이에 왜군 2만명이 백강으로 들어왔으나 당군과 백강에서 4번 싸워 모두 패한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대패했다.(이때 백제·왜의 연합군은 당의 수군에 밀려 물러나 있다가 "우리가 먼저 치면 저들은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는 몹시 엉터리같은 작전을 택했다고 한다.)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 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탔으며 침몰하면서 내뿜은 연기와 불기둥이 하늘을 온통 덮고 바닷물을 붉게 물들였다고 전한다.

백강에서 대패한 왜병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왜병과 백제 유민들 중 망명을 원하는 이들을 배에 싣고 당의 수군에 쫓기며 간신히 귀국했다. 백제 부흥군 지휘부, 그리고 백제 유민의 대부분은 당시 백제의 '우호국'이었던 왜로 망명하는 길을 택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63년 9월에 주류성이 함락되었을 때, 백제 귀족들은 "오늘로서 백제의 이름이 끊어졌으니 조상의 무덤도 다시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다"고 외쳤다고 한다.

그 후 나당 연합군의 총공격으로 부흥군은 완전히 무너졌고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난다. 저항하던 흑치상지는 당에 투항하고 항복에 반대하고 끝까지 저항하던 백제장수 지수신을 흑치상지가 직접 공격하여 죽임에 따라 백제 부흥운동은 완전히 끝이 난다.

백강 참패 이후 내부의 위기감이 커진 일본은 665년부터 한반도의 새로운 패권 세력인 신라와 서둘러 국교를 정상화하고 신라와의 교류에도 적극걱으로 나선다. 일본 최초의 율령법인 아스카기요미하라령(飛鳥淨御原令)의 제정이 이루어지면서 율령국가의 건설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이호 율령(701년)의 제정으로 국호를 왜에서 일본으로 바꾸어 신국가의 건설은 일단 완성되었다.

 

 

다이카 개신과 백제 구원군 파견.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