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여행

규슈 (7) 아리타, 조선 도공 이삼평을 도조로 모신 도산신사와 기념비

모산재 2015. 3. 7. 15:26

 

도자기 마을 아리타는 다케오 시의 서쪽 사세보 시의 동쪽, 두 시의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다. 규슈도자문화관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이라 금방 도착한다.

 

 

※ 아리타, 이마리 위치

 

 

 

 

 

해가 기울어지는 늦은 오후, 우리가 탄 버스는 바로 도산신사 앞 대로변에 섰다. 

 

높은 산과 산 사이 좁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아리타 마을은 조용하기만 하다. '도자기의 고향'으로 불리는 아리타는 인구 1만 4천여 명에 불과한 작은 산골 마을이다. 가마만 200여 채라는 아리타, 동서로 가로지르는 길 양쪽으로 600여 도자기 전문점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아리타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자기(磁器)와 인연 없는 평범한 산골이었다. 그릇이라야 낮은 온도에서 구운 질 낮은 도기(陶器) 정도가 생산될 따름이었다. 도기는 자기와 달리 토기보다 다소 발전된 기물로 일본 어디서나 생산되는 그런 그릇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도공들이 이곳에 자리잡으면서 아리타는 세계의 역사 속에 자리잡는 마을이 된다.

 

 

골목 안쪽, 산언덕으로 이어지는 신사 입구가 보인다.

 

 

 

 

 

 

도산 신사는 1655년 이삼평이 세상을 뜬 뒤, 도조(陶祖)를 모시려고 1658년에 '아리타 사라야마 소뵤하치만구(有田皿山宗廟八幡宮)'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1917년 아리타 요업 300주년을 맞이하면서 한국의 도자기를 일본에 전수한 이삼평을 도조(陶祖)로 추앙하고, 도조 이삼평과 나베시마 초대 번주를 신사에 모시게 되었다. 이 때 신사의 이름도 지금의  '도산신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삼평기념비는 주민들과 사가 현의 협조를 받아 세운 것으로, 해마다 5월 4일이면 도조제陶祖祭가 열린다고 한다.

 

 

신사 입구 언덕 위로는 JR 철길이 가로지르고 있다. 하루 몇 차례밖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차가 철길을 건널 때 달려오고 있다.

 

 

 

 

 

 

참도(参道)를 따라 성역임을 나타내는 도리이(鳥居)와 수호상 고마이누(狛犬)상, 도로(燈籠, 석등)가 거듭 나타난다. 왼쪽 언덕 위에 보이는 본전에 이르기까지 계단도 세 번씩 올라야 한다.

 

 

 

 

 

도산신사에 모신 제신 / 이삼평, 오진천황, 나베시마 나오시게

 

 

 

 

 

도산 신사에는 이삼평과 함께 오진천황(応神天皇)과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를 모신다. 오진천황(270~310)은 야요이시대에서 야마토시대로 넘어가던 시기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아들로 270년에 71세에 즉위하여 처음 천황이란 이름을 사용한 전설적인 제15대 왜왕, 나베시마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장수로 참전하여 이삼평 등 조선 도공을 끌고 간 사가번(佐賀藩)의 번주다.

 

 

이삼평은 충청도 금강(공주시 반포면 / 김해설이나 남원설도 있음) 출신으로 나베시마 나오시게 군에 잡혀 일본에 끌려 온 도공으로 그가 살았던 조선의 '금강도(金江島)'의 지명에서 유래한 '가나가에(金江)'라는 성씨를 받고 가네가에 산베에(金江 三兵衛)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 부를 정도로 왜군은 조선의 자기장들과 도자기를 약탈해 갔다. 조선 도공들은 1594년 또는 1596년경에 일본에 끌려가 처음에는 가라쓰(唐津) 근방에 상륙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삼평은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사위이자 가신인 다쿠 야스토시(多久安順)에 의탁하며 살았다. 이삼평은 자기의 원료인 고령토를 찾기 위해 나베시마 가문의 영지인 사가 번내를 전전했고, 마침내 1616년 아리타 동부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양질의 백토광(白土鑛)을 발견하여 가미시라가와(上白川) 덴구다니(天狗谷)에 가마를 지어 일본 첫 백자를 구웠다.

 

 

이삼평은 18명과 함께 이곳에 이사하여 아리타의 새 역사를 열었고, 이후 수많은 도공들이 집결하여 번성을 이루었고 이름조차 없던 두메산골이 도자기 마을 아리타로 나타나게 되었다.

 

 

 

 

 

입을 헹구는 신사의 세면대, 데미즈야(手水舎)

 

 

 

 

다케오 신사처럼 본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드높다.

 

 

 

 

본전으로 들어서는 도리이는 도자기로 만들어 놓았다.

 

 

 

 

도자기로 만든 본전 앞의 고마이누와 도로

 

 

 

 

신사 내부

 

 

 

 

오진천황과 나베시마 나오시게 ?

 

 

 

 

본전 옆의 건물, 무슨 공간일까...?

 

 

 

 

봉헌된 대형 도자기들

 

 

 

 

 

신사 옆을 지나 언덕길을 따라 이삼평기념비로 오른다.

 

 

 

 

 

 

이 당시는 몰랐지만 지도를 보니 저 맞은편 골자기 안쪽에 이삼평 묘지가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1,959년 시라카와(白川) 공동묘지에 '월창정거사(月窓亭居士)'라는 묘비가 발견되면서 바로 이삼평의 무덤으로 확인되었다 한다.

 

 

언덕길에서 내려보이는 아리타 마을

 

 

 

 

 

시간이 넉넉하면 찾아 봤으면 좋을텐데, 여행 일정이 너무 짧다. '창으로 비치는 달빛'을 바라보며 고향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질그릇에 쏟아부으며 달래다 갔을 그의 삶을 떠올려보면서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 우뚝 솟은 기념비로 이어지는 '도조(陶祖)의 언덕'!

 

 

 

 

 

 

그 들머리에 '도산(陶山)'이라는 제목의 작은 시비 하나가 놓여 있다.

 

1918년 니시마츠우라(西松浦) 군수인 가시타 사부로(樫田三郞)가 읊은 시를 1990년에 아리타의 서예가 글씨로 새겨 시비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행서임에도 알아보기 쉽지 않은 글씨. 다음은 다른 데서 한시를 찾아 옮긴 것인데, 풀이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내 식으로 풀이해 보았다. 특히 3행의 풀이가 쉽지 않았는데, 제대로 된 풀이인지 모르겠다.

 

眼底家如櫛    눈 아래 집들은 빗살처럼 늘어섰고
窯煙起脚間    가마 연기는 발 아래에서 퍼지네.
松風自落事    솔바람이 절로 불어내리듯
李祖鎭陶山    도조께서 도산을 지키시네.

 

 

그리고 시비 옆에는 도조 이삼평 비문의 내용이 일문 한글 영문으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원래 비문의 내용 중 넷째줄에 "이 때 공은 우리 군에 매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고 되어 있어 이삼평을 왜군에 적극 협력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어 논란과 갈등이 있었는데, 2005년 이를 "나베시마군에 붙잡혀 길 안내 등의 협력을 명령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고쳐 놓았다.

 

 

 

그리고 이곳 사람들이 모금하여 1990년 한국에 세운 이삼평 기념비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일본자기시조 이삼평공 기념비'

 

 

 

 

 

일본에서는  이삼평을 '아리타도자기의 시조'이자 '일본 요업계의 대은인'으로까지 숭앙하며 신사의 신으로 모시고 한국에 이삼평 기념비까지 세울 정도로 도공과 도자기에 대해 엄청난 열기를 보일 정도이지만, 한국에서는 이삼평이란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별로 없는 듯하다.

 

조선에서는 도공을 천민으로 푸대접하여 그 이름조차 전해지는 사람이 없을 지경인데, 규슈에서 도공들은 사무라이에 못지 않은 대접을 받았고 또 규슈 각지에서는 조선 도공들을 도조로 모시고 그 이름으로 도자기를 세계적 브랜드로 지켜나가고 있다.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도조 이삼평비'는 도조 언덕의 가장 높은 자리에 조성해 놓았다. 

 

 

 

 

 

 

기념비 아래 쌍사자 석등이 독특하여 눈길을 끄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양쪽의 두 동자상과 함께 조잡하게 만들어져 있어 거슬린다. 기증자는 한국도자기문화진흥협회로 되어 있다.

 

 

 

 

 

 

1917년 아리타 도자기 창업 300주년을 기념해서 '도조 이삼평비'가 세워졌고 매년 5월 4일에 도조제가 이곳에서 개최되고 있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삼평은 아리타 류센지(龍泉寺) 장부에 1655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계명은 월창정심거사(月窓浄心居士)였다.

 

이삼평의 묘소는 오랜 세월 잊혀져 있었는데, 1959년 덴구다니 가마 부근에서 이 계명이 새겨진 묘석의 하부 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묘가 '이삼평'의 묘임이 밝혀진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1967년이라고 한다. 비석 어디에도 '이삼평'이라는 이름이나 '카나가에산페에(金ヶ江三兵衛)'라는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月窓浄心居士'라는 이름이 나중에 '이삼평'이 천주교도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불교 법명으로 사용했던 것임이 적혀있는 문서가 발견되면서 밝혀진 것이다.

 

묘석 상부 부분은 찾지 못한 채 지금은 시로카와 묘지에 옮겨져 있다.

 

 

기념비 뒤에서 바라본 아리타 마을 주변 풍경

 

 

 

 

 

 

이삼평 말고도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규슈 지방에서 가마를 연 조선 도공들은 많다. 가고시마 사쓰마 도자기(薩摩燒 )의 박평의(朴平意), 심당길(沈當吉), 심수관(沈壽官), 나가사키 하사미 도자기(波佐見燒)의 이우경(李祐慶) 등 여러 도공들이 제 이름을 걸고 가마를 운영했다 한다. 심수관요는 지금도 한국 이름을 지키며 15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15대 심수관이 썼다는 글 하나가 가슴으로 들어와 찌르르 전율을 일으킨다.

 

 

맹렬히 타는 도가니 속에서도
담담하게 인간은
슬픔을 마음속에 담고 살아야 한다.
피를 따르나 피에 물들지 않고
기술을 따르나 기술에 기대지 않으며
불을 따르나 불에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아리타 도자기의 흥성과 이삼평에 대한 지역민들의 존숭에도 불구하고 이삼평 후손들은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라고 한다. 4대까지 이어지던 이삼평의 가업은 오랜 세월 끊어졌다 최근 13대부터 다시 시작하여 14대손 가나가에 쇼헤이 씨가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 가나가에 씨의 홈페이지 http://toso-lesanpei.com/index.html 

 

 

가나가에 쇼헤이 씨(한국일보 09. 02. 13)

 

 

 

이삼평비를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데미즈야(手水舎) 주변에서 특별히 모신 듯한 독특한 돌덩이 하나와 이삼평을 신사에 도조로 모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인물의 흉상을 발견한다. 

 

 

 

 

 

 

그냥 돌덩이처럼 보이는 석상을 잘 다듬은 기단 위에 모셔 놓았다.

 

그런데 이 돌덩이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1>에서 언급한 '고려신(高麗神)'이라는 신상과 아주 유사하다. 유 교수가 도산신사에 대한 글에서 이 신상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없는 걸 보면 이즈미야마 자석장 모퉁이에 있는 석장신사의 고려신을 이곳에 옮겨 온 것이 아닐까 싶다. 고려신은 조선 도공이나 그 후손들이 세운 자연석 신상이라 한다.

 

 

 

 

 

그리고 그 곁에 있는 인물상의 주인공은 후카가와 로쿠스케(深川六助)...

 

 

 

 

 

아리타 역사 민속 자료관의 후카가와 로쿠스케에 관한 자료

 

 

출처 : http://rekishi.town.arita.saga.jp/download/sarayama/sarayama-0029.pdf

 

 

 

후쿠가와의 흉상 옆에는 도쿠가와 막부 초기의 방랑시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의 하이쿠(俳句) 비가 서 있어 눈길을 끈다.

 

1685년 바쇼가 42세에 썼다는 시는 90여 년 지난 뒤 이곳에 1772년 시비로 섰다. 왜 이곳에 오래된 그의 시비가 서 있는 것인지... 얼떨결에 이곳으로 여행온 여행자는 알지 못한다.

 

돌이끼가 검게 덮고 있어서 새긴 글씨는 알아보기 어렵다. 

 

 

 

 

 

다만 유홍준 선생이 이를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1>에 옮겨 놓은 것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雪切 々      >구름 따라서
人を 休める      사람을 쉬게 하는
月見 かな      달맞이런가

 

 

 

하이쿠(徘句)는 5ㆍ7ㆍ5의 17음절로 구성되는 일본 고유의 짧은 시다. 짧은 시 속에는 계절을 상징하는 단어를 꼭 써야한다.

바쇼는 특히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자의 사상에 감화되어 초암에 은거하며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생활 자체를 예술화시키려고 한 시인이었다. 40세 무렵부터 사망하기까지 10년간 방랑을 하며 대부분의 작품을 썼다. 실제 본 적도 없는 명소를 읊어온 일본 서정시인의 전통에 대항하여 그는 명소를 하나하나 직접 찾아다니며 노래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바쇼는 대상이 주는 순간적 인상의 강렬함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현재화시켰다.

그가 1689년 약 6개월 동안 동북 지방을 여행하고 노래한<오쿠노 호소미치(奥の細道)>는 일본의 대표적인 고전 기행 작품으로 꼽힌다. 그의 시는 자연에 칩거하면서도 자연에 몰입하여 합일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세속적인 해학성과 함께 인간으로서의 고독과 우수가 깃들어 있다. 자연 속에 있으면서도 인간의 이치에 더 관심을 보이고, 여행도 자연에 귀의하기보다는 시간을 초월해 고인들의 정취에 공감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1694년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오사카에서 객사하였다. 

다음은 감각적인 표현이 잘 드러나는 바쇼의 유명한 하이쿠 작품이다.

古池や(후루이케야)     오래된 연못
蛙飛び込む(카와즈코비토무)      개구리 뛰어드는
水の音(미즈노오토)       첨벙 물소리

 

 

 

 

그리고 안쪽으로 서 있는 충혼비 등의 비석들...

 

 

 

 

 

 

 

 

 

만나기로 한 시간이 이미 지났음을 문득 깨닫고, 살펴보지도 못하고 사진 한 장만 대충 찍고 부리나케 신사를 벗어난다. 이삼평묘와 이즈미야마 자석장도 돌아보고 마을 이곳저곳 느긋하게 산책하며 도공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좀 더 가졌으면 좋았을 것을... 모두 버스를 타고 기다리고 있다.

 

 

 

※ 규슈 아리타 마을 안내도

 

 

 

 

 

※ 아리타 도자기

이삼평의 아리타의 초기 자기는 청화백자로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유럽으로 수출되기 시작한다. 나베시마는 조선 도공 7명에게 성(姓)을 하사하고 무사계급과 동등한 대우를 한다. 17세기 초 일본사회는 병농(兵農)분리 정책으로 칼을 녹여 호미를 만들고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급속히 안정을 회복하던 시절로 무사계급이 서서히 몰락하게 되고, 무사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도자기가 생산되는 아리타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조그만 산골에 2,000여 명의 도공들이 들끓고 자기의 질이 떨어지자 1637년 조잡한 도자기를 만드는 일본인 852명이 아리타에서 추방된다. 이 때 백파선(白婆仙)이란 여걸이 등장하는데. 백파선은 김해 도공인 김태도(金泰道)의 부인으로 임란 때 일가 36명을 데리고 다케오(武雄) 영주를 따라 건너왔다고 하며 다케오의 내전(內田)이란 곳에서 도자기를 굽다가 남편이 죽자 아리타로 와서 이삼평과 함께 조선 도공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된다.

이 때부터 가마를 관요(官窯)와 민요(民窯)로 분리시키고 관요의 조선 도공들은 이즈미야마가 있는 광산 골짜기로 집단이주시키는 한편 마을 입구에 초소를 세워 감시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기에 이른다. 조선 도공들은 무사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골짜기 마을에서 유폐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1644년 중국에서 명나라가 멸망하고 중국 도자기 보급로를 잃게 되면서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는 대안으로 아리타로 눈을 돌리게 된다. 1650년 일본 도자기 145개를 처음으로 수출하고 1659년 커피용 도자기 56,700개를 계약한다. 아리타 도자기는 수출항인 이마리(伊万里)항의 이름을 따서 '이마리 자기'로 불리며 나가사키의 데지마에 있던 네덜란드 무역상들은 1730년까지 70여 년간 700만 개의 도자기를 유럽 등지로 실어 보내게 된다.

도자기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아리타의 사가번은 막부를 무너뜨리는 힘이 되고 그 명성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도산신사에서 이삼평과 조선 도공들의 삶을 느껴본 다음 히라도 섬(平戶島)을 향한다. 히라도는 규규의 가장 서북단에 있는 섬으로 나가사키현에 속한다.

 

 

히라도 가까운 해안에 도착할 무렵 이미 해는 산 너머로 숨어들고 있다.

 

 

 

 

 

 

히라도 섬으로 건널 때에는 이미 섬 풍경도 어둠 속에 잠기고 있었다.

 

숙소는 히라도와키가와(平戶脇川)호텔, 일본식 다다미방이다. 다다미(돗자리)가 깔린 방은 윤동주가 "육첩방은 남의 나라"라고 노래했던 낯선 일본 땅임을 떠올리게 한다.

 

 

 

 

 

 

숙소에 배낭을 옮겨 놓자마자 식당으로 가서 가이세키(懐石) 요리로 저녁을 먹는다. 엊저녁 가라츠에서 먹었던 가이세키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차이가 있는 요리, 사케를 곁들이며 먹는 재미가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