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라오스, 베트남

베트남(17) 후에, 모든 종교를 융합한 까오다이교 사원

모산재 2015. 2. 9. 10:34

 

점심식사 후, 카이딘 황제릉을 가기 전에 까오다이교(高臺敎) 사원을 들렀다. 사원은 안프억 식당에서 거리 멀지 않은 신시가지 훙브엉(Hùng Vương) 거리에 있다.

 

가는 길 깃봉이 늘어선 로터리에서 만난 건물. 베트남 국기가 펄럭이고 있어 무슨 관공서일까 했는데 '문화통신센터(Trung tâm Văn hoá Thông tin)'라고 적혀 있다.

 

 

 

 

 

 

까오다이교( Đạo Cao Đài 道高台)는 베트남의 신흥 종교로 세계의 5대 주요 종교(유교, 불교, 기독교, 도교, 이슬람교)를 모두 받아들여서 생겨난 독특한 종교다. 까오다이(高臺)는 '높은 곳'으로 '지고의 존재'를 의미하는 말이다.

 

 

까오다이교의 성격은 1927년 한 강령술 모임에서 까오다이가 이태백의 입을 통해 선포했다는 다음의 메시지에서 잘 나타난다.

 

 

다양한 종교들의 거룩한 가르침들은 오늘날 그릇된 방식으로 실천되고 있다. 옛적의 질서와 평화는 사라져 버렸고, 도덕은 무시되고 있다. 분별이 없고 회의적인 자들에게는 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은 지고의 자리(高臺)에서 우주의 만사과 인간의 모든 운명을 주관하는 한 인격적인 신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과거에는 세상 사람들이 교통수단이 없어 서로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나는 여러 시대에 걸쳐 대도(大道)의 다섯 지파들을 세웠다. 첫째 유교, 둘째 귀신도, 셋째 기독교, 넷째, 도교, 다섯째 불교, 이 종교들은 다양한 민족과 인종들의 풍속과 관습에 기초하여 세워진 것으로, 그 민족과 인종들이 각각의 방식대로 대도를 구현할 것이라고 기대되었다.

오늘날 세상에서 조사되지 않은 부분은 없다. 예전보다 자신에 대해 더욱 잘 알고 있는 인간들은 진정한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 종교들이 매우 나뉘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조화롭게 살지 못한다. 내가 이 모든 종교들을 원래의 상태인 하나로 통일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까오다이교가 모든 종교의 신들이 시대와 공간과 민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 하나의 신이라는 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이로써 기존의 분열되어 왔던 모든 종교를 포용하여 평화로 나아가려는 종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까오다이의 기원은 강신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1917년 프랑스 총독부의 하급관리 응오반찌에우가 강신술회(降神術會)에서 '까오다이(高臺)'의 영(靈)을 만나 자신의 빛을 발하는 한 쪽 눈을 상징으로 나타내도록 지시받았다는 체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중국인 마을에 살던 레반쯩(黎文忠)은 1925년 한 강령술 모임에서 당나라 시인인 이태백(李太白)의 영으로부터 중요한 종교적 사명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 계시받고 까오다이 집단에 가입하여 응오반찌에우와 추종자들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응오반찌에우는 은둔과 명상을 선택하고 레반쯩이 집단을 이끌며 1926년 공식적으로 교단이 조직되고 베트남 남부 떠이닌(Tây Ninh)에 본부를 두었으다. 1935년 팜 콘타크가 제2대 교주가 된 뒤부터 신자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로마 가톨릭과 흡사하게 교황청, 교황, 추기경 등의 조직체계를 운영하며 오늘에 이른다.

 

 

베트남은 사회주의를 겪으며 선교가 불법화되어 있는 등 종교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지만 베트남인들은 대부분 영혼을 믿고 신을 믿는다고 한다. 대부분은 불교(70%)를 믿으며 천주교(10%), 개신교 순으로 신자가 많다고 한다. 유교와 도교, 토속신앙은 주민들의 삶 속에 녹아있다.

 

이런 속에서 신흥 까오다이교의 신자가 300만 명쯤 된다고 한다.

 

 

 

정문이 닫혀 있어서 후문으로 들어가서 안쪽에서 바라본 정문

 

 

 

대도삼기보도(大道三期普度)'라 적혀 있는데, 까오다이의 정식 명칭이라고 한다. 그 아래 큰 글씨는 사원의 정식 명칭이다. 'Thánh Thất Cao Đài Họ Đạo Vĩnh Lợi'

 

 

 

 

까오다이의 정식 명칭인 '대도삼기보도(大道三期普度)'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제 3기 중생들을 구원할 대 종교'라는 의미다. 이전에 상제가 두 번 중생을 구원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5대륙이 서로 떨어져 있어 상제께서 서로 다른 지역에 출현해서 그 지역의 풍습과 관습에 부합한 종교를 세웠다. 이 종교들은 비록 근본이 상제라는 같은 점에서 출발하고 인류 구원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지만 서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관계로 서로 다른 모순들을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옥황께서는 새로운 종교를 세울 것을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까오다이인데 인류를 세번째 구원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종교는 천인합일과 만교일리의 사상으로 단지 삼교통합 뿐 아니라 인간의 심령과 우주의 심령을 융합려고 한다.

 

 

불교적 성격이 드러나는 탑의 卍자 문양과 연꽃대좌

 

 

 

사원의 측면 모습

 

 

 

이슬람의 미나레트를 연상시키는 두 탑, 까오다이 사원의 특징적 양식이다.

 

 

 

 

왼쪽 탑은 여성(까오다이교 최초의 여성 추기경 람 흐엉)을 상징하고, 오른쪽 탑은 남성(최초의 교황 레반쯩)을 상징한다고 한다.

 

2층에 있는 사원 예배실로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 하는데, 여자는 왼쪽 계단으로 남자는 오른쪽 계단으로 가야 한다.

 

 

2층 베란다 예배실 입구, '대도삼기보도(大道三期普度)'라 적혀 있는 깃발

 

 

 

정면에 '대도삼기보도(大道三期普度)(Dai Dao Tam Ky Pho Dao)라 적어 놓았다.

 

 

 

예배실 현관

 

 

 

한자로 적은 '천상천하 박애공평', 프랑스어로 적은 '신과 휴머니티와 사랑과 정의',

까오다이교가 추구하는 이념인 듯...

 

 

 

예배실 내부 모습

 

 

 

 

사원 뒤쪽에 향로와 두 개의 촛대가 놓여 있다. 하루 네 차례 의식을 거행할 때 쓴다.

 

 

 

 

 

앞쪽 커튼 위로는 상제인 까오다이를 지상신(至上神)으로 5대 종교인 유교, 불교, 기독교, 도교, 이슬람교의 상위 신들을 모두 표현하여 놓았다.

 

 

 

 

 

까오다이 신자들은 까오다이 뿐만 아니라 석가모니와 공자와 예수와 노자를 경배하며 마호메트와 관음보살과 여상(강태공)과 관우도 함께 받든다. 관음보살은 땅의 힘을 대표하는 여성화된 보살로 표현되고 있는데, 강태공과 관우가 모셔지는 것은 뜻밖이다. 아마도 민간신앙을 받아들인 듯하다.

 

 

 

 

석가

   강태공   공자   마호메트

  관음보살      예수        관우     

  노자 

 

 

관련 글들을 보니 신해혁명을 이끈 손문, 프랑스의 문호인 빅토르 위고, 베트남의 시인인 짱찐, 나폴레옹, 잔다르크 등도 성자로 인정한다고 되어 있으니 이런 개방성 때문에 신흥 종교로 급부상한 듯하다.

 

 

 

맨 앞 제단 위에는 까오다이의 상징인 커다란 외눈, '지고의 눈'을 모셔 놓았다. 이 외눈은 까오다이를 상징하는 동시에 까오다이와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의식을 행하는 시간에 맞추어 왔으면 좋았을 것을...

 

까오다이교 종교 행사는 오전 6시, 정오, 오후 6시, 자정 등 하루 4차례 열린다고 한다.

 

신도들은 대개 흰 옷을 입는데, 흰옷은 어느 색이든 받아들일 수 있으므로 다양한 종교를 받아들이는 까오다이교를 나타내기 때문이라 한다. 불교를 나타내는 노란색 제복, 도교를 나타내는 파란색 옷, 유교를 상징하는 붉은 옷을 입기도 한다.

 

 

떠이닌 까오다이 사원의 의식 모습(출처 : 구글 검색)

 

 

인도보리수 

 

 

 

 

까오다이의 수행법에는 두 분파로 나누어져 있다. 

 

한 분파는 보편적인 규범의 이행을 강조하는 외교(外敎 exoterism) 분파로 자신과 가족과 사회와 국가와 모든 생명체와 자연에 대한 의무를 완수하고 자연과 식물과 동물과 인간에게 친절을 베풀기를 강조하며 삼강오륜이 귀중한 덕목으로 여겨진다. 다른 하나는 내교(內敎 esoterism) 수행으로 티엔딘(禪定)이라고 부르는 명상수련을 통해 열등한 자아를 점진적으로 없애고 자아 내부의 신성(神性)을 발전시켜 궁극적으로는 까오다이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도덕적인 규범의 이행과 명상이라는 수행법을 내세운 까오다이교에 대해 프랑스 식민당국이 호의적이었고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하였다. 여기에다 시대적인 흐름을 타면서 까오다이의 교세는 급속히 성장한다.

 

프랑스 식민지를 거치면서 베트남의 사원들은 민족해방운동의 거점으로 이용되면서 탄압을 받았다. 그리고 응우옌 왕조는 유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고 봉건주의를 강화한다. 천주교는 프랑스 식민주의 정책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베트남인들의 외면을 받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다수가 신을 믿는 베트남 사람들은 거의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까오다이교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 했을 것이다.

 

 

 

 

※ 호아하오교(和好敎)

 

까오다이교와 함께 베트남 남부지방에서 생겨난 양대 신흥 종교로 발원지인 메콩 강 삼각주 지역을 중심으로 최성기에 200만 명의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1939년 베트남 남부 쩌우독(Chau Doc)지방의 호아하오 촌락의 후인푸소(黄富楚)가 창시하였다.

사원과 승려라는 중재자를 없애고 단순한 형태의 예배를 신봉한다. 주로 예언과 치병활동에 종사하였으며, 후에 남부 일대에 널리 행하여진 불교종파 <보산기향(寶山奇香)>파의 계승권을 잇고, 종교적인 권위와 신앙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박애, 평등, 단결, 협조라는 종교 이념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 종파는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배불, 반미, 반 남베트남 정부의 입장을 관철했으나 반공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고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행 후, 종교활동은 정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