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라오스, 베트남

베트남(18) 후에, 카이딘 황제릉(응릉)

모산재 2015. 2. 10. 18:30

 

카이딘 황제릉(启定陵), 응릉(應陵)은 후에 시내에서 흐엉강을 따라 남쪽으로 10km 떨어진 차우구 언덕에 있다.

 

 

응릉은 비탈진 산 언덕에 남서방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호수를 끼고 있는 민망 황제나 뜨득 황제의 능처럼 음습한 느낌이 없다. 자리만 본다면 우리 나라의 무덤 같은 느낌이 든다. 

 

능역의 규모는 117m×48.5m로 선대 황제들의 능역에 비해 작은 편이다. 선대 황제들의 능은 산과 호수를 능원으로 거느리고 있어 독립된 대공원이 모습을 띠지만, 카이딘 황제의 능역은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건축물로만 채워지면서 규모는 작아졌다.

 

 

※ 카이딘 황제능 안내도

 

 

 

 

카이딘 황제(啓定帝 1885-1925)는 응우옌 왕조 12대 황제, 본명은 응우옌푹투안(阮福昶 Nguyễn Phúc Tuấn)이다. 재위 기간은 1916년부터 1925년까지 9년이다. 첫번째 부인(호앙티꾹)과 두 번째 부인 모두에게서 자식이 없었고, 나중에 뜨꿍이라는 후궁에게서 아들을 얻는데, 이 아들이 카이딘의 뒤를 이어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 황제가 된다. 4명의 비빈과 10명의 후궁을 두었는데, 잠자리에 관심이 없고 게이라는 소문도 있다. 아버지 동카인 황제처럼 병약했고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아버지 동카인 황제가 죽었을 때 네 살인 카이딘은 너무 어려 황제가 될 수 없었고, 죽득 황제의 열 살짜리 아들인 타인타이(Thanh Thai) 황제와 그 아들 주이떤(Duy Tan)이 차례로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두 부자 황제가 식민 통치에 저항하자 추방하고, 1916년 프랑스는 식민 통치에 협조적이었던 동카인의 아들 카이딘을 즉위시킨다.

아버지 동카인처럼 카이딘은 프랑스 통치자들의 인형 노릇을 하며 베트남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 베트남의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 판쩌우찐(潘周楨 1871~1926)은 1922년 '칠점표(七點表)'라는 공개 서한을 통해 "조국을 프랑스에 팔아넘기고 민중들은 프랑스에 착취당하고 있는데, 궁전에서 화려한 생활만 하고 있다."며 카이딘 황제를 맹렿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황제의 잘못으로 인한 귀족들의 권한 남용, 형벌의 불공평, 부도덕한 정도의 사치 등을 지적하고 황제의 하야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카이딘은 1923년 자신의 능을 짓기 위해 베트남 농부에 대한 세금을 올리며 베트남을 경제적 곤궁에 빠뜨렸다. 그리고  판보이쩌우(潘佩珠) 같은 민족주의자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자국에서 추방하거나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한 마디로 카이딘은 베트남인들에게 자신의 안일을 위해 조국을 배신한 더러운 황제로 기억되고 있다. 오죽하면 "카이딘의 유일한 업적은 스스로 만든 자신의 무덤"이라고 비아냥 댈 정도로...

 

 

 

이제 카이딘 황제의 '유일한 업적'을 돌아보기로 하자.

 

 

난간을 용으로 새긴 웅장한 계단과 고딕식 첨탑처럼 솟아 있는 정문, 삼관문(三關門)이 눈길을 끈다.

 

 

삼관문(Cổng Tam quan)

 

 

 

 

카이딘 황제릉은 민망 황제나 뜨득황제의 능과는 양식이 아주 다르다. 1920년부터 1931년까지 무려 10년에 걸쳐 축조된 이 능은 서양 건축 양식을 기본으로 동양적 양식이 장식적으로 결합되었다.

 

카이딘은 자신의 능을 위해 1922년 직접 프랑스를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각국의 장인들을 구해 와서 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공사를 시작한 지 5년만에 40살의 나이로 죽었으니,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것일까...?

 

 

건축물은 콘크리트와 석재를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육중하며 고딕 양식의 건물과 첨탑들로 위엄을 갖추었다. 나중에 볼 것이지만 내부는 색조 유리와 자기로 동양적인 문양을 대단히 섬세하게 장식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다 공간 배치에 있어서 유교적 양식이 반영되고 외벽 곳곳에 유교 경전의 구절들을 새기고 있는 점 등도 주목할 만하다.

 

 

정문을 오르면 배전(拜殿Bái Đình) 자리인 넓은 마당이다. 마당 양쪽으로는 우통사(Hữu Tòng tự), 좌통사(Tả Tòng tự)라는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수복청(守僕廳) 구실을 하는 곳일까...?

 

 

 

그리고 다시 높은 계단 위로 패방 형식의 문과 그 안쪽에 양쪽으로 오벨리스크(Trụ Biểu)를 거느린 비정(碑亭)이 보인다.

 

 

 

  

비정(Nhà Bia)은 뜨득 황제릉의 비정처럼 이층으로 되어 있다.

 

 

 

비정 속에는 아들 바오다이 황제가 세운 카이딘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업적이라곤 이 무덤 건축물밖에 없다고 비아냥 받는 황제, 무슨 공적이 씌어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비석 뒤에는 사람들이 갈겨 놓은 낙서와 욕이 쓰여져 있다고 하는데...

 

 

비정 양쪽으로는 흔히 오벨리스크로 부르는 높다란 기둥이 솟아 있다. 무덤의 구조로 본다면 우리의 망주석에 해당될 터인데 왕실의 위엄을 나타낸다고 하니, 카이딘의 캄플렉스만큼 더 높이 솟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마당 양쪽으로는 무덤을 지키는 문무관, 말, 코끼리 상을 볼 수 있다.

 

 

 

앞줄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한 쌍씩, 뒷줄에는 6기의 호위무사상과 말과 코끼리가 배치돼 있다. 뜨득 황제릉의 석상에 비해서는 훨씬 위엄이 있어 보이는 형상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능묘 전경

 

 

 

 

비정에서 다시 세 개의 계단을 오르면 황제의 유해가 묻혀 있는 능묘가 있는 천정궁(天定宮)에 이른다.

 

 

천정궁(天定宮 Cung Thiên Định)

 

 

 

건물의 정중앙 위쪽에 '天定宮'(천정궁)이라 새겨 놓았다.

 

 

 

기둥에는 용을, 지붕 난간은 귀면상을 중심에 두고 용을 새겨 놓았다. 왕실의 위엄과 벽사의 의미가 표현되었다.

 

 

대칭 구조를 가진 건물, 동서 외벽엔 11자로 맞춘 한문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건물에 새겨진 문장은 모두 11자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쪽 현관 외벽에 새겨진 '爲仁由己'(위인유기)라는 구절.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것을 인용한 것이다. '인(仁)'이 무엇인지를 묻는 안회에게 공자가 대답하기를,

 

 

克己復禮 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감이 인(仁)을 이루는 것이고 하루라도 극기복례하면 세상이 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인을 이루는 것은 자신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겠는가?

 

 

카이딘은 이 구절의 의미를 알고나 있었을까...

 

 

그 아래에 적힌 문장, 뜻을 풀이해 본다.

 

 

四面獻奇觀風景別開宇宙(사면헌기관풍경병개우주)   사방으로 주는 빼어난 풍경은 별천지를 열고

億年鍾旺氣江山長護儲胥(억년종왕기강산장호저서)   억년 세월 좋은 기운 받은 강산은 군영(軍營)을 길이 감싸네.

 

 

 

 

서쪽 현관 외벽에는 '以禮制心'(이례제심)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예로써 마음을 다스리라!" 이는 <서경>에서 재상 중훼(仲虺)가 탕왕에게 군주의 도를 이른 말을 인용한 것이다.

 

 

王懋昭大德 建中于民. 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

왕께서는 힘써 큰 덕을 밝히셔 백성들에게 중심을 세워 주십시오. 의로써 일을 다스리시고, 예로써 마음을 다스려 후세에 너그러움을 남겨 주십시오.

 

 

하지만, 무덤의 주인공의 행적에 비추어 볼 때 '이례제심'이라는 말은 공허함을 넘어 엄청난 반어로 읽힐 뿐이다. 전두환이 총칼로 권력을 쥔 다음 내세웠던 구호가 '정의사회구현'이었지.

 

 

그 아래에 적힌 문장을 풀이해 본다.

 

 

風景無邊萬狀神氣天作合(풍경무변만상신기천작합)    풍경은 끝이 없고 만상의 신령스러운 기운은 절로 생기는데

江山有主千秋福蔭地留餘(강산유주천추복음지유여)    강산은 주인이 있어 천년 복내림으로 땅은 넉넉함으로 머무는구나

 

 

역시 공허한 수식일 뿐이다.

 

 

 

천정궁으로 들어서니 넓은 홀이 열린다. 넓은 홀의 벽과 천정은 화려한 장식으로. . .

 

 

 

홀의 한가운데에 '계성전(啓聖殿)'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는데, 바로 카이딘 황제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공간이다.

 

 

 

제단과 카이딘 영정

 

 

 

 

건축물의 양식이 서양식이라면 계성전 앞의 넓은 홀 내부 장식은 동양적인 문양으로가득하다. 장중한 건축물 외관과 대조되는 섬세한 내부 장식, 이것이 카이딘 황제릉의 건축 미학인 듯하다.

 

 

외부 홀의 화려한 천장. 용과 구름을 표현하였다.

 

 

 

벽은 자기와 유리 모자이크로 병풍의 형식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는데, 그림 자체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선비가의 책거리 그림을 연상시킨다. 문방구나 화병 등 선비들의 여가생활과 관련된 일상적인 소재들을 격조 있는 정물화로 그려낸 듯한 모습이다.

 

 

계성전 입구 좌우 벽 장식

 

 

 

홀의 벽 장식

 

 

 

계성전 내부는 금색 자기와 유리 모자이크 등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색색의 초호화 장식으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 한가운데에 청동에 금박을 입힌 카이딘 황제의 좌상이 있는데, 1920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것으로 실제 카이딘 황제와 같은 크기로 만들어진 등신상(等身像)이다.

 

 

황제의 유해는 바로 이 동상 아래 지하 18m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천정궁의 서쪽 공간은 전시실이다.

 

 

바깥 공간에는 카이딘의 사진들과 프랑스 총독과 찍은 사진들, 그리고 가족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물이 전시된 내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카이딘 동상이 서 있다.

 

 

160cm의 단신, 실제 카이딘의 키와 같은 크기로 제작된 것이라는데, 카이딘 생전 그의 아들인 바오다이에게 집을 지어주고 거기에 조성했던 동상이라고 한다.

 

 

 

내실에는 평소에 식사를 했던 식탁과 찻잔 등 자기들을 비롯해 카이딘이 사용했던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외실에 있는 사진에서 배경을 지우고 화려한 색을 입힌 카이딘 사진

 

 

 

카이딘이 사용했다는 버클. 단신에다 병약한 그의 허리가 22인치였다던가...

 

 

 

 

인간의 욕망이란 얼마나 무상하고 허망한 것인가.

 

카이딘은 자신을 진정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로 생각했을까. 자신이 프랑스 총독의 '인형'에 불과한 존재임을, 그래서 베트남 민중의 공적(公敵)이 된 존재임을 알고 있었을까....

 

 

여행을 통하여 다시 나를 돌아보게 된다. 자신이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무게만큼만 정직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 후에의 황제능 위치

 

 

 

 

 

※ 뜨득 황제 -& 카이딘 황제 시기의 응우옌 왕조 개관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1851년)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영국과 연합하여 제2차 아편 전쟁(1858년~60년)을 치르는 한편 인도차이나에 프랑스 식민지를 구축하기 위한 단계들을 밟아 나갔다.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베트남의 박해에 응징하고 베트남 조정에 프랑스군의 베트남 주둔을 강요하고자 전쟁의 개시를 승인(1858년)하였다.

프랑스 해군은 다낭과 사이공을 점령하고 1861년에는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하였다. 1862년 뜨득 황제는 항복하고 사이공 조약을 통해 남부 베트남의 3개 주를 할양하고 프랑스의 전함의 메콩강 자유항를 허용하며 베트남의 외교 교섭 시 프랑스 황제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등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1874년 제2차 사이공조약에 따라 남부 6개 성(省)을 프랑스에 할양한다.

1883년 뜨득 황제의 사후 죽득 황제, 히엡호아 황제가 연이어 즉위하자마자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하고 뒤를 이은 키엔푹 황제도 8개월만에 죽는다. 승계를 둘러싼 혼란을 틈타 프랑스의 공격을 받고 1884년 후에조약으로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다. 키엔푹에 이어 즉위한 그의 동생 함응이는 1885년 후에를 탈출하여 프랑스에 항전하자 프랑스는 그의 동생 동카인을 옹립한다. 이어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두고 청불전쟁이 일어나고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가 되고 만다. 저항하던 함응이 황제는 1888년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알제리에 유배된다. 1889년 죽득황제의 아들인 타인타이 황제가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지만, 1907년 프랑스의 압력으로 퇴위하여 아들인 주이떤 황제에게 양위를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군의 방위력이 약해지자 1916년 판보이쩌우가 조직한 베트남 광복회의 반란 계획에 호응하여 후에 왕궁을 탈출했지만 체포되어 주이떤 황제는 아버지 타이타인과 함께 아프리카의 프랑스령 레위니옹 섬에 유배 당하고 프랑스는 동카인의 아들 카이딘 황제를 옹립한다.

1925년 카이딘 황제 사후 프랑스 유학 중이던 바오다이 황제가 귀국하여 즉위했다. 그가 즉위할 때 황제의 사법, 행정권이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바오다이 황제는 즉위 후 다시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1932년에 귀국해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하여 입헌적인 정치개혁을 목표로 했지만 보수파의 저항에 의해 포기하고 말았다.

 

 

※ 판쩌우찐(潘周楨 1872~1926)

 

판보이쩌우(潘佩珠)와 더불어 1900년대 초기 20여 년 동안 베트남의 민족주의운동을 주도하고, 베트남사회의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의 제안은 당시 베트남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는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로 진보적 사설교육기관인 동경의숙(東京義塾)이 설립되었다.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이나 량치차오(梁啓超) 같은 중국 진보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베트남사회의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 한편으로는 군주제의 철폐에 적극적이었는데,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전 예부상서라는 직책에 있으면서 조정 내부의 부패에 실망한 때문이었다. 프랑스 식민당국의 협력을 얻어 베트남의 구제도를 타파하고 근대화를 모색하려는 의도에서 인재등용, 법령개혁, 교육시설의 확충, 상공업교육의 장려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프랑스 총독에게 제안하였다.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당시 베트남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는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로 진보적 사설교육기관인 동경의숙(東京義塾)을 설립하게 된다.

1908년 베트남 중부지방에서 항세운동(抗稅運動)에 적극 가담하였기 때문에 뿔로꼰도르에 유배되었다가, 프랑스 인권단체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파리로 갔다. 그곳에서 여러 잡지에 기고함으로써 프랑스 식민당국의 무자비한 탄압을 통렬히 비난하면서 생활하였다. 1925년 고국으로 돌아온 뒤, 전과 마찬가지로 군주제의 철폐와 서구적 가치의식의 수용을 계속 주장하고 다니다가 이듬해 죽었다.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