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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16) 후에, 그윽하고 아름다운 능원 뜨득황제릉(겸릉)

모산재 2015. 2. 7. 22:48

 

후에 황성을 돌아보고 난 다음 뜨득 황제(嗣德帝)의 능묘인 겸릉(謙陵 Khiêm Lăng)으로 향한다.

 

 

응우옌 왕조의 황제릉은 거의 대부분 후에시 남서쪽 흐엉강의 상류 지역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뜨득릉(嗣德陵)이라 부르는 겸릉은 후에 황성에서 남서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반니엔(Van Nien)산 언덕에 있다. 겸릉은 민망 황제릉과 함께 가장 아름답고 장대한 능으로 꼽힌다.

 

 

 

겸릉으로 들어가는 정문, 무겸문(務謙門). 후에 황성의 문 양식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응우옌 왕조(阮王朝) 4대 황제 뜨득황제의 휘는 응우옌푹티(阮福時). 3대 황제 티에우찌(Thiệu Trị 紹治)의 둘째 아들로 형을 제치고 1847년 왕위에 올랐다. 역대 13명의 황제들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35년(1848~1883)을 통치하였다.&

 

뜨득은 키가 153cm밖에 되지 않는 단신이었지만 연박(淵博 : 아는 것이 깊고 넓음)하고 낭만적 기질이 강했다고 하는데, 겸릉에는 이런 그의 모습이 잘 반영되어 있다.

 

 

원래 능은 부모를 위해 자식이 짓는 것이 관례였지만 뜨득은 전립선 질환으로 103명의 후궁을 두고서도 자식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뜨득 황제는 스스로 자신의 능을 설계해야 했는데,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그는 황궁을 벗어나 생활할 수 있는 화려하고 정교한 행궁을 짓는다. 1864년에서 1867년까지 만 3년에 걸쳐 3천여 명의 인원을 투입해 나중 자신의 능묘가 될 능원을 완성하였다. 

 

 

 

 

정문을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아름다운 연못이 나타난다.

 

 

 

 

 

 

겸궁은 원래 행궁의 성격으로 지었는데, 처음의 이름은 '만년기(萬年基 Vạn Niên Cơ)'였다고 한다.

 

뜨득은 이곳에서 오래 머물며 산책, 낚시, 사냥을 하고 사색을 즐기며 4천 편의 산문과 600편의 시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만년기를 건설하는 데 경제력과 노동력 동원이 컸고 1986년 이에 반발하는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를 진압하고 난 뒤 뜨득은 이름을 겸궁(謙宮 Khiêm Cung)으로 바꾸었다. 뜨득 황제는 '겸손'을 깨달은 것일까? 그리고 1883년 뜨득 황제가 죽은 뒤 이름은 겸릉(謙陵)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겸릉의 거의 모든 건축물에는 '겸(謙 Khiêm)이란 글자가 들어 있다.

 

 

 

아름다운 호수의 이름은 르우키엠 호수(Hồ Lưu Khiêm).

 

 

 

 

호수 속의 작은 섬을 띤키엠(Đảo Tịnh Khiêm)이라 했다는데, 아마도 '고요한 겸손의 섬'이란 뜻을 나타낸 '정겸도(靜謙島)'의 베트남어이지 싶다.

 

건너편 호숫가에 보이는 전각의 이름은 충겸사(冲謙榭 Xung Kiêm Tạ). 뜨득 황제가 황후와 후궁들과 차를 마시고 시를 쓰며 즐겼던 곳이라 한다. 그리고 섬으로 건너가는 곳에 계단식으로 지은 유겸사(愈謙榭 Dũ Khiêm Tạ)라는 정자가 있어 황제가 낚시를 즐겼던 곳이라 한다. 두 건물은 1996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호수 입구에서 왼쪽 계단으로 오르면 문이 하나 보이고, 거기서 지나치면 다시 높은 언덕 위에 높은 담이 두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낮은 곳의 문을 들어서면 드넓은 폐허가 나타난다. 오랜 시간 관리가 거의 안 되고 방치된 풍경, 건물은 퇴락하고 음습한 기운이 감돈다.

 

후궁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는데 건물 내부에는 석관 비슷해 보이는 것들이 늘어서 있는데, 정말로 무덤인지 아니면 사당인지 잘 모르겠다. 황궁의 부귀영화, 흥망성쇠가 참으로 덧없이 느껴진다.

 

 

 

 

 

 

그 뒤편으로는 넓은 정원이 있고 역시 무너진 건물들이 곳곳에 늘어서 있다. 후궁들의 거처가 있었던 공간이지 않을까 싶은데, 후궁들을 위한 사당은 Chi Khiêm이고 Tri Khiem과 Y Khiem은 후궁들의 숙소라고 한다.

 

 

 

 

문을 되나와 담장으로 둘러싸인 높은 언덕으로 향한다. 바로 이곳이 뜨득황제의 행궁인 겸궁(謙宮Khiêm Cung)이다.

 

 

 

 

 

겸궁의 넓은 정원이 나타나는데, 정문인 겸궁문은 공사중이다. 이 공간은 뜨득 왕의 생전에는 행궁이었으나, 지금은 뜨득 왕과 부인 그리고 어머니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되었다.

 

겸궁의 전각은 ㅁ자 형태로 되어 있다. 앞뒤로 화겸전(和謙殿)과 양겸전(良謙殿)이 두 전각의 좌우로 명경당(鳴謙堂)과 온겸당(溫謙堂)이 있다.

 

 

 

맨 앞에 보이는 황금색 지붕집이 화겸전(Điện Hòa Khiêm)이다.

 

 

 

 

화겸전은 뜨득 황제의 행궁 집무실이었던 곳, 지금은 뜨득 황제와 황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이다.

 

 

 

화겸전에서 양겸전 사이에 명겸당(鳴謙堂 Minh Khiêm))이 있다.

 

 

 

 

명겸당은 궁중 예술의 공연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베트남에 보존되어온 가장 오래된 극장인 셈이다. 한가운데에는 단신인 뜨득 황제가 앉은 화려한 의자와 가마가 놓여 있다. 의자와 가마에 앉을 수 있는 티켓을 파는 것인지 티켓을 사지 않았으면 앉지 말라는 안내판이 놓여 있다.

 

 

 

 

화겸전 뒤에 양겸전(良謙殿 Điện Lương Khiêm)이 있다. 예전엔 뜨득 황제의 침전이었던 곳으로 현재는 황제의 어머니(뜨즈慈愈 황태후)의 사당이 되었다.

 

 

 

 

'어제(御製)'라고 적혀 있는 액자. 뜨득황제의 글일까...?

 

 

 

 

그런데 한쪽에는 위패가 많다. 누구를 또 모시는 걸까...

 

 

 

 

명겸전과 마주보는 곳에는 온겸당(溫謙堂 Ôn Khiêm)이 있는데, 이곳에는 어용 물품을 보관하고 있다.

 

 

온겸전에서 바라본 안마당 전경. 맞은편 건물이 명겸당, 오른쪽은 화겸전, 왼쪽은 양겸전

 

 

 

양겸전과 명겸당

 

 

 

새로 짓는 겸궁의 정문인 겸궁문. 앞에 걸린 사진은 이전 겸궁문의 모습

 

 

 

 

※ 겸릉(뜨득황제릉) 안내도

 

 

 

 

 

 

뜨득 황제의 능묘, 겸릉은 겸궁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르우키엠 호수의 물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 능묘로 이르는 길은 호젓하고 아름다운 산책길로 손색이 없다. 

 

 

 

 

 

겸릉 입구

 

 

 

겸릉 평면도

 

 

 

 

능묘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우뚝 솟은 비전(碑殿)이 보이고, 그 앞에는 코끼리와 말, 그리고 문·무인 석상이 양쪽으로 도열하고 있다. 

 

키가 153Cm 단신이라 자신보다 키가 큰 사람을 인재로 등용하지 않았다고 하는 뜨득 황제, 그래서인지 문·무인 석상도 유난히 키가 작다.

 

 

 

 

 

비정(碑亭)은 이층의 석조 건축물인데 그 안에는 뜨득황제의 공적비가 들어 있다. 비전 양쪽에는 오벨리스크라 불리는 방형첨탑이 서 있는데 황제의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비정 속의 비석은 뜨득 황제 스스로 비문을 썼다고 하는데, 자신의 업적만이 아니라 자신의 과오까지 기록해 두었다 한다.

 

 

 

 

그런데 이 비석은 무게가 20톤이나 된다고 하는데, 약 500km나 떨어진 하노이 부근의 타인호아(Thanh Hoa)에서 무려 4년이나 걸려서 운반해 왔다고 한다.

 

 

 

 

 

비정 뒤에는 띠에우키엠이라는 이름의 반달형 연못을 조성해 놓았고 그 뒤로 능묘 문이 우뚝 솟아 있다.

 

 

 

 

 

능묘 문으로오르는 계단

 

 

 

능묘문

 

 

 

 

능묘 문을 지나면 석곽묘를 두르고 있는 담장이 보인다.

 

그런데 능묘가 보이지 않게 담장 출입구 앞에는 가림벽을 조성해 놓았다. 

 

 

 

 

 

능묘 뒤편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눈길을 끈다. 열대에 가까운 지역임에도 더운 기후를 싫어하는 침엽수림인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솔잎이 긴 운남송과 비슷한 소나무다.

 

 

가림벽을 돌아들어서면 바로 뜨득 황제의 석곽 능묘가 모습을 드러낸다. 

 

 

 

 

 

만 35세의 치세,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뜨득 황제의 무덤. 이곳에 이르는 길은 화려하고 대단했지만, 석곽묘는 왠지 모를 무상감만 안겨준다.

 

 

 

 

 

그런데, 엄청난 경제와 노동력을 소모하면서 만든 이 무덤 속에 정작 뜨득 황제의 시신이 없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다른 곳에 묻혀 있다는 소문이 무성한데, 그 무덤을 만드는 데 참여 했던 인부 200여 명은 비밀 유지를 위하여 죽임을 당했다 한다. 시를 썼다는 뜨득황제가 진시황과 다름없는 비정한 멘탈의 소유자였던가...

 

 

 

 

※ 응우옌 왕조(阮王朝)와 뜨득 황제

뜨득황제가 집권하던 시기(1848~1883)는 19세기 후반으로 인도차이나에 선교사들이 들어오고 뒤를 이어 프랑스 제국주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시기였다.

왕조(黎王朝)를 멸망시킨 떠이선당(西山黨)의 내분을 틈타 국내를 통일하고 황제가 된 지아롱황제를 이어 민망황제(1820∼41)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하며 베트남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갖는 전제군주국가를 이룩하였다. 그 뒤를 이은 티에우찌황제는 민망황제의 정치를 그대로 계승하였으나, 뜨득황제에 이르러 프랑스의 침략이 노골화하면서 기독교를 탄압하고 쇄국정책을 고수한다.

하지만 1858년 프랑스-스페인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1862년 제1차 사이공조약으로 프랑스 식민지가 되는 단초가 되었고 ,1874년 제2차 사이공조약에 따라 남부 6개 성(省)을 프랑스에 할양하여야 했다. 1983년 후사가 없는 뜨득제의 사후 3명의 양자가 3일만에 폐위되거나 독살되는 등 승계를 둘러싼 혼란을 틈타 프랑스의 공격을 받고 1884년 후에조약으로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어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두고 청불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베트남은 188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연방의 일부로 식민지가 되고 만다.

 

 

 

 

뜨득 황제의 능묘 안쪽에는 레티엔아인(Lệ Thiên Anh 儷天英) 황후의 능묘가 자리잡고 있다. 

 

 

 

 

 

황제능보다 규모가 작지만 비슷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으며 아담하다. 

 

 

 

 

이 능도 역시 아름다운 소나무숲에 둘러싸여 있다.

 

 

 

 

 

 

레티엔아인 황후 능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뜨득 황제의 양자로 응우옌 왕조의 7대 황제(1883-1884)에 오른 끼엔푹(Kiến Phúc 建福帝)의 사당과 능묘가 자리잡고 있다.

 

 

끼엔푹 황제를 모신 사당의 이름은 집겸전(執謙殿 Chấp Khiêm điện)

 

 

 

 

 

끼엔푹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지만 불과 8개월만에 사망한다.

 

1883년, 103명의 후궁을 두고도 자식을 두지 못한 뜨득 황제가 사망하면서 왕실은 승계를 둘러싸고 큰 혼란에 빠진다. 이 시기는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가 노골화되던 시기!

 

뜨득의 네번째 동생의 아들로 5대 황제에 오른 죽득(育德 Dục Đức)은 즉위 3일만에 불경과 방탕을 이유로 폐위되고, 히엡호아(協和 Hiệp Hoà)가 옹립되었으나 그도 중신들에 의해 독살되었으며 그 다음에 즉위한 끼엔푹(建福)도 8개월만에 죽고 만다.;

 

 

 

 

왕실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프랑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베트남을 삼분하여 직접 지배하에 넣고,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의 보호국으로서 명맥을 유지하지만 급격한 식민지화를 겪는다.

 

끼엔푹에 이어 그의 동생인 함응이(咸宜 Hàm Nghi)가 14세에 즉위하였지만, 이듬해 후에를 탈출하여 대 프랑스 항전에 나서는 사태가 이어지자 프랑스는 즉시 형인 동카인(同慶 Đồng Khánh)을 즉위시킨다. 1888년 함응이는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알제리로 유배 당하고, 동카인 이후의 황제들은 명맥만 유지하며 실권 없는 꼭두각시 역할을 했을 뿐이다.

 

 

 

 

집겸전의 오른쪽 숲 사이로 보이는 끼엔푹의 능묘인 배릉(陪陵 Bồi Lăng) 건축물들을 바라보면서 르우키엠 호수 쪽으로 내려가는 길로 접어든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겸릉

 

 

 

 

※ 응우웬 왕조 황제릉 위치도

 

 

 

 

 

뜨득황제의 겸릉을 돌아본 다음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다시 후에 시내로 향한다.

 

 

도중 차창 밖으로 보이는 베트남의 공동묘지 풍경

 

 

 

 

 

여행자 거리에 있는 안 프억(AN PHUOC) 식당

 

 

 

 

 

현지식 점심식사라는데, 여행사 안내문에는 베트남식 돼지꼬치구이와 월남쌈요리, 게살스프 요리가 유명하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뭘 먹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