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라오스, 베트남

베트남(12) 후에, 티엔무 사원과 틱꽝득 스님의 항미 소신공양

모산재 2015. 2. 1. 23:42

 

후에의 티엔무 사원 앞에 도착했을 때는 흐엉강(香江)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티엔무 사원(Chùa Thiên Mụ)은 후에 시내에서 4km 서쪽, 아름다운 흐엉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후에에서 가장 유서 깊고 중요한 불교사원으로, 베트남 중남부 명문가이자 왕가인 응우옌 왕조의 창건과 관련된 설화를 지니고 있고, 무엇보다도 베트남 전쟁 당시 부패한 독재정권에 항의해 사이공 미대사관 앞에서 소신공양함으로써 전 세계를 충격 속에 빠뜨리고 반전운동의 불길을 당기게 한 틱꽝득 스님이 수행했던 절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원이다.

 

 

흐엉강변의 주차장에서 티엔무 사원으로 진입하는 길

 

 

 

 

사원의 일주문 역할을 하고 있는 네 개의 기둥, 흐엉강에서 계속 이어지는 계단 위로 티엔무 사원의 상징인 팔각 7층탑, 복연탑(福緣塔)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복연탑 앞에서 돌아본 풍경. 앞으로 흐엉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탑은 플루메리아 나무에 감싸여 푸른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다. 높이 21m의 8각 7층 전탑으로 1844년 응우옌 왕조 3대 황제 티에우찌(紹治 1841-1847) 때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탑은 후에에서뿐만 아니라 베트남을 대표하는 건축물의 하나로 꼽힌다. 우리에겐 한자어 이름인 '복연탑(福緣塔)'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베트남 식으로 읽으면' 탑프억유옌(Tháp Phước Duyên)'이다. 처음 이름은 '자인탑(慈仁塔 Tháp Tư Nhan)'이었다고 한다.

 

각 층마다 불상을 모셨는데 원래 불상은 전쟁 등 혼란을 겪으며 모두 도난 당하고 새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문이 잠겨져 있는데, 석탄일에만 개방한다고 한다.

 

 

 

복연탑 양 옆으로는 종각과 비각이 자리잡고 있다.

 

오른쪽 비각은 1715년에 지은 것으로 그 속에는 커다란 거북석상 위에 2.5m 높이의 비석을 세워 놓았다. 비석에는 티엔무 사원이 베트남 불교 선양에 공헌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거북 머리를 만지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속설...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머리를 만지고 있어 사진 한 장 얻는 데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왼쪽의 종각에는 베트남 국보의 하나인 범종을 모셔 놓았다. 범종의 무게는 2톤으로 종소리가 십 리나 떨어져 있는 후에 시내에까지 은은하게 들린다고 한다.

 

 

 

이 범종은 많은 전각을 짓는 등 티엔무 사원의 규모를 확장한 국왕 응우옌푹주(阮福淍 1691-1725)가 1710년 주조하였으며 '대홍종(大紅鐘)'이라 불렀다.

 

 

복연탑 뒤의 비석. 복연탑과 티엔무 사원에 대한 비문인 듯하다.

 

 

 

 

 

복연탑을 지나면 본전이 있는 법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법당으로 들어서는 삼문은 천왕문에 해당할 법한데, 우리의 천왕문과는 다르다. 삼문에는 각각 양쪽 벽에 높은 부조로 된 신장상이 서 있어 모두 여섯이니 4천왕은 아니다.

 

 

 

그리고 중앙문 위에는 바깥문 벽상에는 '靈姥寺(영모사)', 양쪽 외문 벽상에는 '大慈悲(대자비)', '大智慧(대지혜)'라는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 우주의 원리인 '공성(空性)'을 깨닫는 것이 지혜요 생명이 있는 것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자비인 것이니, 이 두 가지 덕목이야말로 불교 수행자들이 도달하려고 하는 궁극일 것이다. 

 

 

그런데 사원의 이름이 한자로 '영모사(靈姥寺)'로 되어 있다.

 

 

 

'영모사'는 '신령스런 할머니의 사원'이라는 뜻으로 베트남어로는 쭈어 린무(Chùa  Linh Mụ)일 터. 그런데 왜 티엔무(Thiên Mụ)일까? '티엔무' 사원의 한자어 이름은 천모사(天姥寺)! '영모사'는 나중에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티엔무사원은 1601년에 건립되었다. 사원 앞을 흐르는 강물은 용이 서려 있는 듯한 형세요 사원 뒤의 봉우리는 용틀임하는 듯한 기세를 지닌 명당에 사원이 서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지금부터 4백 수십 년 전 어느 날 붉은 저고리와 푸른색 치마를 입은 신령스런 여인(Thien Mu, 天姥)이 지금의 사원 언덕에 나타나, 주민들에게 "군주가 나라의 번영을 위해 이곳에 불교사원을 지을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것을 전해들은 이곳의 통치자가 '신성한 여인'을 위한 사원을 건축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이 통치자가 바로 응우옌호앙(阮潢 1558-1612)이다. 레왕조(黎朝)의 중앙 권력투쟁에서 벗어나 위에 지방 통치를 위임 받고 후에에 와 있던 응우옌호앙은 베트남 남부를 장악해 지방정권인 응우옌 씨의 꽝남국 시조가 된 인물이며, 19세기 베트남의 주인이 된 응우옌 왕조(1802~1945년)를 창시한 자롱 황제 응우옌푹아인(阮福映)은 그의 후손이다.

 

 

1601년에 응우옌호앙 때 세워진 티엔무사원은 응우옌푹주(阮福淍 1691-1725) 시기에 규모가 커졌지만 17~18세기 타이선당 내전 중 파괴되었다 1815년 중수되었다.

 

이 사원은 응우옌 왕조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어 황실에서 관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넓은 정원을 지나 길게 늘어선 본전이 보인다. 네이버 사전엔 본전을 '다이훈 사'라고 칭하였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삼문 가까운 법당 마당 양쪽 구석에는 역시 신장상이 셋씩 모셔져 있다.

 

 

 

 

불교 사원에서 인물도 낯설고 여섯이라는 숫자도 참으로 낯설다. 왜 여섯일까?

 

 

 

본전에서 돌아본 정원의 모습. 삼문 위로 복연탑이 보인다.

 

 

 

 

대형 향로를 정면에 둔 법당.

 

삼존불상 바로 앞에는 거대한 몸집의 포대화상이 지키고 있는 배치, 베트남의 사찰은 다 그런 모습인가보다.

 

법당의 불상들은 모두 유리벽으로 밀봉해 놓아 모습을 또렷이 보기 힘들다.

 

 

 

삼존불

 

 

 

 

법당을 나와 뒤편 정원길로 접어드는 곳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다.

 

그곳은 바로 1963년 충격의 소신 공양으로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며 전율시킨 틱꽝득(釋廣德 1897~1963) 스님이 사이공으로 타고 갔던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다.

 

 

 

 

소신공양 현장의 배경이 되었던 하늘색 오스틴 자동차.

그 위로는 틱꽝득 스님의 모습과 타지 않은 심장, 뒤로는 분신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걸려 있다.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오딘지엠(吳廷琰)은 프랑스 식민 지배에 협조한 반민족적 인사로 극도로 부패하였고 천주교인으로서 불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당시 티엔무 사원의 주지로 수행중이었던 틱꽝득 스님은 오스틴 자동차를 타고 사이공까지 2천리 길을 달려가서 미대사관 앞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지며보는 가운데 기름을 온 몸에 끼얹고 가부좌를 튼 채 분신하였다. 1963년 6월 11일의 일이다. 

 

화염 속에서도 한 치의 표정도 일그러짐 없이 정좌 자세로 죽음에 이르는 틱꽝득 스님의 소신 공양 광경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남트남 대통령 응오딘지엠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천주교인인 쩐레수언(陳麗春, 1924~2011)은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님의 죽음을 "땡중의 바베큐 쇼를 보고 박수쳤다"라는 망언을 하여 베트남 국민과 전 세계인의 공분을 샀음은 물론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을 분노하게 하여 등 들리게 만들었고, "드래곤 레이디"라는 악명을 얻었다.

 

'마담 누(Madame Nhu)'로 불려지던 쩐레수언은 응오딘지엠의 제수로, 응오딘지엠이 독신이었기 때문에 가문회의를 통해 영부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쩐레수언은 1945년 공산주의자에 의해 친정 오빠 두 명이 살해당하면서 극단적인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하지만 6 개월 뒤, 1963년 11월 즈엉반민 장군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너지고 응오딘지엠과 동생 응오진누는 함께 살해되었다. 남편을 잃은 쩐레수언은 정처없는 망명생활로 전전하다 3년 전 이탈리아의 어느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차량이 전시된 건물 앞에는 스님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그의 사후에 남은 심장 사진을 걸어두고 있다.

 

 

 

사건 뒤에 스님의 유해는 소각로에 옮겨져 화장되었는데 6시간이나 태워졌는데도 스님의 심장이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다시 두 시간을 더 태웠지만 끝내 심장은 타지 않았고 외신은 '영원의 심장'이라는 기사를 전세계에 타전했다.

 

 

 

충격적인 소신공양 사건과는 달리 법당 후원은 호젓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사찰의 정원은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인위적으로 꾸며졌음에도 과도하지 않고 자연스러워 편안하다.

 

 

 

 

무슨 건물일까...

 

 

 

나무에 기생하며 자라는 난

 

 

 

 

티엔무 사원은 현재 동승들의 학교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강당이나 교실로 사용되고 있는 듯한 전각 뒷마당에서 청소년의 나이로 보이는 스님들이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어울려 미니 축구 경기로 하고 있다.

 

 

 

 

사원 가장 뒤쪽에 보이는 육층 석탑.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어느 자료를 보니 티엔무 사원의 저명한 주지라는 석돈후(釋敦厚) 화상의 묘탑이라고 써 놓았다. 이 분이 누군지는 알 길이 없다. 어떤 이가 틱꽝득 스님이라고 했는데, 글쎄...

 

 

 

 

우리의 가이드는 다시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서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후딱 제 갈 길로 떠나버리는 날랜 가이드.

 

 

 

다시 정문으로 나와 강가로 나서니 흐엉강이 황혼에 잠겼다.

 

 

 

 

흐엉강 유람선은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주차장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는 일행을 만나고 버스는 출발한다. 

 

 

흐엉강을 건너고...

 

 

 

 

서울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된장찌개에 돼지고기 상추쌈을 먹었던가... 

 

 

 

 

그리고 후에 시가지 남쪽 외곽, 카이딘 왕릉 가는 길에 있는 한적한 숙소, 필그리미지 빌리지에서 배낭을 푼다.

 

 

 

 

9시 뉴스... 한국 방송이 실시간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모두 눈과 귀를 거슬리게 하는 소식들이다.

 

 

 

 

야자수와 열대 나무들이 숲을 이룬, 공원처럼 조성한 리조트 형식의 5성급 호텔. 휴양 호텔로서는 최고인데, 시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늘어지게 많은 자유 시간에 시내 가볼 만한 곳을 구경할 수 없는 점이 많이 아쉽다.

 

 

맥주라도 한 잔 해야지 싶어 호텔 밖으로 나섰으나 시골 거리는 그냥 깜깜하다.

 

 

호텔 바로 앞에 구멍가게가 있어서 들어갔더니 어려 보이는 처녀가 맞이한다. 짧지만 영어가 통해 안주가 되느냐 물었더니 안 되지만 계란 프라이는 해주겠단다. 정성스럽게 야채까지 다져 넣어서 계란말이처럼 만들어온 짧조름한 안주에 3.3.3 맥주, 타이거 맥주 등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스물 정도로 봤는데 스물 여섯이란다. 나중 부근에 산다는 결혼한 언니까지 와서 말동무가 되어 더욱 재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다시 호텔로 들어오는 길에 프런트 옆 카페에서 칵테일을 한 잔 더 마신다.

 

거기서 숙소로 들어오는 길, 혼자 칵테일을 마시고 있던 한 여성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들어오다 보니 보름달이 환하다. 야자수 사이로 보름달을 바라보고 있는데 다가오고 있는 여성, 아까 그 여성이다. 손을 흔들며 다가온 그 여성은 자신이 일본인이며 이 호텔의 총지배인이라 소개한다. 이렇게 해서 후에를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며 아는 척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름은 다음 글에서 소개하기로...

 

 

 

 

※ 후에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