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라오스, 베트남

베트남(10) 다낭 미케해변, 영응사 해수관음상

모산재 2015. 1. 29. 11:38

 

오행산을 돌아본 다음 투어버스는 손짜반도의 또다른 영응사와 해수관음상으로 향한다.

 

 

다낭의 미케(Mỹ Khê)해변으로부터 오행산 부근의 논느억(Non Nước)해변을 지나 호이안의 끄어다이(Cửa Đại)해변에 이르는 30여 km에 이르는 800리 백사장은 다낭을 세계적인 휴양도시로 만들었다. 그런데 이 3대 해변은 기나긴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모두 미군 전용 휴양지나 다름없었던 곳. 전쟁의 포화가 그친 지금 이 해변은 세계인들의 낭만적인 여행지로 각광 받고 있다.

 

 

차창 밖으로는 어제 왕복했던 풍경들이 익숙하게 스쳐 지나간다.

 

논느억 해변에는 하이야트 레전시 등 고급 리조트들이 즐비하다. 셔터를 누르다보니 어제 담았던 크라운플라자가 또 잡혔다.

 

 

 

 

 

 

다낭 시내에서 가까운 미케해변으로 접어들자, 시내와 해변 가까운 곳에 호텔이 많은 탓이라 리조트 풍경은 사라지고 이렇게 풀로 엮은 친환경 파라솔들이 해변 풍경을 이룬다.

 

 

 

 

 

 

지도를 보니 끄어다이해변으로부터 미케해변까지 기나긴 이 해변길의 이름은 보응우옌잡(Võ Nguyên Giáp)이다.

 

잡 장군은 호치민 다음 가는 베트남 독립운동사의 영웅, 바로 이곳 다낭 출신으로 재작년에 102세로 돌아가신 분이다..

 

 

●보응우옌잡(武元甲 1911~2013)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립과 동시에 입당하여 1930년대 말부터 1940년까지 중국에 가서 호치민(胡志明)의 지도 하에서 활동하였다. 베트민을 결성하고 여러 성에 혁명세력의 근거지를 만들어 항일 게릴라부대를 지도했다. 1945년 독립 후 국방장관이 되어 1954년 프랑스군이 진격해오자 해방군 총사령관으로 디엔비엔푸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다. 구정 대공세로 베트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1975년 베트남 전쟁 종료 뒤 통일 베트남의 부총리, 국방장관을 겸했으며, 1979년 20만 중국군의 침공에 10만 예비군으로 격퇴하였다. 1991년까지 베트남 전쟁 도당시 매설된 엄청난 수의 지뢰와 부비트랩을 해체하는 작업을 지휘했다.

프랑스와 독립 투쟁 속에서 가족들이 모두 희생 당하는 고통을 겪었으며 베트남의 심장', '레드(Red) 나폴레옹' 등으로 불리며 베트남인들의 각별한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재작년 102세로 사망하여 전 국민적인 애도 속에 국장이 치러졌다. 알렉산더, 나폴레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역사적인 군사 전략가로 평가 받기도 한다. 

 

 

베트남의 도시에서 거리 이름은 거의 베트남 독립을 지켜낸 인물의 이름. 거리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베트남의 역사를 아는 일인 듯하다. 베트남인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손짜반도 해수관음상이 건너다보이는 해변에서 버스가 서고 잠시 해변 구경을 한다.

 

 

 

 

 

베트남 고유의 소쿠리배들이 보고 싶은데, 오늘 따라 보이지 않는다. 미케해안에서 흔한 풍경인데...

 

 

 

 

 

남쪽으로 이어지는 백사장 해안선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호이안 끄어다이 해변까지 비슷한 풍경으로 이어질 것이다.  

 

 

 

 

 

손짜반도의 영응사(靈應寺)로 가는 해안길은 마치 양양 낙산사를 오르는 듯한 느낌이다.

 

망망대해 동해를 따라 너른 백사장을 지나서 산언덕을 돌아오르는 분위기가 비슷하다. 게다가 거대한 하얀 해수관음상이 동해바다를 굽어보고 있고 커다란 사원이 지키고 있는 풍경이 아주 닮지 않았는가!

 

 

※ 손짜반도와 다낭 주변 안내도

 

 

 

 

 

 

해수관음상이 자리잡고 있는 손짜(Sơn Trà)반도 모양은 거북 같기도 하고 버섯 같기도 하다. 동서 직선 거리가 16km나 되는 반도 전체가 산을 이루고 있는데 정상 높이가 693m나 된다. 다낭과 사이에 충적토로 연결되어 형성되어 있으며 폭풍우와 태풍으로부터 다낭을 보호해 주는 바람막이 역할을 한다.

 

 

손짜는 '티엔사(Tiên Sa)'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신선들이 내려왔다'는 뜻으로 신선들이 이곳에 내려와 장기를 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천연림이 들어선 보호구역으로서 마카크원숭이 같은 희귀한 원숭이들이 서식하고 있어 이곳 사람들은 원숭이산이라 부르며, 해변은 올리브각시바다거북가 서식한다고 한다.

 

 

 

 

투어 버스는 꼬불꼬불 해변 기슭을 오르다 영응사 동쪽 뒤편 주차장에서 멈춰섰다.

 

 

그래서 영응사와 해수관음상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역순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새로운 탑인 듯한 건축물을 짓고 있는 언덕을 지나 아직 제자리에 모시지 못한 열반상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조성한 지 얼마되지 않은 영응사(靈應寺), 하지만 해수관음상을 비롯해서 규모는 대단하다.

 

 

수많은 전각들이 들어서 있었지만 차근차근 돌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시간적 여유를 거의 주지 않고 앞장 서서 바쁘게 고객을 끌고 다니는 가이드... 사진 한 장 담고 돌아서보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다.

 

 

홀로 뒤에 처져서 대웅보전만이라도 대강 살펴보기로 한다.

 

 

 

 

이층전각인 대웅보전은 양쪽에 이층누각건물이 호위하고 있다. 위층 앞면 벽에는 '정불국토(淨佛國土)', '여래소도(如來所都)', '불광보조(佛光普照)'라는 구절이 씌어져 있다.

 

 

법당 마당은 운동장처럼 넓은데 18나한상이 양쪽으로 도열해 서 있고 그 가운데로는 분재 나무들이 역시 도열해 있다.

 

 

 

 

법당 마당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18나한상

 

 

 

 

대웅보전 내부 모습

 

 

 

 

대웅보전 삼존불상 앞에는 포대화상이 버티고 있다. 오행산 삼태사에서도 그러했듯 다낭의 사찰에는 포대화상이 전면에 배치되는 구도를 보인다.

 

 

 

 

때는 지금부터 1000여 년 전 후량 시대...

 

커다란 포대(자루)를 메고다니며 시주를 구하고 길흉화복을 용케도 잘 점쳤다는 포대화상은 사후 사람들에게 미륵불의 화신으로 숭배받은 선승이다. 그런데 지금은 볼록한 배와 후덕한 얼굴 등으로 재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사찰에서 모시고, 익살스런 모습 때문에 예술적 소재로 더 인기를 끄는 듯하다.

 

 

익살스런 포대화상 뒤에는 석가모니불이 선정인(禪定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고요함에 든 편안한 표정으로 결가부좌하고 있다.

 

 

 

 

선정인(禪定印)은 결가부좌한 자세로 왼쪽 손바닥 위에 오른손 손바닥을 올려 놓고 손가락 부분을 겹친 다음 양쪽 엄지를 맞대어 단전 앞에 모으는 수인이다.

 

선정(禪定)은 반야(般若)의 지혜를 얻고 성불하기 위하여 마음을 닦는 수행으로 생각을 쉬는 것을 의미한다. 욕망과 집착과 사념(邪念)으로 가득한 일상에서 벗어난 곳이 곧 극락인 것! 일체유심조,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이니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쉬는 것이 곧 선정인 것이다.

 

 

돌아서보니 영응사 내문 동쪽으로 해수관음상이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관음상 뒤쪽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창이 나 있는데 불상 내부의 공기를 순환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내부와 외부 온도가 달라지면 균열이 생길 수 있기 대문이란다.

 

 

영응사 내문

 

 

 

 

 

세계 최대라는 높이 67m의 해수관음상은 영응사 내문 아래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원형의 법당을 기단으로 삼았는데, 해수관음은 법당 위의 연꽃좌대에서 왼손은 정병(淨甁)을 받치고 오른손은 미타정인(彌陀定印)을 하고 자비로운 표정으로 서 있다.

 

정병은 관음보살을 상징하는 지물(持物)로 구제자를 나타내는 방편이자 길상(吉祥)과 자비심을 표현하는 불기(佛器). 감로수가 들어 있어 감로병이라고도 하며, 관세음보살은 이 감로수로써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갈증을 해소해 준다.

 

 

관음보살의 표정은 원만하고 눈빛은 자비롭다.

 

 

 

 

 

오른손은 아미타구품인의 하나로, 무명지를 구부려서 엄지에 대는 상품하생인(上品下生印)을 하고 있다. 이는 인과의 도리를 믿어 성불하겠다는 신심으로 수행한 자가 태어나는 극락세계를 표현한다.

 

 

 

 

원형 법당의 삼존불 입상

 

 

 

 

 

 

어째서 다낭에는 영응사(靈應寺)만 셋이나 될까...?

 

'영응(靈應)'은 '불보살의 영묘한 감응'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만큼 부처님의 감응을 절실히 바라는 아픈 영혼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

 

다낭은 베트남전쟁의 상처가 특히 깊은 곳. 미군이 주둔하고 한국군 청룡부대가 작전을 수행했던 곳, 하지만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멀지 않은 곳에 근거지를 두고 장악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보복성 민간인 학살이 많았던 곳이다.

 

 

그런데 이곳 영응사와 해수관음을 조성한 이는 보트 피플이라 한다. 베트남 전쟁 막바지에 남베트남의 패배를 눈앞에 두고 부패한 남베트남 정권의 협력자와 가족들이나 프랑스 식민지 지배에 협력했던 부유층 등 친불파들 1만 4000여 명이 금은보석을 챙겨들고 보트를 타고 탈출하다 많은 사람들이 다낭 앞바다에서 빠져 죽었다고 한다. 그 중 살아남아 미국에서 큰 성공을 이룬 사람이 돌아와 당시 탈출하려다가 죽은 넋을 기리기 위해 이 절과 관음상을 세웠다고 한다.

 

1975년 베트남 통일 직후 반동적인 인사에 대한 탄압이 있었지만, 1988년 이후 '공산주의 지향형 발전'의 이념을 내세운 베트남 특유의 경제 쇄신 정책인 도이 머이( Đổi mới) 정책을 실시하면서 베트남 경제가 안정화되면서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잊기 쉽지 않은 역사적 상처를 딛고 실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베트남인들의 지혜를 지켜보면서 마음이 아리면서도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베트남 전쟁의 영웅, 지압(武元甲 Vo Nguyen Giap) 장군이 한국에 대해 "과거는 지울 수 없지만 미래를 위해 같이 나아가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영응사와 해수관음상을 돌아본 다음 점심 식사를 위해 레득토(Lê Đức Thọ) 길을 따라 다낭만 방향으로 달린다.

 

레득토는 월남전이 막바지에 이를 당시 파리회담에서 헨리 키신저와 평화회담을 성공시켜 휴전을 이끌어낸 정치인, 그 공로로 키신저와 함께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지만 그는 월남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하였다.

 

 

다낭만의 작은 주머니 선착장, 붕퉁(Vũng Thùng)에 정박한 어선들

 

 

 

 

 

송한(한강) 하구를 가로지르는 현수교, 투안프억 다리(Cầu Thuận Phước). 뒤로 손짜산이 우뚝 솟아 있다.

 

 

 

 

 

점심 식사를 한 포비엔(PHO BIEN) 식당

 

 

 

 

베트남식 전통 요리, 러우하이산(LAU HAI SAN)

 

 

 

 

해산물을 익혀서 먹고 그 다음에 채소로 담가서 먹는 일종의 샤브샤브로, 국물이 신선하고 얼큰한 맛인데 신맛이 강하다. 국물에 국수를 말아먹는 맛이 괜찮다. 볶음밥도 맛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