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라오스, 베트남

베트남(8) 다낭 대성당, 베트남의 순교자를 만나다

모산재 2015. 1. 27. 23:03

 

오늘의 공식 일정은 다낭대성당으로부터 시작해서 오행산(마블마운틴), 손짜 영응사와 해수관음상을 돌아보고 하아반패스를 넘어 후에로 가는 것이다.

 

 

10시에 나타난 가이드, 므엉타인호텔 체크아웃하고 배낭을 투어 버스에 싣고 구 시가지 쩐푸거리에 있는 다낭성당으로 출발한다. 

 

 

'수탉교회'로 알려져 있는 대성당. 베트남 말로는 'Nhà thờ Con Gà'.  Nhà thờ 는 '성당'이나 '교회'를, Con Gà 는 '닭'을 뜻하는 말이다. 1923년 프랑스 인들을 위해서 세워진 성당인데, 십자가 꼭대기에 닭 모양의 풍향계가 있어 베트남 사람들이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분홍빛 건물이 이색적으로 다가오는데, 그래서 '핑크성당'으로 불리기도 한단다.

 

 

 

정문이 닫혀 있었던가. 옌바이 거리 후문으로 들어선다.

 

 

 

 

 

첨탑의 높이 70m. 교회 건물 자체는 그리 크지 않지만 다낭 지역을 관할하는 주교가 상주하고 있어 대성당이라 부른다고 한다.

 

 

 

 

 

십자기 위에 있는 수탉 형상의 풍향계

 

 

 

 

 

교회 서쪽에는 이층 건물 다낭카리타스(Caritas)가 자리잡고 있고, 건물 앞에는 17세기와 19세기의 신부상 둘이 서 있다.

 

(※ 카리타스 = '아가페'의 라틴어 역어로 영어로는 Charity. charis(은혜)가 아니라 cārus(높은 가격)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일반적으로 기독교에 있어서 신의 초자연적인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신앙과 희망 그리고 사랑의 신에 대한 세 가지 덕 중에서 최고의 덕으로, 기독교 교회의 자선사업 단체의 명칭으로도 사용된다.)

 

 

이 분들이 누구일까?

 

짐작은 했지만 베트남 천주교사의 순교자였다. 베트남에서도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초창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크게 박해를 받았던 모양이다. 박해의 내용은 끝에 참고자료로 첨부하기로 하고...

 

 

어렵게 찾아낸 대강의 정보는 다음과 같다. 

 

 

 

● 성 앙레 응우옌 낌통(Thánh Anrê Nguyễn Kim Thông,1790-1855)

 

 

 

1790년 빈딘의 고티(Go Thi)에서 태어났다. 작은 읍의 평신도이자 견실한 시민이며, 촌장 전도사를 맡았다. 정부의 카톨릭 박해가 시작되자 그는 마을에서 추방되었고 1855년 띠엔장 미토(My Tho, Tien Giang)의 강제수용소로 향하는 강행군 도중 탈수 탈진으로 죽었다. 1988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로부터 시성되었다.

 

 

 

응우옌 낌통의 순교 사유는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봐야 할 듯...

 

 

하지만 아래에 나오는 프억 앙레는 19세라는 꽃다운 청년의 나이로 비극적인 처형을 당해 마음이 아려온다. 그의 처형 장면은 그림으로도 많이 표현되어 있다. (이 조각상에는 이름이 '앙드레'로 되어 있지만, 찾아본 대부분의 자료들에는 '앙레'로 되어 있다.)

 

 

 

● 성 프억 앙레 푸옌(Chân Phước Anrê Phú Yên,1625-1644)

 

 

 

1625년 뀌뇬의 남쪽, 푸옌 란란(Ran Ran, Phú Yên)에서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다.

15세에 베트남어의 로마자화에 공헌한 예수회 선교사 알렉상드르 로드(Alexandre de Rhodes)의 세례를 받고 1년 뒤에 전도사가 되었다. 1643년에 다른 전도사의 더불어 그의 남은 삶은 교회를 위해 바치기로 서약했다. 1644년 체포되고 구타당했다. 왕은 기독교 금지를 명령했다. 앙레는 Mandarin ong Nghe Bo에 의해 신앙을 포기하면 석방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1644년7월 26일 선고를 받고 다음날 꽝남 께캄(Kè Khàm)에서 대부 로드와 포르투갈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형 집행되었다. 창에 찔리고 언월도에 참수 당하며 예수를 부르짖으며 죽었다. 베트남 최초의 순교자다.

대부 로드가 시신을 수습해서 배에 싣고 마카오에 묻었다. 2000년 교황 요한바오로 2세로부터 시복되었다.

 

 

 프억의 처형 장면을 그린 그림들. 옆에서 처형을 지켜보고 있는 이가 알렉상드르 드 로드인듯...

 

 

※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1591-1660)

 

프랑스 아비뇽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이다. 베트남 선교에 주력했으며, 현재 베트남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로마자 기반의 베트남어의 표기체계인 꾸옥응으(Quốc Ngữ, 國語)를 고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1619년 예수회 소속 사제로 일본에 가려 했으나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으로 인도차이나에 부임하여 10년 동안 베트남 왕궁에서 일하면서 베트남어와 베트남의 문화를 익혔다. 이때, <포르투갈어-라틴어-베트남어 사전>을 편찬하는 등, 학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 베트남어의 로마자 정식 표기체계인 꾸옥응으(國語)를 고안하였다.

1630년부터 베트남에서 가톨릭을 박해하기 시작하여 마카오에서 10년 동안 지낸 후, 응우옌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베트남 남부에 다시 입국하여 후에에서 선교를 시작한다.

그러나 정세불안이 이어져 1649년에는 로마로 돌아가서 1650년 <통킹 왕국의 역사>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다시 베트남으로 가기를 희망하였으나, 1660년에는 페르시아로 파견되었으며 이스파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성인들을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답다고 해서 성당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했는데, 아쉽게도 성당 문이 잠겨 있다.

 

구글에서 검색한 이미지를 빌려 잠깐 내부를 들여다 본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위에서 본 최초의 순교자, 프억 앙레 푸옌 상이 있어 눈길을 끈다.

 

 

 

 

 

 

성당 옆, 검을 짚고 생각에 잠겨 있는 이 인물은 누구인가...?

 

 

 

 

 

교회 동쪽에는 아름다운 다낭교구 주교 관사가 자리잡고 있다.

 

 

 

 

 

교회 앞마당의 피에타상 등 조각상들

 

 

 

 

 

 

그 외에 교회 울타리를 장식한 예수의 일생을 표현한 그림이 볼 만하다.

 

 

 

 

 

 

 

※ 베트남 가톨릭교회 역사와 박해

 

1533년 한 유럽인 선교사 Inigo가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에 베트남에 그리스도교가 처음 들어왔다. 그 후 1615년 일본에서 추방된 두 예수회 신부 Francesco Buzomi와 Diego Carvalho가 중앙 베트남 DaNang에 본부를 마련하고 전교를 시작했다. 1624년 다른 예수회 파견 신부들이 도착함으로써 본격적인 전교가 시작되었다. 이 파견대의 지도자는 “베트남의 사도”라 불리는 Alexander de Rhodes(SJ, 1593~1660)였다. 그는 1627년 하노이로 가서 왕의 자매를 영세시키고, 3년 동안에 약 6,700명의 베트남인들을 영세시켰다.

그러나 그는 1630년 축출당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자 한 명이 첫 순교자가 되었다. 1639년 De Rhodes는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왔고, 그동안 가톨릭 신자는 100,000명으로 늘어났다. 빠리 외방 전교회가 들어옴으로써 신자 수는 급격히 늘어 1658년에는 북베트남에만도 300,000명의 신자 수를 헤아렸다. 1659년 전교회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에 두 감목구를 설치했다. 1666년 신학교를 개설했고 1668년에는 첫 본토인 신부가 탄생했다. 1670년 빠리 외방 전교회의 Pierre Lambert de la Motte 신부는 “십자가를 사랑하는 수녀회”라는 이름으로 첫 베트남인 수녀회를 창설했다.

간간이 소규모의 박해가 있었지만 본격적인 박해는 1698년 발생했다. 그 후 1712년, 1723년, 1750년 박해가 계속되어 약 100,000명의 신자들이 순교했다. 그중 Gil과 Lenziniana는 1745년 베트남의 첫 성인이 되었다. 1787년 감목구장 주교 Pierre Pigneau de Behaine(MEP)가 프랑스 정부와 남쪽 베트남 지도자(후에 Gia Long 황제) 사이에 협약을 주선해 잠시 동안 박해가 그쳤다. 그러나 Gia Long 황제의 넷째 아들이 황제가 되자 철저한 유교 신봉자였던 그는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의 절대적인 신앙생활을 보고 베트남의 유교가 흔들릴까 염려해, 1825년 외국 선교사들의 입국을 막았다. 1833년 민중 봉기가 일어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황제는 화가 치밀어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배교를 강요했다.

1847년 새 황제가 등극하자 박해는 절정에 달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자기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외국 선교사들을 죽이고 신자들에게는 얼굴에 “가짜 종교”라고 새기고 다니게 했다. 가족을 갈라놓아 고통을 줌으로써 신앙을 버리게 했다. 끝내는 José Matía Díaz 주교를 목 잘라 죽였다(1857). 프랑스인들은 베트남을 점령하기 위해 끝까지 버티었고 1858년 Da Nang을 점령하고 남쪽으로 향했다. 1862년 박해하던 Tự Đức 정부는 프랑스와 조약을 맺고 종교 자유를 허용했고, 남부 지역을 프랑스에 양보하기로 했다. 1862년의 조약문 해석이 문제가 되어 분쟁이 일어났고 프랑스는 또다시 북베트남을 점령했다. Tự Đức은 중국에게 원조를 호소했으나 허사였고, 1883년 그가 죽은 후 프랑스 군은 온 베트남을 점령했다.

19세기 동안 300,000만여 신자들이 신앙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이때 신부들을 중심으로 가톨릭의 박해에 대한 싸움은 영웅적이었다. 1857~1862년 사이에 215명의 베트남 신부들과 수녀들이 희생되었고 5,000명의 신자들이 순교했으며 40,000명의 신자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되었다. 이때의 박해 기록은 없어졌지만 96명의 베트남 순교자, 11명의 스페인 도미니꼬회원, 10명의 빠리 외방 전교회 신부, 모두 합해 117명의 순교자들이 여러 기회에(1900, 1906, 1909, 1951) 시복(諡福)되었다. 이 117명은 주교 8, 신부 50명, 신학생 1명 평신도 58명이었다. 

- 출처 :  <백과사전(가톨릭에 관한 모든 것)>, 가톨릭대학교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