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라오스, 베트남

베트남(5) 호이안 옛마을 광조회관, 경부회관, 떤키고가, 호이안 시장

모산재 2015. 1. 25. 13:29

 

내원교를 건너면 호이안 옛거리의 번화가라 할 쩐푸(TranPhu)거리로 이어진다.

 

 

옛 가옥 800여 채가 있는 옛마을은 자동차 진입이 금지되어 있어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느긋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시클로나 자전거가 달리기는 하지만 걷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긴장에 길들여져 있는지..

 

 

 

 

 

 

 

 

쩐푸거리로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광조회관(廣肇會館)!

 

1천여 일본 무역상들이 붐비던 일본인 마을이 도쿠가와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으로 점차 쇠퇴하면서 화교들이 대거 이주해오고 호이안 거리는 중국의 색채가 짙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는 광조회관을 비롯해 복건회관, 조주회관, 경부회관 등 중국인 무역상들의 향우회관이 여럿 들어서 있다.

 

 

 

광조회관은 중국 광동 지역 무역상인들의 향우회관으로 1885년에 지었다 한다.

 

 

입구는 화려한 패방이 절로 눈길을 끈다.

 

 

 

 

'자운경해(慈雲鏡海)', '호의가가(好義可嘉)'라는 현판이 눈길을 끈다.

 

 

 

 

각각 '자애로운 구름과 거울 같은 '의로움을 좋아하는 것은 가히 기릴 만하다'는 뜻이니 하나는 바다를 통해 교역하는 상인들의 바람을 나타내는 말이요, 다른 하나는 향우들의 결속을 바라는 마음을 담은 말인 듯하다.

 

 

'호의(好義)'의 원형으로 보이는 '도원결의' 장면을 그린 벽화를 보고, 회관을 지나니 사당이 나타난다.

 

 

 

 

사당 중앙에는 관우를 모셨는데, 양쪽 앞으로 백마와 적토마가 보인다. 관우상 왼쪽에는 날씨를 관장하는 천후(天后)신을 모셔 놓고 그 앞 배의 돛에 '일범풍순(一帆風順)'이라는 구절을 적어 놓았다.

 

 

사당 앞 천장에 조롱처럼 생긴 것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향이라고 한다.

 

 

 

 

모기향처럼 오래도록 탈 수 있도록 만든 향인데, 중국이나 대만의 사원에서 불을 때듯 태우는 향에 비해 은근해서 좋다.

 

 

중앙의 관우상은 상하로 4위나 모셔 놓았다.

 

 

 

 

 

관우사당 양쪽으로는 따로 만선당과 의사당이라는 칸을 두어 많은 위패를 모시고 있는데, 회관 활동과 관련 있는 사람들의 위패로 보인다.

 

 

만선당(萬善堂)

 

 

 

의사당(義祀堂)

 

 

 

 

사당 뒤편으로는 아름다운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인위적인 정원, 자연스런 것을 좋아하는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관우사당 뒤쪽 벽에는 삼고초려 장면을 그린 벽화가 있다. 삼고초려(三顧草廬)를 '삼고모려(三顧茅廬)'라고 표기한 것이 이색적인데, '풀오두막집'보다 '띠집'이 더 구체적인 듯하다.

 

 

 

 

 

 

이렇게 꼼꼼하게 광조회관을 살펴보고 나오니 일행들은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거리의 가옥을 바라보다 보니 유난히 노란색과 검은색이 많은데, 노란색은 콘크리트벽으로 된 건물이고 검은색은 나무로 된 건물이다. 그리고 대개 2층집이라는 것과 2층에는 대개 발코니가 있다는 것. 포개듯 촘촘히 기와를 얹은 중국식 지붕도 눈에 띄는 특징이다. 

 

 

 

 

 

쩐푸거리의 '쩐푸'가 무엇인지 확인해보니,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의 전신인 인도차이나공산당의 초대 총서기를 지낸 쩬푸(Trần Phú 陳富 1904-1931)라는 인물이다. 대강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1925년 베트남 혁명당에 가입하고,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뒤 1930년 귀국해 홍콩에서 개최된 제 1차 인도차이나 공산당 중앙당회의에서 초대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1931년 사이공에서 공산혁명 사업중 프랑스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수감 중 병이 악화돼 사망했다. 베트남 공산당 태동기에 강령을 초안하고 초대 서기장을 역임한 사람으로서 베트남 공산당 발전사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나 요절하였다.

 

 

 

 

쩐푸 거리 중간, 작은 공터에는 외국인 부조상이 하나 서 있다.

 

 

 

 

한눈에 유럽인임을 알 수 있는데, 누구이며 무슨 까닭으로 세워진 걸까?

 

 

 

 

확인해보니 이분은 폴란드인으로 베트남의 문화유산인 미선 유적, 호이안 옛마을, 후에 역사유적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이름은 카지미에르츠 크비아트콥스키(Kazimierz Kwiatkowsky, 1944~1997). '카직(Kazic)'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폴란드 건축가로 1980년대 베트남에 와서 베트남과 폴란드의 문화유산 보존을 위한 협력 사업에 참가하여 발굴, 연구, 출판에 공헌하여 1999년 호이안 옛마을의 세계유산 등재에 기여했지만 1997년 병으로 후에에서 사망했다.

 

 

 

 

 

 

지나치게 상업화하여 흥청대는 중국 리장고성의 거리 풍경과는 달리 호이안 옛마을의 거리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소바(SOVA)라는 자수(embroidery) 공방. 섬세하게 수를 놓는 여성들의 모습이 보인다.

 

 

 

 

내부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어 정교한 작품을 찍지 못했는데, 오른쪽 전시 공간에는 우리 돈으로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자수 작품들이 걸려 있다.

 

 

 

 

 

 

푸른 가로수와 덩굴풀꽃과 노란 건물이 어울려 소박한 아름다움을 주는 거리

 

 

 

 

 

 

응웬타이혹(Nguyễn Thái Học) 거리로 들어선다.

 

베트남 독립운동가로 1930년 프랑스에 대항하여 옌 바이(Yên Bái) 총봉기를 주모하였으나 실패하여 사형 당한 응웬타이혹(阮太學 1901~1930)을 기념한 거리이다.

 

 

 

 

이 거리에 떤키 고가(Nhà cổ Tấn Ký 進記)가 있다. 

 

떤키 옛집은 중국 광동의 어부였던 진기(進記)가 살던 2백 년 된 집으로 1985년 호이안에서 최초로 문화유산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실크, 차, 목재, 계피, 한약재를 판매하던 상점으로 쓰였다.

 

 

 

 

 

앞뒤로 출입문이 있는 좁고 긴 구조로 된 2층 건물인데, 정문은 응웬타이훅 거리를 향하고, 후문은 투본 강변의 박당 거리로 나 있다.

 

정문은 호이안에 거주하는 상인들이 들락거렸고, 후문은 정박한 배에 물건을 싣기 편리해 외국 상인들이 즐겨 이용했다고 한다.

 

 

 

 

'려가사(黎家祠)'라는 현판, '려씨 집안의 사당'이라는 말일 텐데 무슨 의미를 담은 것일까?

 

 

 

 

'적덕이손(積德貽孫)', '덕을 쌓으면 후손에게 끼친다'는 말

 

 

 

 

역시 사당을 두었다.

 

 

 

 

신위에는 '諸佛會同 協天大帝 關聖帝(제불회동 협천대제 관성제)'라 적혀 있어 부처님, 천제, 관우를 모두 모시는 듯하다.

 

 

 

 

투본강이 종종 범람하는 듯 잠겼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붙여 놓고 잠긴 높이를 표시해 놓았다.

 

 

 

 

1층 키 높이로부터 거의 전 층이 잠긴 잠길 정도...

 

그럼에도 목조건물이 상하지 않고 유지된 것 목재의 재질이 대단한다. 아마도 단단하기로 유면한 흑단나무인 듯...

 

 

현재 7대 후손들이 생활하고 있다는 떤키 고가는 베트남, 중국, 일본 가옥 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건물로 평가받는다. 격자 모양으로 지붕을 받친 베트남식 건물이지만, 육각형 천장과 대들보와 세 겹 서까래는 일본 양식이며, 나전 기법으로 치장한 기둥과 자개 장식, 한자 간판 등은 중국풍이다.

 

 

 

 

떤키 고가 후문으로 나오니 바로 투본강이 나타난다.

 

건너편은 투본강 가운데 있는 작은 삼각주, 바로 앞의 강은 투본강의 샛강이다.

 

 

 

 

 

 

투본강을 따라 나 있는 이 길이 박당(Bạch Đằng) 거리다.

 

그러고보니 호이안에도 다낭처럼 박당거리가 있고 박당강(백등강) 전투에서 몽골군을 섬멸시킨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 거리가 있다.

 

 

 

 

 

오른쪽 건물은 호이안 민속박물관

 

 

 

 

 

 

박당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걷다보면 호이안시장(Chợ Hội An)이 나타난다.

 

쩐푸, 응웬타이훅, 박당거리의 동쪽 끝에 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캄남다리에서 쩐흥다오 거리까지 이어지는 호앙디에우(Hoàng Diệu) 거리 풍경

 

 

 

 

호앙디에우(黃耀 1828-1882)는 응웬조의 하노이 총독으로 1882년 프랑스 침략군에 맞서 싸우다 압도적인 화력을 이기지 못하고 패전하며 자결한 인물인데, 이를 기념한 거리다.

 

 

 

 

호앙디에우거리에서 쩐푸거리로 들어서니 경부회관(瓊府會館)이 나타난다.

 

 

 

 

경부회관은 중국의 가장 남쪽 해남성(海南省) 출신 화교들의 향우회관으로 다른 향우회관들보다 늦은 1883년에 지어졌다.

 

 

 

 

경부회관 벽에는 경부회관을 건립하게 된 비극적 사연이 적혀 있는데, 대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51년 6월 중순, 해남성 출신의 상인 소응(昭應)은 108 명의중국인 상인들을 거느리고 상선 맹두호(猛頭號)에 올라 후에로부터 귀향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꽝응아이(廣義)의 항구에 정박해 있다가 6월 21일 새벽에 다시 출항한다. 항해 도중 베트남 순시선이 맹두호를 해적선으로 오인하면서 맹두호 선원들은 저항하며 먼 바다로 도망쳤지만 결국 이곳 호이안 부근에서 붙잡혀 108명 전원이 수장 당하는 참사를 당한다.

뜨득황제가 통치하던 당시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관련자는 문책되었고 그들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소응과 108명의 상인을 추모하는 소응전(昭應殿)

 

 

 

 

제단 앞에는 천후신을 중심에 두고 '人壽年豊, 風調而順, 國泰民安' 등의 글씨가 씌어진 족자를 들고 있는 대형 부조상을 두었다.

 

 

 

 

108인의 영령을 모신 신위

 

 

 

 

 

 

쩐흥다오 거리에 있는 공자 사당인 문성묘(文聖廟)는 문이 잠기어 있고 거의 폐허가 된 채로 방치되고 있다.

 

 

 

 

 

 

걸어다니느라 피곤하여 베트남식 치킨 라이스인 껌가(Cơm Gà) 식당 하미롱에서 타이거 맥주 한 잔 마시며 쉰다. 

 

 

 

 

 

가까이에 있는 호이안 예의학교. 농구 코트에서 농구 연습을 하며 노는 아이들...

 

 

 

 

 

 

예스러운 가옥들이 늘어서 있는 쩐푸 거리, 그러나 내부는 현대적인 분위기의 갤러리, 카페, 식당, 옷가게 등으로 꾸며져 있다.

 

 

 

 

 

지붕에 자라는 열대 이끼, Pilea microphylla. 중국에서는 '소엽냉수화(小叶冷水花)'라 부른다.

 

 

 

 

 

 

모이기로 한 약속 장소 내원교로 가는 길, 일몰 시간이 가까워진 투본강을 따라 박당 거리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