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광주, 무등산 전망이 아름다운 원효사

모산재 2015. 1. 17. 14:02

 

강천산 계곡과 강천사를 돌아보고 나서 옥과의 한우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우리 여행의 마지막 코스, 무등산 원효사(元曉寺)로 향한다.

 

 


광주호 가에 있는 가사문학관을 지나 무등산 북쪽의 원효계곡으로 들어서자 넉넉한 품을 가진 무등산이 시야를 채우며 원효봉과 마주보고 있는 의상봉이 성큼 다가선다. 원효가 있는 곳에는 의상이 함께 하는 것인가?

 

 

무등(無等)!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산, 찾을 때마다 늘 흐리고 추워보였던 산인데 오늘만큼은 넉넉하고 포근하고 따스해 보인다. 

 

 

 


부처님이 설하였고 마르크스가 선언했고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인류가 꿈꾸었던 절대 평등의 무등등(無等等) 세상, 무등산은 우리에게 이루지 못한 무등(無等)의 세계를 잊지 말라고 웅변하는 듯하다.

 

 

무등산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시, 황지우의 '무등(無等)'!

 

절망의산,

대가리를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 사랑의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산, 죽음의산,

부활의산, 영생하는산, 생의산, 회생의

산, 숨가쁜산, 치밀어오르는산, 갈망하는

산, 꿈꾸는산, 꿈의산, 그러나 현실의산, 피의산,

피투성이산, 종교적인산, 아아너무나너무나 폭발적인

산, 힘든산, 힘센산, 일어나는산, 눈뜬산, 눈뜨는산, 새벽

의산, 희망의산, 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 평등한산, 대

지의산, 우리를감싸주는, 격하게, 넉넉하게, 우리를감싸주는어머니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는 서정주의 자기기만적 시구와는 격과 결이 너무도 다르지 않은가!

 

 

 

 


주차장 곁에 원효사 일주문이 있다.

 


원효사는 원효봉 기슭에 자리잡고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남동쪽 건너편으로 의상봉이 손에 닿을 듯 보이고 무등산 북쪽 너른 품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도밭을 오르며 바라보는 무등산

 

 

 


해발 1187로 우뚝 솟은 무등산은 펑퍼짐한 육산이라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하면서도 수정병풍이라 불리는 서석대와 제천단 역할을 헤온 입석대, 삼존석이라 불리는 규봉 등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기암들이 펼쳐진 아름다운 산이다.

 


 

일주문을 지나 원효사 오르는 길은 온통 푸르른 산죽밭이다. 겨울 산에서 만나는 푸르름이 싱그러운 감성을 일깨운다.

 

 

원효사 앞의 부도밭

 

 

 

아름다운 석축과 조화를 이룬 범종각과 회암루(晦巖樓)

 

 

 

 


법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문루인 회암루(晦巖樓)를 지나야 한다.

 


회암루에서 바라보는 무등산 조망이 아름답고 시원스러워 광주 시민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문루 이름이 왜 회암루(晦巖樓)일까...

 

'그믐 회'에 '바위 암', 그렇게 의미가 잘 연결되지 않는 조어다. 아마도 원효의 개달음과 관련된 이름일 텐데 그 의미를 알기 어렵다. 어느 글에 보니 회암루에 대해 '안개로 덮여진 기괴한 암석과 노송으로 우거진 한 폭의 동양화 같은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는 높은 다락'을 뜻하는 것으로 전해진다고 소개하고 있다.

 

 

 

원효사(元曉寺)는 원효대사가 무등산에 머물면서 암자를 짓고 원효암이라 불렀다는 설이 전해지는데, 신라 지증왕이나 법흥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충숙왕 때 화엄종승이 원효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원효암을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조선 문정왕후의 섭정 때 사세가 다시 일어났으며, 임진왜란 때 승병장 영규(靈圭)가 수도했던 곳이다.  정유재란 때 불타고 수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쳐 한국전쟁 때 전소하였던 것을 1954년부터 중창하였다.

 

 


그런데, 원효사는 시인이 아닌 스님 고은의 청춘의 한 시기와 인연이 있는 절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19세의 고은은 삭발하고 일초라는 법명을 얻고 스님이 되지만 이듬해 그의 스승이 환속하자 충격을 받고 행각승으로 떠돌다가 대처승이 주지로 있던 원효사에 머무르게 된다. 무등산의 아름다움이 그를 붙들었던 모양이다. 

 

문을 열면 눈앞의 저 건너에 있는 무등산 입석대 언저리의 그 삼엄한 상상봉과 그 상상봉 위의 피같이 짙푸른 하늘이야말로 나에게 행복의 극치이기도 했다. - 고은, '나의 산하, 나의 삶' <92>, 경향신문 1992

 

 

회암루를 통과하면 바라보이는 법당과 석등

 

 

 

대웅전과 석등과 오층석탑

 

 

 


법당 마당에 원효상(?)과 인왕상을 조성해 놓았다. 조계종 사찰에서는 보이지 않는 독특한 양식으로 어쩐지 일본 불교인 진언종의 분위기가 풍기는 듯하여 썩 마뜩찮은 느낌이 든다.

 

 

 

대웅전

 

 

 


보통 법당 앞에는 큰키나무를 심지 않는데, 소나무 등을 심어 놓았다. 시간이 더 지나면 본당이 소나무 숲에 가려지는 모습이 되지 않을까...

 


삼존불

 

삼존불 사진 출처 : http://cafe.daum.net/dnjsdytk

 

 

 



※ 원효사 가람배치도

 

출처 : 원효사 홈페이지

 

 


약사전

 

 

 

 

약사전 옆에서 바라본 법당 마당과 무등산

 

 

 

감로정 옆의 불유관음상(佛乳觀音像)

 



아이를 안고 젖을 물리는 어머니 상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의 중생에 대한 가이 없는 자비심을 표현한 것으로 불유관음상이라 말할 수 있겠다. 자식을 점지해주는 기복 불교의 송자관음(送子觀音)과 통하는 상으로 볼 수도 있겠다.


월정사나 천성산 내원사 등의 사찰에서는 감로수를 마시는 곳에 불유각(佛乳閣)이란 이름의 전각을 두어 부처님의 자비심을 표현하고 있다. 중생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부처님의 모습을 상징화한 것으로 이해해도 될 듯하다.  


 

 

무등선원

 

 

 

성산각(星山閣)

 

칠성과 산신과 독성을 모신 전각으로 삼성각의 다른 이름이다.

 

 

 

명부전

 

 

 

원효대사의 영정을 모신 개산조당(開山祖堂)

 

내부에는 만수사 범종이 보관되어 있다. 오른쪽은 명부전

 

 

 

개산조당 외벽에는 원효의 일생을 벽화로 그려 놓았다.

 

 

 

무등산

 

가까운 곳에 솟은 봉우리가 의상봉이다.

 

 

 

 원효팔경(元曉八景)


무등명월(無等明月) - 왕봉에 보름달이 떠오르는 아름다운 운치

서석귀운(瑞石歸雲) - 서석대에 넘실거리는 뭉게구름의 운치

삼전열적(蔘田烈蹟) - 장불재 김덕령장군의 의병훈련활동에 얽힌 전설

원효폭포(元曉瀑布) - 원효폭포의 시원하고 장쾌하게 물이 떨어지는 소리

원효모종(元曉暮鐘) - 원효사에 해질 무렵 원효사에서 종치는 소리

의상모우(義湘暮雨) - 의상봉에 비 내리는 해질 무렵 운치

안양노불(安養老佛) - 투궁봉 안양사에서 들려오는 스님의 염불소리

만치초적(晩峙草笛) - 늦재에 머슴들의 풀피리 소리

 

 


1980년 원효사 복원공사 때 삼국시대의 금동불상 6점, 백제의 토기와 와당,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 6점, 고려시대의 철불두상(鐵佛頭像), 고려자기와 토기불두(土器佛頭) 등 140점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 : 원효사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