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담양 (4) 창평 삼지내 마을, 우리나라 최초의 슬로시티

모산재 2015. 1. 12. 10:59

 

죽녹원과 담양향교를 돌아본 다음 창평면 삼지내 마을로 향한다.

 

삼지내는 우리 나라는 물론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로 인정받은 마을이라 여러 모로 궁금했는데 이제야 가보게 되었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니 규모가 아주 작은 동네라서 뜻밖이다.

 

 

슬로시티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전통과 생태가 잘 보전되어야 하고, 전통 먹거리가 있어야 하며, 주민들에 의해 공동체 운동이 있어야 한다는데, 작은 마을 창평이 그런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전통 가옥과 돌담들이 잘 보존되고 있고, 떡갈비와 전통 장류와 한과와 엿이라는 먹거리가 있다. 마지막 조건인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 운동으로 무엇이 있을까...

 

 

창평교회와 면사무소로부터 마을을 돌아보게 되었다.

 

 

 

 

 

저 쪽 한옥 건물이 면사무소...

 

 

 

 

 

슬로시티 마크가 붙어 있는 탐방 안내소...

 

 

 

 

 

슬로시티는 1999년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그레베 인 키안티'에서 시작되어 현재 세계 27개국 174개 도시가 가입되어 있다. 

 

당시 그레베 시장으로 재직 중이던 파울로 사투르니니씨가 '달콤한 인생(la dolce vita)'의 미래를 염려하여 마을 사람들과 세계를 향해 "느리게 살기(slow movement)."를 호소하면서 '치따슬로(cittaslow)', 즉 슬로시티(slow city)운동을 출범시켰다.

 

산업화와 기술혁명이 선물해 준 빠름과 편리함은 자연에 대한 기다림을 망각하게 했고 느림의 행복과 삶의 품위를 희생시켰다. 슬로시티는 전통적인 수공업과 조리법, 고유의 문화유산과 자연친화적인 농업, 인간 중심의 마을 운동을 지켜가고자 하는 운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창평을 비롯해 완도 청산도, 장흥, 하동 악양, 신안 증도, 예산 대흥 응봉, 남양주 조안, 전주 한옥마을, 상주 함창, 청송 부동 파천, 영월 김삿갓, 제천 수산 박달재 등 11개 마을이 슬로시티로 인정받았다.

 

 

※ 삼지내 마을 안내도

 

 

 

 

 

 

'삼지내'라는 마을의 이름은 남동쪽에 있는 월봉산에서 월봉천, 운암천, 유천이라는 세 갈래 물길이 발원하여 마을 앞에서 하나로 모이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창평면사무소 앞을 지나치다 뜰에 보이는 '영세불망비' 비석 셋을 들여다보다 발걸음을 멈춘다. 

 

 

 

 

 

양쪽의 작은 비석은 창평 현령의 선정비인데, 가운데 큰 비석에는 '도순찰사 이서구(李書九)'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都巡察使李相公書九永世不忘碑

도순찰사 이상공 서구 영세불망비

 

 

이서구라면 서얼 출신인 이덕무·박제가·유득공과 함께 지금의 탑골공원 백탑 아래 모여 연암 박지원에게 문장을 배우고 청나라의 문물과 학문을 치열하게 논하였던 '실학 사대가' 또는 '사가 시인(四家詩人)'이라 불리는 '백탑파'의 실학자 아닌가! 바로 곁에 세워둔 안내판에는 1791년부터 1795년까지 도순찰사(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793년에 창평 현청을 이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석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인 1824년에 세운 것이다.

 

※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가 펴낸 시집 <건연집(巾衍集)>이 연행(燕行)한 숙부를 통해 북경의 반정균과 이조원 등 지식인들에게 전해지고 이들이 감동하여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면서 북경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이 시집의 네 시인들을 '사가 시인(四家詩人)'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서구는 1819년에도 전라도 관찰사로 왔을 만큼 전라도와 인연이 깊은데, 전라도 지역 곳곳에는 그에 대한 수많은 설화가 전하고 있다.

 

 

 

 

아름다운 돌담으로 이어지는 마을길

 

 

 

 

 

효소 체험장, 약초 밥상 등의 먹거리

 

 

 

 

 

수로가 있는 아름다운 돌담길

 

 

 

 

 

 

 

삼지내 마을은 장흥 고씨들의 집성촌인 듯하다. 고정주, 고재욱, 고재환, 고재선 등 유명한 집들은 모두 고씨들 집이다. 알고보니 이곳의 고씨는 임진왜란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후손들이다.

 

1590년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여름 파직되어 광주로 돌아와 살고 있던 고경명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곳 담양에서 두 아들 고종후와 고인후를 데리고 김천일, 유팽노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담양에서 기병하여 전주, 여산을 거쳐 금산에 이르러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는데, 고경명의 시신은 화순현에 묻히게 되었고 고인후의 시신은 창평현 수곡리에 묻히게 되었다. 고인후가 창평에 묻히게 된 것은 처가가 창평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인후의 네 아들이 창평에 터를 잡고 살면서 장흥 고씨들이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민박집 '한옥에서'

 

 

 

 

 

정갈하게 느껴지는 가옥. 너른 마당 가운데에 소나무를 심고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민박집이자 유황오리 음식점인 갑을원. 들판을 끼고 있는 돌담의 곡선이 아름답다.

 

 

 

 

 

 

역시 너른 마당에 소나무를 심은 뜰과 정갈한 가옥이 잘 조화를 이룬다.

 

 

 

 

 

들판과 이어진 담장과 마을길이 정겹고 평화롭다.

 

 

 

 

 

멀리 들판 가운데 보이는 두 개의 건물, 마을로 진입하는 일주문과 노인들의 쉼터인 양로정이다.

 

 

 

 

 

마을사람들이 양로정(養老亭)이라 부르는 건물의 공식 명칭은 '남극루(南極樓)'.

 

1830년대에 30여 명의 주민들이 노인들의 쉼터로 건립한 2층 누각인데, 원래 창평 면사무소 앞 옛 창평 동헌에 있던 것을 1919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것이라 한다. 남극성은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로 마을 노인들의 편안한 여생과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은 누정이다. 문루의 역할을 하였던 관아 건물이라 웅장한 느낌이 든다.

 

 

멀리 보이는 산이 아마도 월봉산인가 보다. 크지도 높지도 않지만 너른 품을 가진 산!

 

너른 들판과 병풍처럼 두른 산, 그 안에 아늑히 앉은 마을은 모든 것이 넉넉해 보인다. 부촌이 갖추어야 할 것을 다 갖춘 지세다.

 

 

 

 

마을 집들은 대부분 부농의 양반가옥이다. 보통 농가의 집들은 삼칸집이지만 이 마을 집들은 대개 5칸이고 네댓 채의 집을 거느리고 있다.

 

 

갑을원의 오리인가...?

 

 

 

 

 

춘강 고정주 고택

 

 

 

 

 

춘강 고정주(1863-1933)는 창평에서 근대교육의 효시인 창평영학숙(昌平英學塾)과 창흥의숙(昌興義塾)을 건립하였는데 송진우, 김병로, 김성수 등이 이곳에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대가의 진입로가 예사롭지 않다.

 

 

 

 

 

솟을대문과 문간채

 

 

 

 

 

 

이 집 역시 마당에 소나무를 심어 작은 정원을 두었다.

 

전통적인 양반집으로 안채와 2동의 사랑채, 곡간채, 사당, 내외의 문간채 등으로 격식을 잘 갖춘 주택이다. 1913년에 건립된 건물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라는데 많이 퇴락해 보인다.

 

 

 

 

 

 

수로가 있는 골목길

 

 

 

 

 

 

담쟁이 덩굴이 덮고 있는 돌담

 

 

 

 

 

 

 

삼지내는 한 시간 정도면 대강 돌아볼 수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러다보니 슬로시티라는 이름이 붙지 않아도 그리 바빠야 할 이유가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구수가 많지 않으니 그리 다양한 볼거리도 없고 먹거리도 없다. 슬로의 중심이 슬로푸드인데 몇몇 집에서 엿과 한과와 강정을, 그리고 장을 만들어 판다. 이런 정도의 먹거리는 우리 나라 시골 마을이라면 다 해당될 듯하다.

 

다만 새마을운동으로 대부분의 마을들이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하고" 하면서 전통가옥과 담장이 다 헐려 나가버렸는데, 이 마을은 그런 점에서는 행복해 보인다.

 

 

 

 

 

※ 창평 안내지도(출처 : 다음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