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담양 (3) 담양 향교, 삼은 전선생 유허비

모산재 2015. 1. 9. 18:32

 

담양향교는 죽녹원 서쪽 성인산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향교로 들어서는 골목은 민가들이 가득 들어서 있어서 시야가 막혀 있다. 외삼문 앞에 조금 넓게 마련된 공간조차 차량들이 주차해 있어 답답하다.

 

 

 

외삼문

 

 

 

외삼문을 들어서면 왼쪽 담장을 따라 고을 수령(부사)의 흥학비(興學碑)들이 늘어서 있다. 흥학비는 학문과 교육에 끼친 공로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다.

 

 

 

그리고 전면으로 보이는 명륜당(明倫當) 건물.

 

 

 

정면 7칸 측면 3칸의 건물은 높은 석축을 쌓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데, 기단은 3중 기단으로 전체 높이가 약 280cm라고 한다.

 

아래층은 양쪽 2칸은 벽, 가운데 5칸은 살(箭)을 설치하여 막아 놓았다. 동재와 서재가 있는 마당은 명륜당 뒤쪽에 있는데, 마당에 들어서서 보면 2층만 보이는 구조다. 

 

 

 

담양향교는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03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충혜왕 때 처음 지어졌다는 설이 있으며, 조선시대인 1398년(태조 7)에 지어진 기록이 전해진다. 조선 후기 숙종과 정조 연간에 중건되고 순조 연간에 중수되어 하였다.

 

경사진 지형에 위치해 있어서 5단으로 터를 닦아 외삼문,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의 순으로 배치하였다.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앞쪽으로 두고 배향공간인 대성전을 뒤에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학공간으로 들어서는 문은 동쪽 명륜당과 동재 두 건물 사이에 두었는데, 독특한 구조다.

 

 

동재는 갑오개혁 이후 허물어져 사라졌던 것인데 최근에 복원한 모양이다.

 

 

 

서재와 대성전 내삼문

 

 

동재는 양반, 서재는 서류()의 기숙사로 이용되었다.

 

 

명륜당과 서재

 

 

 

 

대성전과 내삼문은 명륜당의 건물축과 약간 틀어져 있다.

 

 

명륜당으로 들어서는 내삼문은 명륜당 마당보다 약 4m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내삼문 오르는 언덕 양쪽으로 200여 년 된 은행나무 거목이 눈길을 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은 대성전(大成殿)이 시야를 채운다.

 

 

 

대성전에는 5성(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과 2현(주자·정자),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의 위패를 봉안하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대성전 앞마당 양쪽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동무와 서무가 자리잡고 있다.

 

 

대성전에서 굽어본 내삼문과 담양 원경

 

 

 

조선시대의 공립학교인 향교는 임진·병자 양란 이후 사립학교인 서원(書院)이 위세를 떨치면서 부진하였다고 하는데 오늘날 교육현실과 비슷했던 모양이다. 향교를 살리고자 조정에서는 향교의 흥함과 쇠함을 수령 인사에 반영하였고 효종 때에는 향교안(鄕校案)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자는 과거 응시를 허락하지 않는 등의 향교 부흥책을 쓰기도 하였다.

 

향교는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학전(學田)·노비·책·토지 등을 지급 받아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년)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교육 기능이 사라지고 지금은 봄·가을 2차례에 걸쳐 제사만 지내고 있다.

 

 

 

담양향교 앞에는 무거운 돌담이 두르고 있는 비석이 자리잡고 있다.

 

 

 

비석의 이름은 '삼은전선생유허비(三隱田先生遺墟碑)

 

 

 

이 비석은 담양 전씨(田氏)의 유래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곳은 담양 전씨가 살던 곳이었고 담양향교 자리는 원래 전씨 시조의 묘소가 있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담양전씨의 시조는 전득시(田得時). 담양에 토착 세거해온 고을 향리의 아들로 태어나 고려 의종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좌복야(左僕射;상서성 정2품) 참지정사(參知政事;중서문하성의 종2품)에 이르렀고 담양군(潭陽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의 후손은 6세까지 독자로 내려오다가 7세에 이르러 3형제가 태어났는데 이들이 '삼은전선생(三隱田先生)'이다. 첫째 녹생(야은), 둘째 귀생(뇌은), 세째 조생(경은). 모두 고려 왕조와 운명을 같이 하였다.

 

녹생은 고려 공민왕 때의 명현으로서 문신이면서도 무예에 뛰어났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친원파 권신 이인임의 주살을 상소한 일로 장류 도중 장독으로 죽었다. 그의 아우 귀생과 조생도 모두 문장에 뛰어나고 학문이 깊어 명성을 날렸는데, 고려가 망하자 귀생은 불사이군의 충절로 두문동에 들어갔으나 누차 벼슬할 것을 권유받자 절해고도로 자취를 감추었고, 조생은 깊은 산 속에 숨어서 절개를 지킴으로써 '두문동 72현록'에 올랐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 3형제를 가리켜 '삼은전선생(三隱田先生)'이라 불렀다. 특히 담양전씨는 이들 3형제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가문을 빛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