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

제주도(10) 복원 새 단장된 제주목관아

모산재 2014. 11. 28. 16:05

 

지금의 제주목 관아는 2002년에 전면적으로 복원된 것이다.

 

제무목 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훼철되어 사라져버렸고, 오로지 입구에 있는 관덕정만 원형이 훼손된 상태로나마 남아 있었다. 

 

 

관아의 정문(외대문)에는 '진해루(鎭海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바다를 제압하는 누각'이라는 뜻. '포정문(布政門)' 터에 복원한 이층누각은 이름에 걸맞는 위엄이 느껴진다. 1층은 석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목조 2층 팔작지붕집을 얹었다.

 

 

 

 

 

안으로 들어서서 바라본 진해루와 안마당.

 

 

진해루 양 옆으로는 회랑이 이어진다.

 

 

 

 

 

여기서 먼저 제주목 관아의 배치도를 살펴보고 둘러보기로 하자.

 

 

 

 

 

폐허가 된 제주목관아 터는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를 하였고, 그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역사 유물이 퇴적되어 있음을 발견하였고, 복원한 여러 건물터와 유구 · 유물도 출토되었다. 그리고 외대문에서 중대문으로 통하는 도로도 확인되었다.

 

이를 토대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覽)> 등 당대의 문헌과 전문가와 관계자의 고증과 자문을 거쳐 2002년 12월에 1차 복원을 하였고, 2006년 2층 누각 망경루 복원으로 복원은 완료되었다.복원 과정에서 제주시민들은 5만여 장의 기와를 기증하였다고 한다.

 

 

정문을 들어서면 박석이 깔려 있는 큰길이 벋어 있는데, 중문을 거쳐 관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은 이층누각 망경루에 이른다. 왼쪽으로는 장방형의 연못이 있고 그 뒤로 우련당(友蓮堂)과 홍화각(弘化閣)이 차례로 보인다.

 

 

 

 

 

중문

 

 

 

● 우련당(友蓮堂)

 

'연꽃을 벗하는 집'이라는 뜻의 이 건물은 1526년에 창건되었으며, 연회를 베풀고 공물(貢物)을 봉진(封進)하였던 곳이라 한다.

 

 

 

 

양대수라는 목사가 부임했을 때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연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는데, "양대수 개구리 미워하듯 한다."는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1694년에 중건하였고, 영조 때 중수하고 못 가운데 석대를 쌓아서 꽃과 대나무를 심고 향의실(享儀室)이라 개명하여 공물을 봉진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우련당 동쪽에는 서리들이 근무하던 영리장방터와 호적을 보관했던 창고 터가 앞뒤로 나란히 남아 있다.

 

 

 

 

 

그리고 우련당 서쪽 뒷마당에는 전복ㆍ해삼ㆍ표고버섯 등 진상품을 보관하던 예방고(禮房庫) 터가 보인다.

 

 

 

 

 

● 홍화각(弘化閣)

 

우련당 뒤에 자리잡은 홍화각은 절제사(節制使)의 집무실로 '탐라고각(耽羅高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건물 중에서 가장 웅장하였다.

 

왕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널리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진 건물이다.

 

 

 

 

 

1435년(세종 17)에 창건한 뒤 1648년에 중수하였으며, 1713년(숙종 39)에 영리청(營吏廳)이 되었다. 그 뒤 1772년 중수하였고 1829년에 개건하였다.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었다. 세종 때의 문신 고득종이 쓴 '홍화각(弘化閣)'이란 편액과 '홍화각기(弘化閣記)'가 새겨진 현판은 고양부삼성사(高梁夫三姓祠)에 보관되어 있고 지금의 현판은 탁본하여 새긴 것이다.

 

 

 

 

 

● 영주협당(瀛州協堂)

 

홍화문 동쪽 길 건너편에 있는 건물로, 목사를 보좌하는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이다. 처음에는 15인의 군관이 근무했으나 효종 때 10인으로 줄었다.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832년에 중건되면서 공제당(共濟堂)으로 이름이 개칭되었다.

 

 

 

 

 

● 귤림당(橘林堂)

 

영주협당 뒤에 자리잡고 있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사모지붕집으로,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귤림당중수기'에 "공무를 보는 여가에 지팡이를 짚고 과원(果園)을 산책하노라면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지에 열매 가득한 나무들을 쳐다보노라면 심신이 다 상쾌해진다."라는 구절이 있어 관리들의 근무 중 쉼터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홍화각 추녀와 담장 사이로 보이는연희각(延曦閣)

 

 

 

연희각과 망경루

 

 

 

 

● 연희각(延曦閣)

 

연희각은 제주 목사가 집무하던 동헌(東軒)이다. '연희(延曦)'라는 이름은 '햇살을 이끈다'는 뜻으로 '외신(外臣)이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17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884년 중수하였으나 1924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헐리고 말았다.

 

연희각의 옛 기문(記文)이 없어서 건립 시기를 상세히 알 수가 없고, 현판도 누가 명명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연희각 마당 서쪽에는 동헌 내아(內衙) 터가 남아 있는데, 지방수령의 살림집인 내아는 제주목의 경우 가족이 거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간혹 친인척이 유람을 하기 위해 방문하거나 자제들이 안부를 묻기 위해 찾아 왔을 때 거처하였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남아 있는 터가 작다.

 

 

 

 

귤림당 뒤편에는 비석들이 서 있다. 각지에 산재해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인데, 거의 송공비나 송덕비다.

 

 

 

 

 

● 망경루(望京樓)

 

제주목 관아의 중앙 가장 안쪽에 자리잡은 2층누각으로, 임금의 은덕을 기리면서 제주도 앞바다로 침입하는 왜구를 감시하는 망루 역할을 하였다. 

 

1556년 창건하였고 1806년 중수하였는데, 일제시대에 훼철되었다.

 

 

 

 

현재 탐라순력도(보물 제652-6호)를 테마로 한 체험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1700년대 조선시대 제주의 사회생활, 명승지, 방어유적, 진상 등 이형상 목사가 제주를 순력하면서 보여주는 여러 상황들을 각각의 그래픽 패널 및 영상물을 통하여 당시 제주의 생활상과 역사를 체험해 볼 수 있다. 

 

 

 

 

 

※ 제주목관아 안내도

(출처 : 제주목관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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