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 산하와 문화재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228호)과 석종비(보물 229호), 석등(보물 231호)

by 모산재 2014. 11. 23.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 1320-1376)이 양주 회암사(檜巖寺) 주지로 주석하던 중 1376년(우왕 2) 왕명으로 밀양의 영원사(塋源寺)로 가던 길에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떠도는 이야기로는 현재의 강월헌 앞 암반 위에서 다비를 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그 자리에 있는 작은 3층석탑은 다비를 한 자리에 세워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입적 3년 뒤(1379년)에 각신(覺信)과 각주(覺珠) 등이 주선하여 신륵사를 크게 중창한 뒤, 조사당 뒤쪽의 명당을 골라 혜근의 묘역을 마련하고 승탑을 건립하였다.


석종 모양으로 만든 승탑과 부도비, 석등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었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보제존자 석종(보물 228호)


고려 말의 대선사였던 나옹 혜근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부도)이다. 혜근의 사리를 안치한 또 하나의 승탑,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보물 제358호)이 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높이 1.9m. 승탑은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型)을 따르지 않고, 고려 말기에 영향에 미쳤던 라마탑(喇嘛塔)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받침돌은 금강계단(金剛戒壇)처럼 네모난 모습이다. 낮으면서도 넓은 받침돌 위에는 받침돌 주변과 같이 박석이 깔려 있다. 받침돌 가운데부분에는 2단의 받침이 마련되었으며, 그 위에는 종처럼 생긴 석종형(石鐘形) 몸돌이 놓여 있다. 받침돌의 앞쪽은 물론 왼쪽과 오른쪽의 중간 쯤에는 2단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각 면의 모서리에는 간략한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석종형 몸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완만한 타원을 이루어 가운데부분이 볼록한 편이며, 겉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어깨부분은 마치 잘라진 포탄처럼 평평하게 다듬어졌으며, 그 위에는 불꽃 무늬를 새긴 단면 4각의 보주(寶珠)가 장식되어 있다.


석종형 승탑은 양산 통도사, 김제 금산사, 달성 용연사 등에도 자리하고 있다. 이 승탑은 통도사와 금산사의 석종형 승탑과 함께 계단탑 양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주로 조선시대에 조성되었던 석종형 승탑의 선구적인 양식을 갖추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전체높이 212㎝, 비신높이 121㎝, 너비 61㎝. 지대석과 3단의 장방형 대석 위에 비신을 얹었는데 상단의 대석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양옆에 화강암기둥을 세워 보강하고, 그 위에 목조건물의 공포와 기왓골을 조각한 옥개석을 얹었다. 신라시대 이래로 귀부와 이수를 갖춘 일반화된 석비 형식이 고려 말기에는 대석과 옥개석으로 변형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이 비가 고려 말기의 석비 형식을 잘 보여준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李穡)이 짓고 명서가인 한수(韓脩)가 썼다. 글씨는 자경(字徑) 2㎝ 정도의 해서로 넉넉한 짜임새와 부드러운 필획이면서 흐트러짐이 없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높이 1.94m. 고려시대 석등 중 우아한 형태와 장식성이 돋보이는 우수한 작품이다. 석조부도(石造浮屠)의 형식을 모방한 석등으로서, 상대(上臺)·하대(下臺)의 명확한 구별이 없이 한 돌로 구성된 점은 석등이 형식화되는 시대적 추이를 짐작하게 한다.


8각의 지대석 위로 8각의 하대와 복엽복판(複葉覆瓣)의 연꽃을 매우 두껍고 도식적으로 장식하였다. 간주석(竿柱石)은 짧아져 마치 석조부도의 중대(中臺)와 유사하며, 모서리마다 난간형(欄干形)을 장식하였다. 또한, 그 사이 면에는 안상(眼象)과 중앙 화문(花文)을 낮게 부조(浮彫)하였다. 상대는 하대의 연판과 동일한 복엽앙련(複葉仰蓮)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 한단의 낮은 층급과 다시 턱이 높은 층급을 만들어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을 받쳤다.

이러한 기단 형식은 보림사서부도(寶林寺西浮屠, 보물 제156호)의 기단과 매우 흡사하여 주목된다. 상대 위에는 화사석 받침의 표현이 전혀 없이 바로 화사석을 얹어놓았다. 이 화사석은 기타의 부재와 달리 그 재질이 화강암이 아니고, 납석제(蠟石製)인 점이 특이하다.


8면의 면마다 상부를 꽃모양으로 장식한 화창(火窓)을 뚫었고, 각 면의 모서리에는 돌출된 원형기둥과 율동적 형태의 용을 고부조(高浮彫)하였다. 화사석 상부면에도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조각하고 그 아래 기둥 사이 면마다 하강하는 듯한 비천상(飛天像)을 고부조로 장식하였다. 이와 같이 화사석을 납석제로 만들었기 때문에, 섬세한 고부조 장식을 표현하기가 더욱 용이하였다고 생각된다. 화사석 위로는 전각(轉角)이 두꺼운 옥개(屋蓋)가 올려져 있는데, 기왓골의 표현이 없이 각 면의 합각에 우동(隅棟: 옥개석의 귀마루)만을 둥글게 돌출시켰다. 옥개와 한 돌로 이루어진 상부면 중앙에는 복발형(覆鉢形) 장식을 표현하였으며, 그 위로는 2단의 층급을 이룬 뒤 연봉형의 보주(寶珠)를 올려놓았다.


전체적으로 크기가 작으면서도 각 부의 구성이 안정감 있고, 특히 화사석의 화려한 장식미가 돋보이는 작품으로서 고려 말기의 석등 형식을 대변하여 주는 귀중한 예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