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여주, 봉미산 신륵사 가을 빛에 잠기다

모산재 2014. 11. 22. 14:32

 

 

 도자기 축제로 신륵사를 찾은 사람들이 많다.

 

 

 

 

신륵사 주변의 숲과 나무들이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가을이 깊어졌음을 알린다.

사람들의 옷빛깔도 단풍 못지 않게 화려하다.

 

 

아름다운 일주문

 

그런데 사찰을 돌아보고나면 일주문이 너무 커서 부조화스럽다는 걸 느끼게 된다.

1980년대에 수입 원목으로 초거대 일주문을 세웠다 철거하고 세운 것이지만 여전히 아이가 어른 옷 입은 느낌이다.

 

 

 

평지로 나즈막하게 솟은 봉미산(鳳尾山) 품에 아늑하게 안겨 여강을 앞에 두고 있으니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세종대왕릉이 여주로 이장된 이후 세종대왕릉을 지키는 원찰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왼쪽에서부터 관음전, 적묵당, 범종루, 식수대인 세심정(洗心亭)

 

 

 

대개의 사찰을 누문을 통해 법당으로 들어가지만, 신륵사는 구룡루(九龍樓)라는 누문이 존재함에도 바로 앞 범종각 옆으로 들어선다.

옆으로 넓게 트인 공간 때문에 누문이 법당의 축으로서의 긴장감을 갖지 못한 때문으로 보인다.

 

 

 

시무나무 한 그루.

느릅나무과의 나무로 무시무시한 가시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구룡루(九龍樓) 누문을 따라 법당으로 들러가 보기로 하자.

 

원효대사가 꿈속에서 흰옷 입은 노인의 점지를 받고 아홉 마리의 용을 위해 7일간의 기도를 올리고 연못을 메워 지었다고 한다.

 

이 전설의 의미를 담은 듯 극락보전 앞의 누각 이름은 구룡루(九龍樓).

 

 

 

예전에는 누문 아래를 벽돌로 담을 둘러 놓았는데, 그것을 다 뜯어내고 이층누문의 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하지만 아래층의 공간이 낮아서 여느 절처럼 누마루 아래로 통과해서 법당마당으로 들어설 수 없는 구조다.

선운사처럼 평지형 법당이기 때문이다. 

 

 

 

극락보전

 

세종대왕의 원찰이기 때문에 주법당이 극락보전인데 이는 극락(서방정토)을 지키는 아미타불의 궁전이다.

 

 

 

보물 225호 다층석탑

 

원각사지 석탑과 재질과 양식이 비슷한 대리석탑으로 2층기단에 8층탑신을 올렸다.

위층기단에 용과 구름 무늬를 새긴 것은 석탑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창건설화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아미타여래삼존상의 주불은 아미타불, 양쪽에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 시립하고 있다.

 

 

1610년 조각승 인일(仁日)에 의해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고, 2012년 12월 27일 보물 제1791호로 지정되었다.

 

 

 

극락보전 뒤편 조사당 마당의 향나무 

 

무학대사가 스승인 나옹화상을 추모하여 심었다는 수령 500년 된 향나무.

 

 

 

 

조사당 서쪽에 자리잡은 조선시대 양식의 부도 2기

 

 

 

보물 제 180호 조사당

 

정면 1칸 측면 2칸의 독특한 팔작지붕집으로 지공, 나옹, 무학 등 3대의 스승과 제자 스님의 영정을 모셨다. 

 

 

 

차례대로 지공, 나옹, 무학의 영정인데, 가운데 나옹의 영정 앞에는 목조상을 따로 모셔 놓았다.

 

 

 

뒤쪽 언덕 위에서 바라본 조사당

 

 

 

나옹의 사리탑으로 가는 숲길에 핀 이고들빼기 꽃

 

 

 

조사당 뒤 산 중턱 솔숲에는 나옹의 사리탑과 사리탑비, 그리고 석등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나옹의 사리탑인 '신륵사보제존자석종'(보물 228)이 자리잡고 있다.

(나옹은 호, 법명은 혜근이고, 법호는 보제존자이다)

 

 

 

사리탑 앞의 석등(보물 231호)은 화사석이 납석으로 되어 조각되어 있는 것이 독특하다. 

 

 

 

그리고  맨 입구 쪽에 보제존자석종비(보물 229호)가 세워져 있는데, 이색이 지은 비문이다. 

 

 

 

나옹의 사리는 무려 세 사찰에 사리탑으로 모셔져 왔다.

 

나옹이 입적하고 다비된 곳은 이곳 신륵사로서 바로 보제존자석종이 그 하나이고,

나옹이 오래도록 머물며 주지로 있었던 회암사 터에 보전되고 있는 사리탑이 그 둘이고 

나옹화상의 제자에 의해 세워진 원주 영전사 터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국립중앙박물관 사리탑이 그 셋이다.

 

 

극락보전 뒤로 보이는 심검당과 담장의 아름다운 조화

 

 

 

극락보전 뒤편의 삼성각(三聖閣)

 

 

삼성(三聖)은 나반존자로 불리는 불법 포교자인 독성, 무속신인 산신과 칠성신을 가리킨다.

 

 

 

600년 된 은행나무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 230호)를 보호하는 비각

 

 

 

대장각기비는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나옹과 대장각을 세운 내력을 이숭인이 지은 것을 새긴 비석인데,

파손이 심해 읽을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강월헌(江月軒)과 삼층석탑

 

삼층석탑과 강월헌은 나옹화상의 다비를 기념하여 세웠다고 한다.

 

 

 

나옹화상 혜근(, 1320~1376)은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했는데 그의 다비식이 바로 이 바위 위에서 이루어졌다 한다. 나옹의 문도들이 그를 추모하여 석탑을 세우고 정자를 세웠는데, 정자의 이름을 나옹의 생전 당호인 '강월(江月)'을 따 이름 붙였다.

 

본래의 누각은 혜근의 3층석탑과 거의 붙어 있었으나 1972년 홍수로 옛 건물이 떠내려가자 1974년 3층석탑보다 조금 더 아래쪽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강월헌을 돌아나오며 축대 아래에서 바라본 법당 마당 풍경 

 

 

 

 

신륵사 입구 쪽에 있는 조포나루터

 

 

서울의 마포나루와 광나루, 그리고 여주의 이포나루와 조포나루는 한강을 건너는 4대 나루였다.

 

그런데 963년 안양의 초등학생들이 수학여행을 왔다 돌아가는 배가 전복되어 49명이 희생되는 참변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이듬해 여주대교가 건설되면서 조포나루는 폐쇄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