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여주, 영월루와 두 보물 석탑(하리삼층석탑, 창리삼층석탑)

모산재 2014. 11. 21. 13:53

 

서울에서 찾아가기 편하고 돌아볼 곳도 많은 곳이 여주다.

 

도예단지에서 도자기 구경하는 재미도 괜찮고 신륵사가 있고 세종대왕릉인 영릉도 있다. 명성황후 생가도 들러볼 만하고 목아박물관도 볼거리가 풍성하다. 폐사지로 고달사지만큼 아름다운 곳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걷기길로 여강을 따라 걷는 55km의 긴 여강길이 있다.

 

 

 

출발할 때는 여강길을 걸어볼까 나섰는데, 어찌하다보니 신륵사만 돌아보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 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여주대교를 향하다가 잠깐 영월근린공원의 영월루迎月樓))에 올랐다가 내려오면서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 두 기를 구경하였다.

 

 

상리 사거리에서 바라본 영월근린공원

 

 

 

아담하게 잘 꾸며진 근린공원, 편안한 느낌을 준다.

 

 

 

 

영월루(迎月樓) 유래를 여주문화원에서 찾아보니...

 

본래는 조선시대 여주 관아의 정문으로 '기좌제일루(畿左第一樓)'란 편액을 달고 있었다고 하는데, 1925년 여주 관아 자리에 근대식 군청 건물이 들어서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으면서 이름도 영월루라는 정자명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무심히 바라보면 여강의 절벽 위, 정자 위에 올라 여강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맞이하는 아름다운 정자로 잘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이런 역사를 알고보니 '경기좌도의 제일문'이었던 위엄을 자랑하던 관아 정문이 일제에 의해 권력을 빼앗기고 여강변으로 추방되어 음풍농월이나 즐기는 신세로 전락한 듯 쓸쓸한 느낌이 묻어온다. 근대사의 아픔이 아로새겨져 있다.

 

 

 

 

본래 이 영월루 자리에는 조선 세조 때 의학과 경사(經史)에 밝았던 임원준(任元濬,1423~1500)이 지은 사우당(四友堂)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한다. (임원준은  폐비 윤씨가 사사된 내력을 연산군에게 알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게 만든 장본인인 임사홍의 아버지다.) 

 

서거정의 사우당(四友堂) 기문(記文)이 전해지고 있지만 사우당은 그 뒤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알 수가 없고 그 자리에 영월루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집. 8세기 말 건물로 추정되며 경기도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누마루에 오르면 신륵사와 여강을 내려다보는 풍광이 더없이 아름답고, 멀리 원주 치악산과 양평 용문산도 바라보이는 전망이 빼어나다.

 

사우당 한쪽 면에 조그만 누각도 있어 이곳에서 많은 시인 묵객들이 뱃놀이를 즐겼다 한다. 옛날에 이곳에 선녀가 내려와서 놀았다는 전설이 있어 이곳을 유선대라 하였는데, 지금은 다리가 놓이고 도로와 택지가 들어서면서 흔적이 사라졌다고 한다.

 

서쪽으로 보이는 여주 시내 풍경

 

 

여덟 명의 승지가 나왔다는 팔승지골은 바로 앞 여흥초등학교 뒤편, 유선대는 바로 왼편 세종고 자리,

1946년 소실되었다는 청심루(淸心褸)터는 좀더 하류쪽 여주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유유히 시원스럽게 흘러가는 여강 건너편으로 멀리 숲속에 묻힌 신륵사가 보인다. 

 

 

 

 

누각 바로 아래로는 커다란 바위가 절벽을 이루는데 이 바위를 '마암(馬巖)'이라 한다. 

 

이곳에서 황마(黃馬=구렁말)·여마(驪馬=가라말)가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로부터 여주의 옛 이름인 '황려(黃驪)'가 생겼고 황려는 '여흥(驪興)'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의 여주로 변한 것이라 한다. (참고로 명성황후의 성씨는 바로 여흥민씨이다.)

 

 

 

 

영월루 바로 아래 언덕에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 두 기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이름은 차례대로 여주 창리 삼층석탑(보물 제91호), 여주 하리 삼층석탑(보물 제92호)으로 두 기 모두 1958년에 이곳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여주 하리 삼층석탑(보물 제92호)

 

여주 시내 하리 절터에 있던 것인데 그 절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양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 중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시대 삼층석탑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은 모습인데, 상륜부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기단은 4면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고, 그 윗돌 중앙에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2단의 테두리 조각을 둘렀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의 각 면 모서리마다 얕은 기둥 형태의 조각이 나타나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으로,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쪽 귀에서 위로 약하게 솟아있다. 전체적으로 돌을 짜서 올리는 수법의 규칙성을 보이고 온화한 비율감이 느껴져 고려 전기보다는 중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탑을 옮겨 세울 당시, 1층 몸돌에서 독특한 모습의 사리홈이 발견었다. 몸돌 윗면의 중앙에 높이 3㎝의 얇은 띠가 둘러져 있고 그 안으로 2개의 구멍이 파여 있는데, 이와 닿게 되는 지붕돌의 밑면에도 이를 배려한 듯 홈이 깊게 파여져 있다. 이는 몸돌의 윗면에만 깊은 홈을 두어 사리를 담아두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 정반대의 형태를 하고 있어 특이하다.  

 

 

 

 

여주 창리 삼층석탑(보물 제91호)

 

원래 창리의 과수원 안 옛 절터에 있던 것을 1958년 현재의 터로 옮긴 것이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일반적인 형태이나, 1층 몸돌 밑에 새겨지는 복련이 이 탑에는 하층 기단에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아래 기단의 4면에는 안상(眼象)이 2개씩 새겨져 있는데, 움푹한 무늬의 바닥선이 꽃모양처럼 솟아올라 있어 당시의 조각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기단을 마감하는 맨 윗돌에는 엎드린 연꽃 모양의 조각을 둘러놓았는데, 보기 드문 모습이다. 탑신은 독특한 수법으로 돌을 올려놓고 있다. 즉 1층의 몸돌만 하나의 돌을 사용하였고, 이후 지붕돌부터는 위층의 몸돌과 하나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모자 형태의 돌 3개를 얹어놓은 듯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3단이며, 추녀는 매우 두껍고 귀퉁이 끝의 들림도 희미하다.

 

현재 최상층의 옥신과 옥개석의 비례는 2층옥개석과 3층옥신의 크기와 맞지 않아 그 사이에 1층이 빠지지 않았나 의심된다. 따라서 원래는 5층탑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조각수법도 엉성하고 몸돌과 지붕돌을 각 하나의 돌로 쌓는 등 간략한 모습들도 여기저기 보이고 있어 고려 중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가을 햇살을 받으며 꽃을 피운 흰선씀바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