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만 여행

동티베트(22) 문성공주가 넘던 일월산을 넘다

모산재 2014. 11. 7. 18:37

 

2014년 8월 2일 토요일. 시닝-청해호-차카염호

 

 

 

 

6시에 일어나 7시에 아침식사를 한다. 식당의 우유가 유난히 신선한 맛이다. 아마도 우유가 아니라 양유인지 모른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맛본 양유의 맛이 절로 떠올랐다. 티베트 고원의 청정 풀을 뜯어먹은 양의 젖...

 

 

오늘은 일월산을 넘어 청해호를 지나 차카염호를 가게 된다. 일월산은 당 태종의 양녀 문성공주가 티베트 왕인 송첸캄포에게 시집가면서 넘었던 산이다. 그 길을 당번고도(唐蕃古道)라 하는데, '당나라와 토번을 잇는 옛길'이란 뜻이다. 오늘 우리는 바로 문성공주가 갔던 길을 따라 일월산을 넘게 된다.

 

 

 

 

8시 10분 호텔을 나선다.

 

 

호텔 프런트에 있던 타블로이드판 신문 한 장 들고 나섰는데, 너무도 뜻밖에 거기에 쿠처 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중국 최후의 세습 왕야 세상을 떠나다"라는 제목으로...

 

 

 

 

 

 

다우티(達吾提)라 불리는 쿠처 왕은 18세기 중반 청 건륭제로부터 회왕에 봉해진 후 200여 년에 걸쳐 이어져 온 제 12대 위구르 왕이다. 2006년 실크로드 여행 당시에 쿠처왕부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 일이 있었는데, 중국 인민 정권이 들어선 뒤에 왕의 지위와 권력은 사라졌지만 중국 정부의 협조자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쿠처왕은 18세기 중반 대호자, 소호자(大小和卓) 등 위구르인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댓가로 위구르인 미자르에게 준 세습 친왕으로 위구르인들에게는 썩 유쾌한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이완용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쿠처왕부는 청나라와 중국과는 늘 협조의 관계 속에서 명맥을 이어 왔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http://blog.daum.net/kheenn/15856503 참조)

 

 

 

어쨌든 위구르인의 영욕을 상징하는 한 인물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청해호 가는 길에 접하니 묘한 느낌이 든다.

 

 

 

 

각설하고...

 

 

"아니, 여자들이 예뻐 보이고 가슴이 벌렁벌렁하네~!"

 

버스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갑자기 손 선생님이 너스레를 떠는 바람에 폭소가 터진다. 차카염호로 가는 길에 해발 3천 m를 훨씬 넘는 고개를 넘는다고 고산병 예방약으로 쓰는 비아그라를 먹었다는 그녀... 

 

 

그러더니 다시 트렁크를 번쩍 들어올리며,

 

"짐이 하나도 안 무겁구만~."

 

가녀린 몸매에 보이쉬한 목소리를 내지르며 힘 자랑을 하는 모습에 다시 한번 차내에는 유쾌한 웃음이 피어난다.

 

 

 

주 활동 근거지가 사천성인 가이드 국평 씨가 사천성 겨울 여행을 적극 권유하며 지진, 요리, 술과 주정뱅이, 미인으로 유명하다는 사천성 이야기를 한다. 그 때 들었던 내용이 그대로 기억나진 않지만 이를 키워드로 내용을 재구성해 본다.

 

 

2008년 사망자만 7만여 명이었던 사천성 지진과 산동 요리·광동 요리·강절(강소성과 절강성)요리와 함께 중국 4대 요리로 매운 맛이 유명한 사천 요리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

 

그런데 사천성은 미녀가 많기로 유명하단다. 양귀비도 산시성 출신이지만 숙부댁이 있는 사천에서 자랐단다. 매운 요리 탓인가, 사천성 여자는 맵고 예쁘단다. 말이 빨라서 말싸움할 때는 매운 맛이 대단하고 아양을 떨면 모두 나가 떨어진단다. 예전 청뚜(성도)와 사천성에 속했던 충칭과 길거리에는 ‘세 발짝만 걸으면 장만옥, 다섯 발짝만 걸으면 임청하’란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들로 충만했단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술로 유명하단다. 중국의 7대 명주 중 우랑예(五粮液)와 랑주(郞酒) 등 둘이나 차지할 정도. 그리고 이 지방 옛 이름(劍南道)을 딴  '지엔난춘(劍南春)'이란 술이 유명한데, 이곳이 고향이나 다름없는 이태백이 즐겨 마셨다 한며 소동파가 "항아리를 여니 3일 동안 성 안에 향이 가득하네(三日开瓮香满城)" 라고 극찬했다고 전해지는 술이다. 목숨 걸고 술을 마셨다는 두보도 안록산의 난을 피해 사천성에 4년이나 머물렀다니 술을 좀 마셨을까. 매운 쓰촨 요리에 52도짜리 쓰촨 술이 얼마나 잘 어울리겠는가, 주정뱅이가 많을 밖에...

 

 

 

10시 경, 드디어 일월산(日月山)이 시야에 들어온다.

 

완만한  초원의 구릉으로 상승해 가던 길이 고개를 넘는다. 그 고갯마루에 보이는 두 개의 정자와 만국기처럼 나부끼는 타르촉. 

 

두 개의 정자를 일정(日亭)과 월정(月亭)이라 부른다. 정자 아래로 당나라 땅에서 토번 땅으로 넘어가는 옛길, 당번고도가 보이고  하얀 문성공주상 석상과 문성공주기념관이 보인다.

 

 

 

 

 

 

 

당과 토번이 세력을 떨치던 시기인 7세기 무렵부터 약 2백여 년 간 당번고도는 사신만 142차례나 왕래하였을 정도로 군사, 문화, 종교, 무역 등 다방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또 하나의 실크로드였다. 물론 쿤룬산맥을 넘어 서역으로 이어지는 국제적인 교역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 길은 문성공주가 넘었던 길일 뿐만 아니라 백제 망국민인 흑치상지가 넘었던 길이기도 하다.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었던 그는 662년 당 고종의 회유에 당 장군 유인궤에게 항복하고 부흥군을 무너뜨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양주자사가 되어 지낸다.

 

 

7세기 후반 당과 토번 사이에는 청해 지역을 두고 치열한 격전이 수차례 벌어지는데 결과는 당이 거의 완패를 당한다. 670년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주역인 설인귀·소정방이 이끄는 10만 당군은 칭하이 남쪽 대비천(大非川) 전투에서 토번에 궤멸 당하다시피하였다. 설인귀는 생포되어 가르친링에게 끌려왔고 다시는 토번을 공격하지 말라는 훈계를 듣고 풀려난다.

 

678년 18만 대군을 보낸 승풍령(承風嶺) 전투에서도 또 다시 대패하는데 이 때 흑치상지의 5백 결사대가 포위망을 뚫어 무능한 사령관 이경현을 구해내고 후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벌어진 양비천 전투에서도 이경현의 당군은 또다시 대패했지만 흑치상지는 정예 기마병으로 야음을 탄 기습 공격으로 가르친링의 본거지를 무너뜨리고 큰 공을 세워 청해호 일대의 사령관인 하원군경략대사(河源郡 經略大使)로 부임하여 시닝에 주둔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일월산에서 흑치상지를 기억해 주는 흔적도, 사람도 없는 듯하다. 오로지 문성공주를 위한 기념물만 있을 뿐...

 

 

 

 

 

 

고개 너머에 있는 주자장에 차를 세운 다음 일정과 월정에 올라 문성공주의 흔적을 돌아보기로 한다.

 

 

 

 

 

티베트 삽살개 장오(藏獒, 일명 사자견) 두 마리가 관광객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고개의 높이는 해발 3,520m. 치렌산맥에 속하는 일월산은 최고 높이 4877m.  티베트어로는 '니마다와(尼玛达哇)'라고 하는데 해와 달을 의미한단다.

 

원래 이름은 붉은 빛을 띠는 고개라 하여 '적령(赤嶺)'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성공주가 이 고개를 넘으면서 태종이 고향이 그리워지면 보라고 하사한 일월보경(日月寶鏡)을 산 아래에 던져 깨뜨렸는데, 이로부터 산 이름을 르웨산(日月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음 속으로부터 당나라와 고향을 지우려 한 공주의 모진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전설이다.

 

 

 

거울이 두 쪽 난 것을 표현한 것일까. 고개에는 일정(日亭)과 월정(月亭)이란 두 정자를 지어 놓았다.

 

 

월정을 오르며 바라보는 일정

 

 

 

 

 

박제가 아닌가 싶게 서 있는 야크 한 마리. 관광객들을 태우고 돈을 버는 광광 상품이다. 고갯길 곳곳에서 야크는 관광 상품이 되고 있다.

 

 

 

 

 

월정 안에는 '문성공주 진장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문성공주가 송첸캄포에게 시집가게 된 전후에 얽힌 이야기들이 적혀 있다.

 

 

 

 

 

타일에 새긴 벽화

 

 

 

 

 

 

 

일정 속에 있는 당번분계비(唐蕃分界碑).

 

이 비는 바로 일월산의 이 고개가 당나라와 티베트의 경계였음을 증거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고개 너머 청해호가 있는 청해성이 역사적으로 티베트 땅이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달라이라마 사진이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는데, 최근에야 달라이라마 사진을 내거는 것이 허용되었다.  

 

 

 

 

 

 

일정의 벽화

 

 

 

 

 

일정에서 바라본 쵸르텐 풍경

 

 

 

 

 

 

당나라 쪽 영토였던 시닝 쪽 풍경. 오른쪽으로 문성공주상과 기념관이 보인다.

 

 

 

 

 

티베트 영토였던 청해호 쪽 방향

 

 

 

 

 

일정과 월정

 

 

 

 

 

 

 

 

 

※ 문성공주(文成公主, 623~680)에 대하여

 

문성공주의 이름은 설안(雪雁)이었다. 태종의 양녀로 그냥 '종친의 딸'이라고도 하고, 당 태종의 4촌 동생인 강하왕(江夏王) 이도종(李道宗)의 딸이라고 하며 누이라고도 한다. (이도종은 당태종의 대 고구려 전쟁에 참여하여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 전투에서 토성작전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당 태종에겐 친딸이 무려 21명이나 되었지만, 유목민족과의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 양녀 제도를 이용했던 모양이다. 황제의 친딸을 오랑캐에게 내놓지 않으려 종친의 딸을 공주로 두었는데, 부친이 입궐할 때 따라온 이설안이 그 총명함과 어여쁜 외모로 당 태종의 눈에 띄어 문성공주로 궁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외모는 단아하면서도 미려했고 풍만한 몸매에 희고 깨끗한 피부를 지녀 천상의 선녀와도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16살에 이미 대의에 매우 밝았으며 심성이 착하고 총명하며 재주가 뛰어났다. 책을 많이 읽어 천문과 지리도 잘 알았으며, 수많은 불경을 깊이 연구하고 학문에도 정통했다.

640년, 그녀의 나이 18세에 낯선 오랑캐의 땅, 티베트를 통일한 토번 왕 손첸캄포와 화친을 위한 정략 결혼을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티베트에는 수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게 된다. 그녀는 티베트에 처음으로 불상과 불교경전들을 가지고 들어갔고 천문학, 풍수지리, 의학, 신학 등 18종의 과학 서적들과 자료들을 가지고 들어갔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데려온 장인들을 거느리고 풍수지리에 따라 사원을 짓고 불교 미술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송첸캄포와 그의 비, 브리쿠티 데이비(尺尊公主), 그리고 문성공주(오른쪽)

 

사진 출처 : 위키피디어

 

 

 

 

☞ 문성공주에 대한 위키백과의 글

634년 손챈감포는 당나라의 선진적인 문물과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방법을 논의하였고, 가르통첸은 당나라의 황제에게 혼인을 청할 것을 권했다. 이에 따라 손챈감포는 당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국혼을 하고자 한다는 의향을 전달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마침 당나라는 돌궐에 형양공주를, 토욕혼에 홍화공주를 시집보내기로 한 상황이었고, 당나라에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 토번의 혼인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손챈감포의 구혼이 실패로 돌아가자 질책받을 것을 두려워한 사절단은 토번에 돌아와 토욕혼이 사이를 이간질하여 허락을 받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대노한 손챈감포는 638년 작은 충돌을 이유로 토욕혼을 공격하였고 당나라에도 공주를 내놓지 않으면 당나라를 정벌하겠다고 선포했다. 실제로 손챈감포는 25만의 군사를 이끌고 송주(지금의 쓰촨 성 쑹판 현)까지 진격했다. 태종은 병부상서 후군집을 보내 토번의 군사를 물리치는데 성공했으나 이 일로 태종과 손챈감포는 서로의 국력을 무시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손챈감포는 640년(정관 14) 황금 오천 냥과 수백 가지의 진귀한 보물과 함께 가르통첸을 장안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고 자신을 대신해 구혼하게 하였고, 이 청혼 장면은 염립본이 그린 <보연도>라는 그림으로 남아 있다. 장족의 전설에 따르면 당시 장안에는 각국에서 찾아온 구혼 사자가 무척 많았는데 태종은 이들 사자에게 난제를 풀게 하였다. 가르통첸은 태종이 낸 난제를 모두 풀었고 태종은 결국 문성공주를 토번으로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다.

문성공주는 본래 황족 출신이 아니었으나 어려서 부친과 함께 궁중에 들어갔다가 당 태종의 눈에 띄어 문성공주로 책봉되고 후궁에서 지내게 되었다. 혼사가 결정되었을 당시 공주는 스물 세 살로 외모가 아름다웠으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 천문과 지리에 정통하고 점을 칠 줄 알았으며 불교예도 조예가 깊었다. 문성공주는 자신이 토번에 시집가야 한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실망하였으나 가르통첸에게서 어떤 나라인지 자세히 듣고 충분한 준비를 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혼인이 한족의 문물을 토번에 전수하는 의미있는 일임을 알고 있었기에 사서오경과 아상가의 《유가사지론》, 《예림삼백육십법보감》(藝林三百六十法寶鑒), 《공예 육십법》(工藝六十法)을 비롯한 방대한 양의 서적과 석가모니 불상 등을 가지고 가기로 했고, 토번의 풍토에서도 견딜 수 있는 순무 종자 등도 챙겼다. 또한 공주의 혼수에는 토번에 없는 곡물, 과일, 채소 종자와 누에 종자 등도 포함되었으며 의약품과 공구 등도 있었다.

공주는 유모와 수행원 일가를 비롯해 장인, 요리사, 호위병 등도 데려갔다. 태종은 예부상서 강하왕(江夏王) 이도종에게 공주를 호위하도록 했고 641년(정관 15) 문성공주는 이도종의 호위 하에 토번으로 향했다. 장안에서 토번까지 가려면 큰 강을 건너야 했는데 강의 물살이 완만해지는 시기가 겨울이었던 터라 공주 일행은 한겨울에 길을 떠나야 했다. 청해에 다다른 공주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 천하의 강물이 모두 동쪽으로 흘러가건만, 나만 홀로 서쪽으로 가는구나.”

공주 일행이 토번의 변경인 하원에 도착하자 손챈감포는 라싸 근방까지 마중나가 영접을 하였다. 그는 당나라의 사위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당나라에서 보내온 옷을 입었는데 이로써 한족의 옷을 입은 최초의 토번 사람이 되었다. 손챈감포와 문성공주는 백해(지금의 칭하이 성 찰릉호)에서 혼례를 치렀고 이도종은 당나라로 돌아갔다. 토번의 백성들은 명절에 입는 옷차림을 하고 춤과 노래로 공주를 열렬하게 환영했다. 손챈감포는 공주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서적과 당나라 장인들의 기술의 도움을 받아 포탈라 궁을 지었다. 또 손챈감포는 불교 신자인 공주의 영향으로 불교를 제창하고 대소사(大昭寺)라는 절을 지었다. 대소사를 지을 때 공주는 문을 서쪽으로 내어 서역에서 경전을 구하는 것을 상징하게 했다고 전한다. 대소사 앞에 당나라에서 가져온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사람들은 이를 당류(唐柳), 또는 공주류(公主柳)라고 불렀다. 건축 외에도 공주는 토번에 당나라의 여러 문물을 전파했는데 토번 사람들에게 농업 기술을 전수하여 농작물의 수확량을 크게 늘려 주었으며 토번의 부녀자들에게 길쌈을 가르쳐 야크 가죽과 털이 아닌 얇고 가벼운 옷을 입을 수 있게 했다. 공주가 당나라의 장인들에게 만들게 한 물방아로 토번 사람들은 수력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공식적인 역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토번은 공주의 소개로 당의 천문역법인 육십갑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공주가 데려온 악사들은 당의 음악을 알렸으며, 문사(文士)들은 토번의 대신과 귀족 자제를 가르쳤다. 손챈감포는 토번의 귀족 자제를 장안으로 보내 학문을 배우게 했고 당나라도 많은 학자와 장인들을 토번에 파견해 문화를 전수하게 했다.

1649년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은 손챈감포에게 부마도위로 제수하고 서해군왕(西海郡王)에 봉하였다. 손챈감포가 고종에게 충성을 표하고 태종의 영전에 열 다섯 종의 보석을 헌상하자 고종은 그를 빈왕(賓王)으로 진봉하고 비단 3천 필을 하사했다. 649년 손챈감포가 병사한 뒤에도 공주는 당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토번에 남았다. 680년 문성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토번은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고 그녀를 손챈감포의 묘에 합장시켰으며 이를 역사에 기록했다. 문성공주는 한족과 티베트족의 우의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여전히 그녀에 관한 민가, 회곡 등이 남아 있다. 현대로는 문성공주를 타라의 화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현재 포탈라 궁 내부의 법왕동(法王洞)에는 손챈감포, 가르통첸과 함께 문성공주의 채색 조각상이 남아 있으며, 대소사에는 공주가 가져온 석가모니 불상 외에도 손챈감포와 문성공주의 조각상이 있다.

 

 

 

더보기

※ 문성공주 이야기(인터넷으로 널리 퍼져 있으나 원본 출처 확인 안 됨)

 

7세기 초 토번족(吐蕃族: 지금의 티벳족)의 제32대 찬보(贊普: 국왕) 송찬간포(松贊干布)는 청장고원(靑藏高原) 일대의 여러 부락을 통일한 후 라싸(拉薩)를 중심으로 강대한 토번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당나라와 밀접한 우호관계를 맺기 위하여 634년부터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요청했으나 승낙을 받아내지 못하였다. 이때 토번의 사자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문책이 두려워 토번에 돌아간 후 송찬간포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당나라 천자는 공주를 우리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는데, 마침 토곡혼(吐谷渾)의 왕도 혼인을 청하였기 때문에 우리와의 혼사를 늦추고 있습니다."

토번과 토곡혼은 원래부터 마찰이 많았던지라 이 말을 들은 송찬간포는 즉시 20만대군을 이끌고 토곡혼을 공격하였다. 토곡혼의 왕은 막강한 토번의 세력을 보고 기겁을 하여 환해(環海) 일대로 퇴각하였다.

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14년(640) 송찬간포는 토곡혼을 물리친 여세를 몰아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변경 송주(松州: 지금의 사천성 松潘縣)를 침략하였다. 그리고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만약 공주를 나에게 시집보내지 않는다면 곧장 장안으로 쳐들어갈 것이다."라고 위협했다.

매우 분노한 당 태종은 즉시 토번을 정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다. 송찬간포는 애초에 당나라와의 전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당나라의 원정군이 오는 것을 보고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상대를 너무 얕잡아보고 무모한 행동을 하던 송찬간포는 결국 송주성 아래에서 당나라 군대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에 송찬간포는 신하의 예를 갖추고 사죄를 청하면서, 황금 5000량과 진귀한 보물들을 바치고 다시 혼인을 요청하였다. 당 태종(太宗)은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한 후 마침내 아름답고 총명한 문성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심하였다.

태종이 문성공주를 송찬간포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한 일에 관해서는 하나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것은 당시 송찬간포의 명으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녹동찬(祿東贊)이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여 태종의 승낙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녹동찬이 장안에 갔을 때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목적으로 혼인을 청하기 위해 온 사신들이 많이 있었다. 태종은 혼인을 청하러 온 사신들에게 5개의 문제를 내고 정답을 알아맞히는 사람의 나라에 화친을 윤허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첫 번째 문제는 아주 가느다란 실을 가지고 구멍이 아홉 개 있는 명주(明珠)에 꿰어라는 것이었다. 녹동찬은 먼저 실을 개미 허리에 매었다. 개미가 명주의 구멍속으로 들어가자 실도 따라서 들어갔다.

두 번째 문제는 어미말 백필과 망아지 백필을 함께 놓아두고 어떤 망아지가 어떤 말의 새끼인지를 판별하라는 것이었다. 녹동찬은 하루동안 어미말과 망아지를 분리시켜 놓은 다음 망아지에게 사료와 물을 주지 않았다. 다음날 다시 그들을 함께 놓아두자 배가 고픈 망아지들은 각각 자기의 어미에게로 달려가서 젖을 빨았다.

녹동찬은 이렇게 뛰어난 기지를 발휘하여 나머지 관문도 하나하나 통과하였다. 제일 마지막 문제는 2500명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 중에서 문성공주를 찾아내라는 것이었다. 녹동찬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단번에 그녀들 중에서 몸가짐이 가장 우아하고 단정한 공주를 식별해내었다.

이리하여 녹동찬은 마침내 다른 나라의 사신들을 물리치고 당태종의 윤허를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이다.

문성공주는 원래 당 태종의 양녀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당 태종과 장손황후(長孫皇后)의 양녀로 궁궐에 들어가 깊은 사랑을 받으며 문성공주에 봉해졌다. 문성공주는 당 태종이 자기를 토번족의 찬보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매우 착잡하였다. 토번의 국왕 송찬간포와 결혼하여 두 민족이 대대로 우호관계를 맺는 것은 지극히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친지라고는 아무도 없고 풍속도 전혀 다른 먼 이역 땅으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불안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태종은 그러한 문성공주를 위해서 많은 혼수품을 마련해 주었다. 그 중에는 각종 가구·그릇·패물·비단은 물론, 고대의 역사·문학·각종 기술서적 및 의약품·곡물·누에알 등도 있었다. 그리고 25명의 시녀와 악대, 많은 장인들을 함께 딸려 보냈으며,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성공주는 동불상도 함께 가져갔다.

당시에 토번족은 서남지역에서는 여전히 강성한 국가였기 때문에 당 태종은 서남의 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경제적 문화적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융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문성공주와 함께 대규모 문화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문성공주는 실제로 이러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중대한 정치적 임무를 지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녀는 중국 역사상 왕소군(王昭君)에 이어 두 번째로 화친의 임무를 띠고 이역 땅으로 시집간 여인으로 기록되었다.

정관 15년(641) 정월 문성공주(당시 약 24세) 일행은 장안(長安: 지금의 섬서성 서안 서북)에서 티벳까지 약 3000km에 이르는 장도에 올랐다. 청장고원(靑藏高原) 일대에 살고 있던 티벳인들은 문성공주 일행을 환영할 준비를 하였으며, 송찬간포는 그녀를 영접하기 위하여 대규모 영친(迎親) 행열을 거느리고 청해(靑海)까지 달려갔다.

약 한 달간의 긴 여정 끝에 문성공주 일행은 청해 남쪽의 하원(河源: 황하 수원)에 도착하여 송찬간포의 영접을 받았다. 송찬간포는 후행(後行: 결혼 때 신부나 신랑을 데리고 가는 일) 온 예부상서(禮部尙書) 이도종(李道宗)에게 사위의 예를 표하고 찰릉호에서 성대한 영친(迎親) 의식을 거행하였다.

장력(藏曆) 4월 15일 송찬간포는 문성공주를 데리고 북문을 통해서 라싸성으로 들어갔다. 공주의 풍속을 존중한 송찬간포는 특별히 당왕조에서 하사한 화려한 예복을 입고, 티벳인들에게 홍갈색 흙을 얼굴에 칠하는 풍속을 금지시켰다. 그리고는 새로 건축한 화려한 왕궁에서 송찬간포와 문성공주는 혼례를 거행하였다.

문성공주가 티벳에 들어간 것은 티벳의 역사를 뒤바꾸는 일대 사건이었다. 문성공주가 지나간 청장고원에는 지금도 이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청해에는 일월산(日月山)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문성공주가 이곳을 지나면서 서쪽을 바라보고 하염없이 고향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당 태종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하여 특별히 황금으로 일월보경(日月寶鏡)을 주조하여 멀리서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이때부터 이 산은 "일월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월산을 지나면 도류하(倒流河)가 있는데, 이 강은 서쪽으로 흘러 청해호(靑海湖)로 들어간다. 전설에 의하면 문성공주는 이 강을 건너자마자 가마를 버리고 말을 타고 초원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기의 몸이 집에서 점점 더 멀어져감을 느끼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울음소리는 세상의 모든 강물을 모두 동쪽으로 흘러가게 하였지만 유독 이 강만은 서쪽으로 흘러갔다. 도류하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문성공주는 라싸에 도착한 이후 당왕조의 선진 기술과 문화를 티벳인들에게 전수하여 토번사회의 발전을 촉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성공주와 함께 티벳에 들어간 한족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티벳족은 야금·농기구제조·방직·건축·도자기제조·방아·술제조·제지 등의 기술을 신속하게 습득할 수 있었다.

문성공주는 티벳에 급류가 많은 것을 보고 강가에 물레방아를 설치하도록 하여 수력으로 방아를 찧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송찬간포는 이러한 기술이 토번의 경제발전 촉진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더 많은 기술자들을 요청했다.

문성공주는 또 시녀와 함께 티벳 여인들에게 방직과 자수 기술을 전수하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티벳 여인들이 짜는 푸루(야크 털로 짠 검은색 또는 다갈색의 모포)와 융단, 모전(毛氈) 등의 기술은 모두 문성공주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문성공주는 또 티벳인들에게 천문과 역법을 가르쳐주었다. 이후 장력(藏曆)에서는 한족의 음력 십이지간과 육십갑자에 따라 일시를 계산하는 방법을 받아들였다. 문성공주가 데리고 간 악대는 티벳음악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악대가 가지고 간 악기는 지금도 50여개나 보존되어 있다. 라싸의 대소사(大昭寺)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그 악기들 중 대부분은 현악기인데 지금 보아도 색채가 선명하고 아름답다. 매년 장력 2월 30일 양보회(亮寶會)가 되면 그것들은 사내의 다른 문물과 함께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문성공주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녀가 그 멀고 험난한 길에 불상을 가지고 간 것 그 자체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불교를 깊이 신봉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송찬간포도 정치적으로 불교의 교의가 토번족 토속 신앙인 분교(분敎, 분=竹+本) 보다 통치에 훨씬 더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는 왕권신수(王權神授) 사상을 빌어 왕권을 공고히 하고 찬보의 절대적 권위를 수립하였다.

이에 그는 불법(佛法)을 제창하고 신봉한 문성공주의 주장을 강력하게 옹호하면서 400여개에 이르는 사원 신축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부터 티벳불교가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티벳에 세워진 최초의 불교사원인 방대한 규모의 라싸 대소사는 바로 문성공주의 배려로 건축된 것이다. 대소사 안에는 지금도 공주가 가지고 간 석가모니 불상이 모셔져 있다. 대소사 입구에는 공주가 직접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버드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당류(唐柳)" 또는 "공주류(公主柳)"라 한다.

문성공주는 티벳에 들어간 이후 송찬간포와 적존공주(赤尊公主)의 부탁으로 와조(臥措)에 적존공주를 위해서 절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의 대소사이다. 그후 공주는 다시 와조의 서북쪽 모래밭에 순수한 당나라 양식의 사원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의 소소사(小昭寺)이다.

대소사의 건축 양식을 통해서 우리는 문성공주의 뛰어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대소사를 지을 때 계속 담이 무너져내려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문성공주는 천문학과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의 오행설을 운용하여 천문과 지리를 관찰한 다음, 라싸의 지형이 나찰마녀(羅刹魔女)가 누워있는 형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에 공주는 나찰마녀의 심장 부위에 절을 지어 그녀의 심장을 눌러야만 절이 온전하게 지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주가 계산한 나찰마녀의 심장 부위는 홍산(紅山)의 동쪽 1km 지점으로 그곳은 호수와 소택지였다.

문성공주가 지목한 대소사 부지는 호수와 소택지여서 그것을 메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이에 공주는 다시 오행의 상생상극 이론에 근거하여 송찬간포에게 절을 지을 때 흰산양으로 흙을 지고 호수를 메우게 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송찬간포는 공주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에 646년 비로소 대소사의 공정이 시작되었다. 이 사원의 공사는 라싸 역사상 최대의 대공사였다. 2년간의 공사를 거쳐 와조에는 마침내 웅장한 사원이 건축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의 대소사인 것이다. 648년 웅장한 대소사와 소소사가 모두 완공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도 문성공주와 송찬간포가 결혼할 당시에 그들이 연령적으로 어울리는 한 쌍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 송찬간포의 생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는 두 가지의 전혀 다른 설이 전해오고 있다. 하나는 송찬간포가 25세 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문성공주가 송찬간포와 함께 생활한 기간은 얼마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송찬간포가 오래 살기는 하였지만 문성공주가 시집간지 얼마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함께 생활한 기간은 불과 3년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간찬포는 현명하고 아름다운 문성공주를 위하여 포달라궁(布達拉宮)을 지어주었는데, 모두 1000간의 궁실로 이루어져 있는 포달라궁은 그야말로 화려하고 웅장하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두 번에 걸쳐 증축한 것이다. 포달라궁의 본전의 높이는 13층, 길이는 117m, 점유 면적 36만여㎡에 이른다. 포달라궁 내부에는 많은 벽화가 보존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녹동찬이 당태종을 만나 5개의 문제를 풀던 이야기와 문성공주가 티벳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겪은 일 및 라싸에 도착했을 때 열렬한 환영을 받던 장면 등의 벽화가 있다.

문성공주는 영륭(永隆) 원년(680)에 40년간의 티벳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티벳인들은 두 개의 기념일을 제정하여 그녀를 기리고 있다. 하나는 문성공주가 라싸에 도착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장력 4월 15일의 "사허다와절(沙喝達瓦節)"이고, 다른 하나는 문성공주의 탄신일로 알려져 있는 장력 10월 15일이다.

티벳에는 문성공주에 관한 희극이 많다. 민간에는 그녀에 관한 아름다운 시가와 전설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티벳인들은 라싸의 팔각대가(八角大街)와 같이 그녀가 지나갔던 곳을 성역으로 여기고 있다. 그녀는 한족과 티벳 두 민족에 있어서 우호의 화신인 것이다.

 

 

 

☞ 송첸캄포에 대한 위키백과의 글

손챈감포(松赞干布, 605, 617~650)는 토번국의 33대 왕으로 주변 왕국을 정복하여 최초로 토번을 통일하였다. 비단길과 쓰촨 방면을 공격하여 토번 세력을 확대하여 당을 압박했다. 634년 당에 공주와의 결혼을 요청하였으나 당이 이를 거절하자, 토욕혼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20만 대군을 이끌고 당의 국경을 공격하였다. 이후 당나라는 손챈감포 왕과 당 공주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으며, 다만 티베트에서는 당 고조가 제위에 올라 당나라가 건국되기 1년 전인 617년에 태어났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가 13세가 되던 629년 전통에 따라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측된다. 독살당한 그의 아버지 남리송첸의 뒤를 이어 왕좌에 올랐을 때 그는 힘없는 군주였다.

손챈감포는 티베트 문자를 만들기 위해 인도에 특사를 파견하여 티베트의 문학과 번역, 그리고 법률 기록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또한 많은 새로운 문명과 기술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당서》에는 648년 인도에서 건너온 군대를 중국의 도움으로 격파한 후, 649년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당고종이 ‘빈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비단 삼천필 하사했으며, 티베트 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누에씨와 회반죽, 술을 만드는 기계, 종이와 먹을 만드는 장인을 파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손챈감포는 중국에서 수공예품과 천문학을 들여왔으며, 문자와 불교는 인도에서, 재화는 네팔과 몽골에서, 행정체계와 법은 북쪽의 위구르의 것을 들여왔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리하여 손챈감포는 라사를 수도로 하여 영역을 확대하고, 티베트 문자를 제정하였다. 가르통첸과 같은 인재를 등용하여 외교에 힘썼으며, 네팔로부터 왕녀 브리크티 데이비(타크리 왕국의 창시자 안슈 바르만 왕의 딸)를 왕비로 맞이하였고, 샹슝(象雄)왕과 민약왕의 딸도 왕비로 맞이했다. 당 태종에게 청원하여 문성공주를 아들 궁스롱 궁쳉왕(재위 641-643)의 왕비로 맞이하게 하였다. 궁스롱 궁쳉왕이 낙마사고로 죽은 후, 63세에 복위하여 아들의 미망인 문성공주를 자신의 왕비로 맞이했다.

 

 

※ 송첸캄포 더 읽을거리 => http://songij21.egloos.com/viewer/1367914

 

 

 

 

 

● 문성공주가 송첸캄포의 아들과 결혼했다는 설이 사실일까?

 

그런데, 위의 내용 끝 부분은 문성공주가 송첸캄포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궁손궁첸(贡松贡赞)과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돈황 문헌 등의 연구에 의한 것으로 처음에는 궁손궁첸 왕의 비가 되어 캄에서 살면서 왕자를 낳았는데, 643년 궁손 왕이 낙마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죽은 남편을 위하여 라모치에(小招寺)를 세우고 3년상을 지낸다. 646년, 형제나 아들이 죽으면 그들의 아내를 도맡아 거느리는 유목민족의 풍습에 따라 다시 왕위에 복귀한 송첸캄포에게 재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에도 의문은 남는다. 송첸캄포의 출생연대는 605년설과 617년설이 있는데 대개 617년설을 따르는 듯하다. 문성공주는 후손이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송첸캄포가 617년에 태어났다면 23세(640년)의 나이에 문성공주를 부인으로 맞이할 아들을 두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송첸이 605년에 태어났다 하더라도 36세라는 나이(641년)에 아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까도 의문이고, 또 혈기방창한 그 나이에 아들에게 양위한 것도 그리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문성공주가 송첸캄포의 아들과 결혼한 것이 사실이기 위해서는 송첸캄포는 605년보다도 적어도 훨씬 이전에 태어났어야 했을 것 같다. 문성공주와 재혼했을 때 송첸캄포가 60대 노인이었다는 글도 있기는 하지만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