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양양 낙산사, 의상과 관음보살의 전설이 서린 관동팔경

모산재 2014. 7. 14. 19:06

 

대관령 옛길을 걷고 오색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 양양 낙산사로 향한다.

 

2005년 고성 산불로 타 버린 낙산사, 새 전각들로 가득차 있을 낙산사를 굳이 볼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복구된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바닷가 바위 절벽 위에서 여러 날 기도하여 동해 용으로부터 여의주를 받고 붉은 연꽃 속에 나타난 관음보살로부터 수정 염주를 받은 후 이를 안치한 절이 낙산사다.

 

의상대사가 수도한 절벽 위에는 의상대(義湘臺)라는 정자가 섰고, 관음보살이 바다에서 붉은 연꽃을 타고 솟아오른 자리 옆에는 홍련암(紅蓮庵)이 세워졌다. 낙산사 홍련암은 강화도 보문사, 남해 금산 보리암, 통천 금란굴과 함께 우리나라 4대 관음성지로 손꼽힌다.

 

 

 

낙산사 해수욕장을 끼고 후문으로 들어서면 의상대(義湘臺)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1926년 만해 한용운이 낙산사에 머물 때 의상이 수도하던 뜻 깊은 곳에 의상대가 세워졌다고 한다. 해돋이의 명소 의상대가 있어서 낙산사가 관동팔경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현재의 정자는 폭풍으로 무너졌던 것을 197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의상대 북쪽, 높은 해안 절벽 위에 있는 암자가 바로 홍련암이다.

 

 

 

 

 

홍련암 방향으로 가다가 돌아본 의상대 풍경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낙산사 주변 해안의 이 아름다운 경관을 다음처럼 기록하고 있다.

 

해안은 모두 반짝이는 흰 눈빛 같은 모래로, 밟으면 사박사박 하는 소리가 나는 것이 마치 구슬 위를 걷는 것과도 같다. 모래 위에는 해당화가 새빨갛게 피었고, 가끔 소나무 숲이 우거져 하늘을 찌를 듯하다. 그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마음과 생각이 느닷없이 변하여 인간 세상의 경계가 어디쯤인지, 자신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하여 하늘로 날아오른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한번 이 지역을 거친 사람은 저절로 딴 사람이 되고 10년이 지나도 그 얼굴에 산수 자연의 기상이 남아 있을 것이다.

 

 

 

 

 

 

 

 

 

 

 

홍련암에서 바라본 의상대 풍경

 

 

 

 

 

 

 

 

 

 

홍련암(紅蓮庵)은 의상대와 함께 2005년 대화재를 피했던 암자.

 

바닷가 석굴 위에 지은 암자는 법당 마루에 구멍을 뚫어 출렁이는 바다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 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의상의 창건 설화를 느껴볼 수 있도록 해 놓은 장치다.

 

 

 

 

 

 

약 1,300년 전, 의상이 당나라에서 화엄 사상을 공부하던 중 당나라의 신라 침공 계획을 알아채고 이를 알리러 급히 귀국한 뒤 낙산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 설화가 전하고 있다.

 

의상은 동해변에 관음보살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 양양의 해안 굴을 찾아왔다. 이레 동안 기도를 하다가 앉은 자리째로 물 위로 뛰어들었는데 팔부신중이 나타나 그를 굴 속으로 안내하였다. 의상이 굴 속에서 예를 올리니 동해의 용이 나타나 여의주 한 알을 바치고 수정 염주 한 꾸러미가 내려오므로, 그것을 가지고 나왔다. 의상이 다시 이레 동안 기도를 하였더니 관음보살이 홀연히 나타나 이르기를, “앉은 자리 위 꼭대기에 한 쌍의 대가 솟아날 것이니 그 자리에 불전을 지어라” 하는 것이었다. 의상이 그 말을 듣고 나오니 과연 쌍죽이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관음상을 빚어 모셨더니 그 대가 없어졌으므로, 의상은 그제야 이곳에 진신이 거주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절의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성전에 모시게 되었다.

 

낙산사라는 이름도 관음보살이 거주하고 있다는 인도의 보타낙가산('꽃과 나무로 가득한 작은 산'이라는 뜻을 가진 범어 '포타라카 potalaka의 차자어)에서 유래한 것이니 관음 사찰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원효도 관음보살을 만나러 이곳에 왔지만 만나지 못했다는 설화를 전하고 있다.

 

원효가 양양 부근에 다 왔을 때 흰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벼를 베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원효는 여자에게 “벼를 줄 수 없겠는가?” 하고 물었다. 그 여자는 “벼가 아직 익지 않았습니다” 하고 냉담하게 대답하였다. 길을 재촉하던 원효가 개울의 다리 밑에서 빨래를 하는 한 여인을 만나 물을 달라고 청하자, 여인이 빨래하던 물을 한 바가지 떠주었다. 화가 치밀어오른 원효는 그 물을 쏟아버리고 냇물을 다시 떠서 마셨다. 그때 들 가운데 서 있던 소나무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오르며 “휴제호 화상아”라고 부르짖으며 사라져버리고, 파랑새가 날아간 소나무 아래에는 신발 한 짝이 놓여 있었다. 의아하게 여긴 원효가 낙산에 도착해보니 관음상 밑에 그 신발의 다른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그제야 원효는 벼를 베고 있던 여인과 빨래하던 여인이 관세음보살의 화신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뒤에 원효가 다시 의상이 수정 염주와 여의보주를 받았다는 그 굴속을 찾아가려 했지만 풍랑 때문에 가지 못하였다.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돌아와 왕실의 절대적인 후원 속에 호국 신앙을 내세우면서 영험한 산마다 거찰(화엄 10찰)을 세운 진골 귀족 출신인 의상, 당나라 유학도 포기하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깨달음으로 개인적 실천을 중시했던 육두품 출신의 원효. 당시 지배 질서는 원효가 아닌 의상이 필요했다. 의상의 법력이 우위임을 입증하기 위해 원효를 폄하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발길이 닿은 곳은 보타전(寶陀壂)

 

 

 

 

 

보타전 입구에는 관음지라 불리는 커다란 방형의 연지가 있다. 따가운 햇살 아래 흰 연꽃이 몇 송이 피어 있고 노랑어리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보타전 앞에는 2층누각 보타락(寶陀落)과 단층인 지장전이 있다.

 

 

 

 

 

보타락은 인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떠 있는 상상의 산으로 보타락가산(寶陀落伽山)의 준말이다. 관음보살이 사는 이곳에는 깨달음을 얻은 많은 성자(聖者)가 살고 항상 밝은 빛이 나고 꽃은 만발하며 그 꽃내음이 온누리에 퍼져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지장전과 보타락

 

 

 

 

 

보타전(寶陀壂)은 낙산사 경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불전이다. 1993년에 지은 전각으로 2005년 대화재에도 피해를 입지 않고 건재한 전각이다. 현판을 보니 '전'을 '대궐 전(殿''이 아닌 '당집터 전(壂)'이라는 글자로 써 놓았다.

 

 

 

 

 

보타전 내부에는 수많은 관음상으로 가득 차 있다.

 

천수(千手)관음을 중심으로 성(聖), 십일면(十一面), 여의륜(如意輪), 마두(馬頭), 준제(准堤), 불공견색(不空羂索)의 7관음과 32응신, 그리고 1500의 관음상을 봉안하고 있다.

 

 

 

 

 

 

 

보타전에는 노무현 대통령 영가(위패와 사진)가 모셔져 있다고 하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몰라 아쉽게도 확인하지 못했다.

 

 

새로 조성해 놓은 의상대사 부도비와 보타전을 지나면 능선 위로 높이 16m의 거대한 해수관음상이 서 있다. 1977년에 세운 이 해수관음상도 다행히 화마를 피했다.

 

 

 

그리고 무지개문인 홍예문(紅霓門)으로 발길이 이른다.

 

 

 

 

 

자연석으로 수수하게 쌓았던 홍예문의 돌들은 대화재 이후 복원되면서 아귀가 잘 맞는 새 화강석으로 바뀌어졌다.

 

 

 

 

 

홍예문은 낙산사 경내로 들어가는 조선 시대의 전형적인 성문. 

 

1446년 오대산 상원사를 참배하고 나서 낙산사에 행차했던 세조가 세운 문으로, 당시 강원도 26개 고을에서 돌을 하나씩 내놓아 만든 석문이다. 1963년 에 세운 누각을 다시 세웠다.

 

 

 

범종루가 올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공간이 낙산사 주법당 원통보전이 있는 곳.

 

 

 

 

 

계단을 오르니 정면으로 사천왕문이 모습을 드러낸다.

 

 

 

 

 

헌강왕 2년(853) 굴산사를 창건했던 범일에 의해 중건된 낙산사는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폐허화되었다. 당시 주지였던 아행이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갖고 도망하려 하였는데, 절의 노비였던 걸승이 목숨을 걸고 그것을 빼앗아 땅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전쟁이 끝나고 두 보주는 관가에서 보관하게 되었고 절은 재건되었지만 예와 같은 영화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낙산사는 1466년 오대산 상원사를 참배하고 나서 이곳을 찾은 세조의 의해 크게 중창되었다. 이때 원래 있었던 삼층석탑을 7층으로 올리면서 의상이 관음보살과 용에게 얻었다는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탑 속에 안치했다고 한다. 지금 낙산사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재인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동종(보물 제476호), 홍예문(지방문화재 제33호) 등은 모두 이 무렵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낙산사는 허물어졌고, 한국전쟁 때에도 폐허가 되었다.  1953년 이후 원통보전과 범종각 등이 모두 복원되었지만 2005년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사천왕문사천왕상은 2005년 화재로부터 무사히 보존된 것이다.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태양을 맞이한다는 뜻의 빈일루(賓日樓)가 나타난다.

 

 

 

 

 

빈일루는 복원하면서 새로 지은 건물. 현판 글씨는 지관스님이 쓴 것이라 한다.

 

 

 

 

 

정조 임금의 명에 의해 44세의 김홍도가 44세 때 금강산 및 관동8경 지역을 그린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에 나온 '낙산사도(洛山寺圖)'를 근거로 복원했다 한다. 

 

 

 

범종각은 천왕문 안쪽 왼편에 자리잡고 있다.

 

 

 

 

 

범종각도 보물이었던 낙산사 동종도 대화재 때 불타버린 것을 복원한 것이다.

 

 

 

빈일루를 지나면 응향각(凝香閣)이 나타난다.

 

 

 

 

 

응향각이란 '향이 어린 집'이란 듯이나 부처님께 바칠 향을 준비하는 곳이다.

 

응향각을 지었음에도 좌우에 요사채만 있을 뿐, 법당과 법당 마당은 꽃담으로 둘러 공간을 분리해 놓았다. 법당과 좌우 요사채가 법당 마당이 분리되지 않은 여느 사찰과는 다른 공간 배치이다.

 

 

 

 

 

 

 

좌우 요사채

 

 

 

 

 

 

'원장(垣墻)'이라고 부르는 꽃담에 나 있는 문을 통과하자 비로소 주법당인 원통보전7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칠층석탑(보물 499호)만이 예전의 모습을 보일 뿐, 모든 것이 새로 복원된 것이다. 

3층탑이었던 것을 세조 때 7층탑으로 개축되었고 한국전쟁 때 파손된 것을 재건한 것이다. 이 탑은 강릉 신복사터 3층탑(보물 87호)과 비슷하다. 높이 620cm.

 

 

 

원통보전은 관음전의 다른 이름이다.

 

 

 

 

 

의상이 관음보살로부터 여의주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받아 관음보살이 일러준 언덕 위 두 그루 대나무가 있던 자리에 세운 법당이 바로 원통보전이다.

 

 

 

법당에는 건칠관세음보살상(보물 1362호)을 독존으로 모셨다.

 

 

 

 

 

이 불상은 대화재 때 스님들과 신도들이 긴급히 옮겨 놓아 화마를 피했다고 한다. 고려 후기 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통보전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꽃무늬 담장, 원장(垣墻).

 

화재로 일부 유실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길이 200m에 높이 3.7m. 세조 때 조성, 터만 남은 것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되나오면서 바라본 보타전 전경

 

 

 

 

 

 

※ 낙산사 안내도

 

 

출처 : 낙산사 홈페이지

 

2012. 0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