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문수성지와 적멸보궁의 선원, 오대산 상원사

모산재 2014. 5. 20. 22:00

 

선자령 트레킹 다음날(2013. 05. 18) 오대산 상원사를 찾는다. 

 

 

20대 후반, 빛나던 청춘 시절의 추억이 서려 있는 절이라 감개무량하다. 군대를 다녀오고 맞이한 여름, 상원사를 거쳐 등대산과 노인봉을 넘어 소금강으로, 그리고 울진 포항까지 5박 6일의 동해안 여행의 첫 코스가 바로 오대산 상원사였던 것! 

 

 

20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 도착한 상원사 입구 주차장은 낯설기만 하다.

 

 

 

절 입구에 세워진 상원사 표지석

 

 

 

하천 정비 공사 중에 발견된 자연석에 새긴 글씨는 신영복 선생의 글씨라는데, '적멸보궁'과 '문수성지'라는 상원사의 키워드를 인장 꼴로 새긴 것이 눈길을 끈다. 

 

오대산 주봉인 비로봉 기슭에 자리 잡은 상원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문수보살상을 모시고 있는 문수 신앙의 중심지이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는 절이기도 하다.

 

 

상원사가 문수신앙의 중심이 된 데에는 보천과 효명 두 신라 왕자가 1만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왕위에 오른 효명(성덕왕)이 705년 이곳에 진여원(眞如院)을 창건함과 동시에 문수보살상을 봉안하고 725년 동종을 주조하였다는 점, 그리고 조선 세조가 이곳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부스럼병을 고치고 친히 권선문을 작성하고 진여원을 확장하여 상원사로 이름을 바꾸고 원찰(願刹)로 정하여 문수동자상을 봉안했다고 하는 이야기와 관련이 깊다.

 

 

맞은 편 매점 옆에는 버섯 모양의 작은 비석이 보이는데, 세조가 부스럼병을 낫게 하려고 목욕할 때 의관을 걸었던 곳이란다.

 

 

 

절 입구의 사자 석상은 바로 지혜를 의미하는 문수보살을 상징하는 동물...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청풍루(淸風樓)란 이름의 문루가 나타난다.

 

 

 

문루 앞쪽에는 문수전에 걸려 있던 '상원사'란 현판을 옮겨 닿아 놓았고, 문수전 쪽으로 '청풍루(淸風樓)'란 현판을 달았다. 상원사 편액은 탄허스님의 글씨...

 

 

 

청풍루 출입구 천정에는 '문수보살 36화현도'라는 이름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그린 이가 누구일까를 알아보다가 조선대 미대 80학번 출신인 단청장 김현자 씨가 그린 것임을 기사에서 확인하게 되었다. 다음은 김현자 씨의 말...

 

신라의 보천태자와 호명왕자가 오대산에 들어와 수행을 했는데, 상원사의 옛이름 진여원에 문수보살이 매일 나타나 36가지의 신통한 변화를 보여줬다는 얘기가 <삼국유사>나 <오대산 사적>에 실려 있어요. 조선 중기 상원사 불전에 모셔졌던 ‘문수보살 36화현도’가 소실되어 현재 전해 내려오는 도상이 없다고 하더군요. 상원사 주지 스님이 36화현의 기록을 참고하여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사방으로 사자좌에 상주하며 설법하는 서른여섯존의 문수보살도를 의뢰하셔서 작업에 착수하게 됐습니다..(기사 출처 :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2931)

 

원 작품은 종이가 아닌 삼베에 채색을 입혀 완성됐는데, 세로 크기가 6m 넘는 대작이다.다음의 그림이 그것.

 

 

 

 

청풍루를 지나니 또 다시 가파른 계단이 시야를 가리고 법당 지붕과 탑 윗부분만 보일 뿐이다. 문수전 법당 마당은 아득히 높기만하다.

 

 

 

문수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상원사의 주 전각인 문수전이다. 비로봉 아래에 있는 적멸보궁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에 상원사에는 대웅전이 따로 없다.  

 

 

 

 

지금의 상원사 건물은 광복 후에 재건한 것이다. 1947년 당시 월정사의 주지였던 이종욱에 의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의 건물을 본떠서 중창하였다고 한다.

 

주요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영산전과 청량선원, 그리고 조성한 지 얼마되지 않은 문수전, 청풍루, 통정각, 소림초당, 만화루, 백련당, 청련당 등이 있다.

 

 

범종각에서 바라본 청풍루

 

 

 

문수전 동쪽 벽의 두 그림은 문수동자가 세조의 등을 밀어주는 모습과 신라의 두 왕자과 문수보살을 친견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문수전 앞에는 한쌍의 석상이 있는데, 고양이 석상이라고 한다. 원래 가람 입구에 양쪽으로 두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여기에도 전설이 전하는데, 이 또한 세조와 얽힌 것이다.

 

세조가 욕창을 치료하기 위해 문수동자를 친견한 그 이듬해에도 상원사를 찾았다. 예불을 드리려고 문수전을 들어가려는 순간 고양이 한마리가 세조의 옷자락을 물고 법당안으로 못들어가게 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세조는 병사들을 풀어 법당안을 조사하게 했더니 불상 밑에 있던 자객 셋이 발각되어 화를 면하게 되었다.

 

이에 세조는 자신의 목슴을 구해준 고양이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애 고양이를 위한 밭 묘전(猫田)을 하사하고, 한 쌍의 묘상을 석물로 만들어 안치하였다. 그리고 서울 근교에도 묘전을 설치하여 고양이를 키웠다고 한다. 지금도 서울 봉은사에 있는 밭을 묘전이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런 일들을 겪은 세조는 그 뒤에 상원사를 다시 일으키고 소원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문수전 편액 글씨도 상원사 입구 표지석과 함께 신영복 선생이 상원사 주지의 부탁을 받고 쓴 것이라고 한다.

 

 

 

문수전 안에는 국보 제 221호로 지정된 문수동자좌상과 함께 문수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문수동자좌상의 조성에도 바로 세조가 문수동자를 친견하였다는 전설과 관련이 있다.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세조는 단종의 모후 현덕왕후가 자기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난 뒤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는 동창(부스럼)에 걸렸다. 병을 고치기 위해 상원사 계곡에 이른 세조는 몸에 난 종기를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혼자 멀찌감치 떨어져 몸을 씻고 있었는데, 동자승 하나가 가까운 숲에서 놀고 있었다. 세조는 그 아이를 불러 등을 씻어달라고 부탁하며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주었다는 말은 하지 마라”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임금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대답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깜짝 놀란 세조가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몸을 괴롭히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이다. 감격에 겨운 세조는 화공을 불러 기억을 더듬어 동자로 나타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고, 그 그림을 표본으로 하여 나무를 조각하였다.

 

이렇게 해서 국보 제22호 목조문수동자좌상이 세상에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최근에 이 동자상 안에서 발견된 유물이 보물 제793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그 중에 "조선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1466)에 이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이 있어, 국보의 탄생이 세조의 둘째딸과 관련있음이 밝혀졌다.

 

 

영산전에서 바라본 문수전 뒷모습. 뒤로 소림초당, 백련당이 일렬로 서 있다.

 

 

문수전 앞마당에는 2012년에 세운 높이 5.7m 오대보탑이 우뚝 솟아 있다.

 

 

 

 

문수전 동쪽에는 영산전(靈山殿)이 있다.

 

 

 


영산전의 동쪽 마당에는 청량선원이 자리잡고 있다. 스님들이 수행에 매진하는 공간이다. 청량선원이라는 이름은 오대산을 청량산이라고도 부르는 데서 연유한다.

 

영산전은 상원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1946년 화재가 났을 때 유일하게 화마를 피한 전각으로 한국전쟁 때 방한암 선사가 지켜낸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때 국군이 적의 군사 거점이 된다 하여 상원사를 불사르려 할 적에 한암 선사는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법당을 지키는 것이 나의 도리이니, 법당과 함께 소신 공양하겠다"하니 국군 장교는 하는 수 없이 법당 문짝만 떼어내 불태우는 시늉만 하고 물러감으로써 절을 지켜냈다는 이야기...

 

 

영산전은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협시로 봉안하고 16나한상을 모신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도의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시던 당시의 모습을 묘사하고 그 주위에는 8폭의 팔상도(八相圖)를 봉안한다.

 

 

 

영산전 앞에는 심하게 파손된 탑 부재로 쌓아 놓은 작은 석탑 하나가 있다.

 

 

 

몸돌 4면에 각기 셋 또는 넷씩 부처가 조각되어 있고, 기단부 위치에 놓여진 지붕돌에도 연화문이 새겨져 있어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왼쪽의 전각은 종무소로 이용되는 '소림초당(少林艸堂)'

 

 

 

절마당 끝에는 동정각(動靜閣)이란 범종루를 세로 세웠다.

 

 

 

2010년에 세운 이 전각은 국보 제36호 상원사 동종의 보호각으로, '동정각'이란 편액은 탄허스님의 글씨라고 한다.

 

상원사 동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동종으로 성덕대왕 신종(에밀레종)보다 45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런데 국보는 투명 판넬로 가두어져 있어 죄수처럼 불쌍한 모습이고 거울 현상으로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관람자를 위해 바로 옆에 모조품을 걸어 놓았는데, 글쎄 문화재 보호를 저런 식으로 해야 할까...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앞쪽이 모조품 뒤쪽이 진품

 

 

 

경주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완형의 통일신라시대 범종 3구 중 하나이며, 크기는 높이 167cm, 입 지름 91cm이다.
 

 아래 사진 3장 출처 : 문화재청

 

 

 

이 종의 맨 위에는 큰 머리에 굳센 발톱의 용이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音筒)이 연꽃과 덩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종 몸체의 아래 위에 있는 넓은 띠와 사각형의 유곽은 구슬 장식으로 테두리를 하고 그 안쪽에 덩굴을 새긴 다음 드문드문 1∼4구의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奏樂像)을 두었다. 네 곳의 유곽 안에는 연꽃 모양의 유두를 9개씩 두었다. 

 

 

 

그 밑으로 마주보는 2곳에 구름 위에서 무릎꿇고 하늘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을 새겼다. 비천상 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를 구슬과 연꽃 무늬로 장식하였다. 

 

 

 

이 종은 원래 경북 안동의 남문 관풍루에 걸려 있었는데 상원사를 왕실 원찰로 삼은 세조를 위해 예종 원년(1469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한다.

 

 

바로 곁에는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을 바위에 모사해 놓았다.

 

 

 

 

서쪽의 문루 역할을 하는 만화루(萬化樓)

 

 

 

 

만화루 뒤쪽으로는 서쪽 요사채인 백련당(白蓮堂)이 자리잡고 있다. 동쪽 끝에는 청련당(靑蓮堂)이 자리잡고 있다.

 

 

 

만화루 바깥 쪽에서 바라본 풍경

 

 

 

이제 사자암을 지나 적멸보궁을 다녀올 차례....

 

 

 

오대산의 중대인 사자암에는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고, 적멸보궁은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