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대관령 옛길, 반정에서 대관령박물관까지

모산재 2014. 7. 13. 16:56

 

대관령 옛길, 반정에서 대관령박물관까지

 

- 2013. 7. 18. 목

 

 

 

평창과 강릉 사이 백두대간을 넘는 해발 832m 대관령(大關嶺).

 

영동의 물산과 영서의 토산품이 선질꾼 지게를 통해 넘나들던 대관령 옛길을 찾는다. 

 

개나리 봇짐에 짚신을 신고 오르내리던 옛 선비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길이기도 하다. 영동 영서의 큰 관문이 되는 고개라 풀이될  수 있는 대관령을 이 지역 사람들은 '대굴령'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고개가 급해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라는 거다.

 

 

 

점심을 먹은 후 대관령 고개 너머 강릉쪽으로 1.6km 정도 내려온 지점에 있는 반정(半程)으로 향한다. 반정에서 대관령박물관까지 1시간 50분 정도 걸리는 대관령 옛길을 걸을 예정이다.

 

 

길가에 '대관령 옛길'이라고 새긴 큰 표석에는 이곳이 반정(半程)임을 발리고 있다. 대관령 고갯길의 중간이라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리라.

 

 

 

정은 강릉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날은 안개가 짙게 끼어 아무 곳도 보이지 않는다. 

 

 

※ 대관령 옛길 안내도

 

 

 

 

영동에 고향을 둔 사람들에게 대관령은 어떤 곳일까.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본다(踰大關嶺望親庭)'라는 신사임당의 시를 떠올려 보기로 하자.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임영)     늙으신 어머님를 고향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회수북평시일망)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이 시를 쓴 신사임당 사친(思親) 시비는 좀 더 위쪽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시이지만 권위주의 시대에 세워서 그런지 무슨 승전 기념탑처럼 지나치게 높이 세운 것이 불편하게 보인다.

 

 

여기서 사임당의 사친 시 한 수만 더 감상하고 가기로 하자. 잃어버린 고향의 정서를 떠올려 보는 것도 여행의 의미 아닐까.

 

千里家山萬疊峯(천리가산만첩봉)     천 리 고향은 만 겹 봉우리로 막혔으니

歸心長在夢魂中(귀심장재몽혼중)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늘 꿈속에 있도다.

寒松亭畔孤輪月(한송정반고륜월)     한송정 언덕에는 외로운 보름달

鏡浦臺前一陣風(경포대전일진풍)     경포대 앞에는 한 바탕 바람

沙上白鷺恒聚散(사상백로항취산)     모래 위엔 백로가 늘 모였다 흩어지고

波頭漁艇各西東(파두어정각서동)     파도머리엔 고깃배가 왔다 갔다 하네.

何時重踏臨瀛路(하시중답임영로)     언제나 강릉 가는 길을 다시 밟아

綵服斑衣膝下縫(채복반의슬하봉)     비단 색동옷 입고 슬하에서 바느질할까?

 

 

 

반정에서 약 10분 정도 내려가니 '기관이병화유혜불망비(記官李秉華遺惠不忘碑)'라고 적힌 안내판을 만난다.

 

1824년에 세웠다는 진짜 불망비가 바로 뒤 숲속에 있는 것도 모르고 이것만 담았다.

 

 

 

비석의 주인공 이병화(李秉華)는 조선 후기의 인정 많은 향리. 대관령의 험난한 고개를 넘으며 겨울에 얼어 죽는 이들을 안타깝게 여겨 벼 500석쯤 되는 돈으로 오두막을 짓고 오두막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오두막일에 전념하며 여행자를 위한 주막을 운영했다고 한다.

 

 

대관령 옛길은 아주 좁은 오솔길이었는데, 조선 중종 때 고형산이라는 사람이 지금처럼 길을 넓혔단다.

 

 

율곡 이이는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곶감 100개를 챙겨 대관령 옛길을 지났다고 한다. 한 굽이 넘을 때마다 곶감을 한 개씩 먹었는데 대관령을 다 넘고 보니 딱 한 개가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대관령을 아흔아홉 굽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작은 계곡을 건너기도 한다.

 

 

 

 

좁쌀풀 꽃을 찍고 있는 내 모습을 찍고 있던 막내 신 샘! 딱 걸렸다!

 

 

 

 

 

그리고 길 주막을 복원한 귀틀집에 도착한다. 아마도 기관 이병화라는 향리가 지었다는 주막이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주막에 도착할 무렵부터 빗방울이 제법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모두들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아픈 다리를 잠시 쉬게 한다.

 

 

 

 

대관령 옛길 종착지인 대관령박물관까지는 2.6km

 

 

 

 

이제부터는 계곡을 끼고 걷는 길이다.

 

 

 

 

 

 

어느 새 비가 그쳤다.

 

 

하제민원 부근, 계곡 옆 암벽에 '영해이씨 세장동(寧海 李氏 世藏洞)'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고려말 영해이씨 "이장밀" 이라는 사람이 고려가 망하자 처가가 있던 이곳 강릉으로 은거하여 살았다고 한다.

 

 

 

하제민원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던 마을로서 고개를 넘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곳이란다. 험한 길을 넘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던 곳이리라. 

 

 

그리고 원울이재라는 작은 고개를 지난다. 멀리 서울에서 부임하게 된 원님들이 힘든 여정 때문에 울고, 떠날 때는 강릉 사람들의 따스한 정을 잊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는 데서 유래한 재미있는 이름이다. 

 

 

 

마침내 대관령박물관에 이르렀다. 두 시간이면 온다는 길이지만 주막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다 보니 한 시간이 오버됐다.

 

 

 

일생을 고미술품 수집과 연구에 힘썼다는 홍귀숙 이란 분이 1993년에 세웠다고 한다. 이듬해에 도둑이 들어 전시된 문화재 30여 점이 털렸다고 한다. 지금은 박물관과 전시된 문화재가 모두 강릉시에 기증되었다.

 

 

 

 

입구에 선 돌장승 두쌍이 눈길을 끈다.

 

 

이 둘은 잘 생긴 얼굴에 초탈한 듯한 표정...

 

 

 

놀란 듯 퉁방울 눈을 한 이 둘은 좀 어벙하면서도 익살스럽다.

 

 

 

부처님은 어디 가시고 광배와 좌대만 남았는지...

 

 

 

독특한 형상의 무인상...

 

 

 

 

 

정원의 쌍사자석등, 부도탑, 석탑들

 

 

 

 

 

문인석과 동자석

 

 

 

 

 

 

이렇게 대관령 옛길 트레킹을 마치고 강릉에서 저녁 식사를 한 다음 숙소인 오색으로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