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천상세계로 오르는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모산재 2014. 5. 21. 14:52

 

상원사를 둘러본 다음 사자암과 적멸보궁으로 향한다.

 

 

산비탈길로 접어들자 적멸보궁까지 1.4㎞라는 안내판이 나타난다. 해발 1,190m 지점의 적멸보궁까지는 30분이상 걸린다. 왼쪽으로만 시야가 트이는 비탈길이 계속 이어진다. 

 

 

적멸보궁에 오르기 전 급비탈을 이룬 골짜기에 안긴 중대 사자암이 나타난다. 1050m 높이의 급비탈에 층층이 5단으로 지어진 전각들은 마치 적멸보궁 앞에 세운 하나의 5층 목조탑 같다. 

 

 

 

 

사자는 문수보살이 타고 다니는 동물, 사자암이 문수보살을 받드는 암자임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 15년인 645년 월정사와 함께 창건된 사자암은 적멸보궁 참배를 위한 향각(香閣)이자 수호 암자의 역할을 해왔다. 그간 요사채로 사용되던 향각이 낡아 오대(五臺)의 상징으로 5단으로 된 전각을 2006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1층은 해우소 및 세면장, 2층은 공양간, 3층은 객실, 4층은 스님 수행 공간, 5층은 비로전이다.

 

사자암은 한때 조선 3대 임금 태종의 원찰이기도 했다.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11종(宗)이던 불교 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는 등 척불에 앞장선 태종은 왕위에 오른 해 (1401년)에 권근에게 명하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는데,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에 젖게 하라."고 명하기까지 하였다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중대 사자암의 법당은 비로전(毘盧殿)으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문수보살상과 보현보살상이 좌우 협시보살로 조성되어 있다. 

 

 

 

1만의 문수보살이 계셨다는 전설을 표현하기 위해 비로전 내벽에는 각각 다섯 사자좌의 문수보살을 중심으로 상계(上界)에 500 문수보살상과 하계(下界)에 500 문수동자상이 펼쳐져 있다.

 

 

 

사자암 뒤 산 언덕에는 백작약 하얀 꽃이 연꽃인 듯 피었다.

 

 

 

사자암 맨 뒤에 있는 음수대에서 감로수를 한 모금 마신 다음 적멸보궁으로 향한다. 비로봉 쪽으로 0.6km 거리, 20분 정도 걸린다.

 

완만하게 산 허리를 돌아가는 길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다람쥐 한 마리가 한참 동안 멈춰 서서 귀여운 포즈도 취해 준다.

 

 

 

 

조금 더 올라가니 바닥에 돌을 깔아 놓은 길이 계속 이어진다. 적멸보궁의 품격을 고려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딱딱하고 부자연스런 느낌만 든다. 원래 부드러운 흙길이었다는데 아쉽기만 하다.

 

 

적멸보궁 아래에는 '용안수(龍眼水)'라는 표지가 있어 보니 작은 우물이 바짝 말라 있다. 적멸보궁이 풍수지리상 용머리에 위치하고 이 우물이 용의 눈에 해당되어 붙인 이름이라는데 가뭄도 못 이기는 우물 이름이 너무도 무색하다.

 

 

적멸보궁이 있는 언덕이 높아 마지막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조금 숨차다.

 

 

 

해발 1000 미터가 넘는 고산 능선에 자리잡은 적멸보궁, 천상의 세계에 한층 다가서는 느낌이 신비롭다.

 

 

 

상원사 적멸보궁은 양산 통도사, 태백산 정암사, 영월 법흥사, 설악산 봉정암 등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석가모니의 몸에서 나온 진신사리는 여덟 섬 네 말이 나왔다고 전하며 주로 지금은 남방 불교 국가에 모셔지고 있다.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각으로 전각 안의 좌대에는 붉은 방석만이 놓여 있을 뿐 불상이 없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바로 옆 언덕에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전각 뒤쪽 잘 다듬어 놓은 작은 언덕, 작은 비석 하나가 서 있는 자리가  진신사리가 묻힌 곳. 

 

 

 

이 비는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방한암 스님이 찾아내 다시 세워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진신사리를 안치한 장소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비를 '세존진신탑묘'이라고도 하고 '불뇌보탑(佛腦寶塔)'이라고 하는데, 앞뒤로 5층 마애불탑과 사리를 모신 그릇 형상이 새겨져 있다.

 

 

 

적멸보궁은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의 기슭, 용머리에 해당하는 시야가 탁 트인 명당터에 자리잡고 있다.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맥들을 병풍으로 두르고 있었다.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란다.

 

이 자리를 보고 조선 영조 때 어사 박문수는 "승도들이 좋은 기와집에서 일도 않고 남의 공양만 편히 받아 먹고 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고 감탄했단다. 둘도 없는 명당이란 이야기다.

 

 

 

 

636년(선덕왕 5)에 당에 들어간 자장(慈藏)은 오대산 태화지(太和池) 가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정골과 치아 사리 등을 받아서 귀국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건의하여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으며, 643년에 오대산을 문수보살의 거주지로 보고 사리를 모신 뒤 적멸보궁을 지었다.

 

오대산은 최고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호령봉, 상왕봉, 동대산, 두로봉 등 5개 봉우리가 연꽃을 닮았다. 부처님 정골사리가 있어 법신이 충만한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산허리엔 보살들이 현현하는 다섯 ‘대(臺)’가 있다. 동대 관음암에는 1만 관세음보살, 서대 염불암에는 1만 대세지보살, 남대 지장암에는 1만 지장보살, 북대 상두암도 1만 미륵보살이 머문다. 중대사자암은 1만 문수보살이 있으며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 

 

중대, 동대, 서대, 남대, 북대 보살들이 적멸보궁에 계신 부처님 설법을 듣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