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만 여행

운남 여행 (10) 리장고성, 세습 족장 목부, 만고루

모산재 2014. 6. 28. 11:51

 

밤새 비가 내리더니 일어난 아침에는 날이 개었다.

 

엊저녁 나가서 술을 마신 사람들이 예약해 놓았다는 숙소 앞 식당 샹파라오에서 아침 식사를 한다. 쓰촨성 출신 젊은 부부가 쌀죽에 쓴 맛이 나는 야채를 넣은 계란말이 등 쓰촨성 정통요리 식으로 준비해 놓았는데 먹을 만했다.

 

오전에 자유시간을 갖고 오후에 샹그릴라로 출발할 예정. 모두들 짐을 싸서 한 방에 보관해 둔 다음 자유롭게 리장고성 구경에 나선다.

 

 

고성 입구 사방가로 이어지는 곳에는, 장쩌민 주석의 글씨로 '세계문화유산 리장고성'이라 새긴 조벽이 서 있다.

 

 

 

 

그리고 거대한 수차(大水車).

 

옥룡설산의 만년설이 옥수채에서 솟아나 흑룡담공원을 지나서 옥하(玉河)를 이뤄 이곳에 도착한 물이 리장고성의 수로로 흘러든다.

 

 

 

전통 복장을 한 나시족 여인들과 관광객들이 손을 잡고 타탸오(打跳)라는 나시족 춤을 추고 있다. 

 

발바닥으로 땅을 치고 스텝을 옮기며 원무를 추는 아주 단순한 동작이지만 다 함께 손을 잡고 추는 춤이 즐겁고 아주 중독성이 있다.

 

  

이 춤을 출 때는 마당 가운데 모닥불을 피우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 세상에 아직 빛과 불이 없었던 아주 오래 전, 하마따미라는 모수어런의 시조가 인간을 위해 불을 마련해 주려고 했다. 그는 불을 구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갔고 불을 구한 후, 그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태워가며 고생끝에 다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온 몸에 불이 붙어 횃불이 된 상태였다. 이렇게 불은 그로부터 인간들에게 전해졌지만 그의 몸은 다 타서 없어져 버렸다. 불을 전해받은 인간들은 하마따미의 공덕을 기리고자 제사를 지냈는데 그 의식으로 불을 피워 둘레를 돌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며 나시족의 따티아오(打跳)가 되었다.

 

 

 

 

다음은 나시족 족장궁이라 할 수 있는 목부(木府).

 

나시족은 현재 인구 30만 정도의 소수민족이다. 11세기 초 쓰촨성을 거쳐 바오산(寶山)을 넘고 백사(白沙)에 살던 나시족은 이곳 리장에 도시를 건설한다. 쿠빌라이 칸에 정복된 이후 나시족 족장은 세습 족장인 토사(土司)로 원, 명, 청을 거치며 22대 470년을 통치하였다.

 

명나라가 서면서 세습족장 토사는 주원장으로부터 목(木)씨 성을 받고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되는데, 세습족장 목씨 토사가 업무를 보던 족장궁이 바로 목부(木府)다. 원나라 말기에 리장의 목부가 건설되었지만 1723년 토사제도는 폐지되었고, 목부는 청말에 훼손되었던 것을 1998년에 재건하였다고 한다.

 

 

목부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천우류방(天雨流芳)'이라고 새긴 패방이 서 있다. 이는 "하늘의 비가 향기로운 꽃을 피우게 한다."는 뜻인데, "황제(천자)의 은덕이 온 세상을 향기롭게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목부는 남조국이나 대리국과는 달리 그만큼 중국의 역대 왕조에 충성을 다했으니까. 그런데 '천우류방'이란 발음은 "책을 읽으러 가자(讀書去吧)"라는 나시어의 발음과 비슷하다고 하니 중의적인 뜻을 담은 말인 듯하다.   

 

 

'성지(聖旨)'라고 새겨져 있는 아래 '충의(忠義)'라고 적혀 있는 충의방. 

 

'충의'라는 글씨는 명나라 만력제 신종(임진왜란 당시 황제로 명나라 멸망을 이끈 인물로 평가된다)이 당시 토사인 목증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충의방은 구조가 장엄하고 조각이 정밀하여 "대리의 삼탑사 ,여강의 석패방"이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세습족장 목씨 토사가 국가 대사를 보는 의사청(議事廳). 7칸으로 된 2층 건물로 편액 글씨는 명 태조 주원장이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목부는 사자산에 기대어 동향을 하고 있다. 축선을 따라 차례로 '천우류방(天雨流芳)' 패방, 충의방(忠義坊), 의문(儀門), 의사청(議事廳), 만권루(萬卷楼), 호법전(護法殿), 광벽루(光碧楼), 옥음루(玉音楼), 삼청전(三清殿) 등 15채의 전각과 162칸의 방이 있다.

 

목부는 명나라 건축의 특색과 예술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으며, 한족 백족 나시 족의 건축 기술을 기묘하게 이용하여 3민족의 동심동덕(同心同德) 단결의 상징이기도 하다. 

 

 

만권루(萬券樓)는 이름처럼 서책 만권을 보관하는 누각일 듯...

 

이곳에는 2천 년 문화유산의 정화(精粹), 천 권의 동파 경, 백 권의 라마교의 경전, 세습족장의 시집, 유명한 시인들의 서화(書畵)등이 수장되어 있다고 한다.

 

 

 

만권루 사이로 올려다본 사자산 만고루(萬古樓)

 

 

 

옥음루(玉音樓)는 성지(聖旨-임금의 명령)를 받는 곳과 가무를 보며 즐기는 곳이라 한다.

 

 

뒤편에는 '천위지척(天威咫尺)'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데, "하늘의 위엄이 지척에 있다."는 뜻이니 천자와 퍽 가까운 자리임을 나타낸다. 아마도 성지를 받는 전각과 관련된 편액인 듯하다.

 

 

 

오른쪽으로 사자산 만고루로 오르는 계단길의 긴 회랑이 보인다.

 

 

 

목부의 가장 뒤편에 자리잡은 삼청전(三靑殿). 

 

삼청은 도교에서 하늘 위의 별들의 세계인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을 합쳐서 부르는 말인데, 세습족장이 도교에 심취했음을 보여 주는 건물이다. 

 

 

 

무슨 꽃일까... 찾아보니 장병상아삼(长柄象牙参)이라는 풀꽃과 닮았다. 학명은 Roscoea debilis.

 

 

 

만고루(萬古樓))는 사자산 정상에 우뚝 솟은 높이 33m의 6층 누각으로 1997년에 지었다 한다.

 

 

 

 

만고루에서 바라본 리장시 전경. 북쪽으로 펼쳐진 옥룡설산의 장엄한 풍경을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구름이 잔뜩 끼어 보이지 않는다.

 

 

 

목부와 리장고성 전경

 

 

 

 

리장은 남송 시기부터 청나라 시기까지 479여 년 간 목씨 토사(세습족장)가 통치하여 왔다. 1253년 쿠빌라이가 10만 몽고군을 거느리고 대리국을 토벌하러 가죽 주머니와 뗏목을 타고 보산에서 금사강을 건널 때 나시족 수령 아종아량(阿琮阿良)은 보산 나루터에 가서 영접하고 대리국정복에 협조하였다. 이로부터 봉건영주 세습 통치가 시작되어 아갑아득(阿甲阿得)까지 전해졌으며, 명나라 주원장으로부터 주(朱)가의 일원이라 성을 하사받아 '주(朱)'에서 '인(人)'자를 뺀 목(木) 씨라는 성을 쓰게 되었다.

 

세습 족장의 관아인 목부(木府)가 궁궐처럼 화려하게 지어졌고, 명나라 시기에 통치 지역은 운남성의 서북부를 중심으로 사천성 서남부, 티벳의 동남부 지역에 걸쳐 융성하였다. 하지만 1723년 소수 민족의 영주가 세습 통치하는 제후령을 폐지하고 중앙 관리인 류관(流官)을 파견해 직접 통치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이를 개토귀류(改土歸流)라 한다.)목씨 토사의 통치시대는 막을 내린다. 

 

목씨 토사는 중국 왕조에 충직하였으며 한문화를 열심히 배웠고 중원의 문인·묵객들과의 교류도 많았다. 특히  목증은 학식이 풍부하고 무략도 있었고 변방 지역을 개척하였으며 인재와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목씨 통치 시기의 가장 흥성한 시기였다. 후에 목증은 명 왕조의 불안정함을 미리 알아차려 관직에서 물러나 36살이 되는 해 삼림에 들어가 시를 읊고 진리를 논의하면서 살았다. 그의 시는 “사고전서(四庫全書)등에 수록되었다. 

 

 

만고루에서 내려와 도장포에서 동파문자 도장도 새기고, 오 선생 부자는 T에 초상화를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사쿠라카페에서 점심으로 물냉면을 먹는 것을 마지막으로 리장에서의 3박 3일 일정은 모두 끝났다. 배낭을 챵겨 들고 다음 여행지인 중뎬과 다친(德欽)을 향해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