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바이칼 여행

몽골 바이칼 여행 (9) 데카브리스트 기념 박물관에서 혁명과 사랑을 생각하다

모산재 2014. 6. 4. 06:38

 

제6일(8월 3일) 오후 , 이르쿠츠크

 

데카브리스트 기념 박물관에서 혁명과 사랑을 생각하다

 

 

 

 

이르쿠츠크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데카브리스트 기념 박물관으로 이동한다.

 

데카브리스트 중에서 '발콘스키와 트루베츠코이가 살던 집이 기념박물관으로 개방되었는데, 우리는 발콘스키의 집만 구경할 수 있었다.

 

 

발콘스키의 집(출처 : 네이버 지식 백과)

 

 

 

데카브리스트들은 프러전쟁에 참전해 나폴레옹 군대를 추격하여 프랑스까지 진격한 러시아 젊은 장교들이 짜르체제에 대항해 1825년 12월에 혁명을 일으켰다 실패한 젊은 귀족 장교들이다. 100여 명이나 되는 귀족 장교들과 가족이 유형을 오게 되면서 이르쿠츠크는 러시아 귀족 문화가와 유럽풍의 문화가 꽃 피어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명성을 듣게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데카브리스트의 혁명에 대해 조금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Vasily Timm(1820–1895), 원로원 광장의 데카브리스트에 접근하는 기병대

 

 

1812년,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침공하여 9월초 모스크바에 입성했으나 화재로 폐허가 된 모스크바에서 추위에 지치고 굶주리며 퇴각한다. 러시아군은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좇아 파리에 입성한다. 이 전쟁에 참여했던 젊은 장교들은 유럽의 자유로운 공기를 흠뻑 쐬고 돌아왔는데 전제적인 짜르제와 농노제가 존재하는 조국의 현실에 눈뜨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한다.

 

입헌군주제와 공화제를 두고 대립하고 있던 중 1825년 11월 19일 알렉산드르1세가 죽고 후위를 정하지 못한 혼란을 틈 타 니콜라이 1세의 대관식이 있을 예정일인 12월 14일에 봉기하기로 한다. 그런데 기밀이 새어나갔지만 강행하기로 하고 원로원 광장에서 3천 명이 넘는 병사들과 장교들이 최고 지도자인 트루베츠코이를 기다렸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고 포위한 짜르의 기병대에 의해 거사는 실패로 끝난다.

 

이날 즉위한 니콜라이1세는 600여 명의 반란 관여자들을 직접 심문한 후 5명은 교수형에 120명은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낸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은 위대한 실패였다. 유시민은 <청춘의 독서>란 책에서 푸시킨의 <대위의 딸>에 대해 쓴 글에서 데카브리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은 세계 역사에서 달리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철없는 청년들의 고결한 반란’이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문명의 진보에 대한 신념, 낙후하고 퇴락한 조국 러시아를 살리겠다는 애국심, 체제를 전복하는 사업에 얼마나 큰 위험이 따르는지 전혀 헤아리지 못한 순진무구함. 전제왕정과 계급제도의 최대 수혜자이면서 반기를 든 아름다운 자기부정. 데카브르스트의 비극적 최후는 이런 요소들이 버무려진 역설의 미학과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실제 상황으로 보여주었다.

 

 

귀족의 특권과 보장된 입신출세의 길을 버리고 조국 러시아와 인민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진 그들의 행동은 러시아의 근대 정신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비록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들의 혁명 정신은 다음 세대의 러시아 혁명가들의 사상적 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뒷날 '게르첸의 회상'이라는 글에서, "데카브리스트들은 (러시아 사회주의의 아버지인) 게르첸을 각성시켰고, 게르첸은 혁명적 선동을 시작했다. (그 이후의 혁명은) 이것이 차차 확대되고 강화되어 나간 것이다."라고 썼다.

 

 

 Karl Kolman (1786-1846)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이 기념 박물관은 데카브리스트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세르게이 발콘스키(1788~1865)가 살던 집을 개방한 것이다.

 

 

 

발콘스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톨스토이의 7촌 아저씨로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안드레이 발콘스키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발콘스키는 1805년까지 그는 기마병으로 프러시아와 핀란드에서 50번 이상의 전투에 참가해서 빛나는 전과를 올려 24살의 나이에 그는 연대의 연대장까지 승진을 했으며 1810년에는 터키와의 전투에도 참가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1812년에 그는 기병대의 캡틴으로 승진했고 1820년에 아름다운 마리아 니콜라에브나와 결혼했다.

 

발콘스키는 니콜라이 1세와 어렸을 적 친한 친구였지만 정략가인 어머니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사형을 피했다.

 

이르쿠츠크 북쪽 30여km 떨어진 조그만 마을에 정착하고 살던 발콘스키는 1845년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이사하면서 살고 있던 목조 주택을 이르쿠츠크로 옮긴 후에 재조립하여 1847년부터 1856년까지 9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았다. 발콘스키가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뒤 한때는 고아들을 위한 학교로 운영되기도 했으며 1985년에 데카브리스트 발콘스키 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발콘스키가 살던 당시 이 집은 이르쿠츠크에서 유명한 사교 장소였으며 정치 토론을 하거나 문인들이 모여 시 낭송을 하거나 명망있는 연주가들을 초청하여 음악회를 갖기도 하였다. 데카브리스트와 부인들의 문화 활동은 이르쿠츠크를 수준 높은 문화의 도시로 성장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르쿠츠크와 치타 등에 학교를 세우고, 현지 동식물 교본을 만들고, 시베리아를 계몽하고 문화화하는 데 앞장섰다.

 

 

기념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바로 데카브리스트 아내들의 초상. 

 

 

 

 

 

윗줄 첫번째 여인이 트루베츠코이의 아내 예카테리나, 두번째 여인은 발콘스키의 아내 마리아다.

 

예카테리나 트루베츠카야(1800~1854)는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맨 먼저 달려왔던 사람으로 데카브리스트 부인 중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마리아 집안과 달리 예카테리나의 부모는 그녀의 시베리아행에 반대하지 않았다.

 

예카테리나 집안은 문화적 수준이 높은 가문으로 그녀의 집 도서실에는 장서만 5천 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예카테리나는 트루베츠코이(1790~1860)를 파리에서 처음 만나 1821년에 결혼했다. 남편은 그녀보다 10살 위였다.

 

그녀는 트루베츠코이를 찾아 시베리아 마차를 타고 북풍한설의 얼음길을 달려 예니세이강을 건너고 이르쿠츠크에 도착한다. 1826년 9월, 수 개월만에 이르쿠츠크에 도착했으나 남편은 그곳에서도 훨씬 더 가야 하는 네르친스크의 광산에 가 있었다. 그러나 그곳으로의 여행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이르쿠츠크의 총독은 당국의 명령에 따라 그녀에게 되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그녀는 5개월을 버텼다. 그 사이에 발콘스키 부인 마리아가 도착했다.

 

여섯 달을 지체하고 나서야 총독은 중앙 정부에 그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물었다 한다. 니콜라이 1세가 직접 작성한 문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첫째, 트루베츠카야는 비록 귀족이기는 하지만 다른 데카브리스트 부인들과 똑같이 취급되어야 하며, 다른 죄인이나 불랑배처럼 다뤄져야 한다. 따라서 특별한 법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만약 시베리아에서 신상의 위협이 오더라도 걱정할 바가 아니다.

둘째, 만약 데카브리스트들이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하는 동안 아기를 낳으면 이들에게는 부모와 같은 신분을 주되 그 지방의 농부들과 같이 취급되어야 한다.

셋째, 트루베츠카야는 시베리아에 유배갈 때 아무런 재산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넷째, 만약 그녀가 이르쿠츠크를 지나서 더 먼 동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그것을 허락해 주되, 그 시점부터 그녀가 데리고 가던 노예와 하녀들을 그 자리에 두고 가야 한다. 다섯째, 일단 이르쿠크츠를 떠나고 나면 러시아로 되돌아올 수 없다. 단, 짜르 황제가 특별히 허가해 줄 때만 돌아올 수 있다.

 

 

 

 

 

 

트루베츠카야는 이 같은 조건이 담긴 허가서에 서명을 하고 1827년 2월이 되어서야 네르친스크의 블라고다스크 은광에서 중노동을 하는 남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처음 이곳에 도착해 수용소 벽 틈으로 족쇄를 찬 여위고 핼쑥하며 수염이 덥수룩한 채 해진 외투를 입고 있는 공작이었던 남편의 모습을 보고 실신했다고 한다.

 

두 부인은 은광 근처의 허름한 나무집을 사들여 남편들을 뒷바라지 했다. 얼마나 초라한 집이었는지, 에카테리나는 "벽으로 머리를 하고 누우면 발이 문에 닿았다. 겨울 아침에 눈을 뜨면 옹이 틈 얼어붙은 사이로 머리카락이 통나무에 얼어붙었다."라고 회고하였다고 한다.

 

 

귀족 부인들이었지만 음식과 빨래, 뻬치카를 때는 일 등 모든 것을 직접 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의 남편들 뿐만 아니라 함께 있던 데카브리스트 유형수들에게도 헌신적으로 봉사했고 주민들에게도 겸손하고 친절한 태도로 대해 칭송을 받았다.

 

1829년 데카브리스트들에게 족쇄를 풀어주는 결정이 내려졌다. 강제 노역은 그후에도 10년간 더 해야 했다. 이듬해 첫 딸 알렉산드라, 이후 연달아 아이들을 낳았다. 트루베츠코이는 1839년 13년 만에 강제노동형을 마치고, 이르쿠츠크 인근의 부랴트 마을인 아요크로 이주한 후로는 농사를 짓고 살았다. 금광 개발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예카테리나는 이곳에서도 항상 어려운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었고, 페테르부르크에서 가족이 보내 온 약들을 환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예카테리나를 "명철한 지혜와 선한 가슴이 하나가 된 무한한 자비의 화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르쿠츠크 이주를 위해 페테르부르크에 청원을 하여 발콘스키 가족은 1845년 허가가 떨어졌지만, 트루베츠코이 가족은 1854년에 가서야 허가가 떨어졌다. 그런데 새 집인 목조 가옥을 짓던 중 예카테리나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새 황제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사면을 받기 2년 전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동시베리아 총독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가난한 사람들도 많이 찾아와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그녀는 앙가라 강변에 가까이 있는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먼저 간 아이들과 함께 묻혔다. 트루베츠코이는 이르쿠츠크를 떠나지 않으려 했으나 3년 뒤인 1857년 아들의 교육을 위해 모스크바로 떠났다.

 

데카브리스트들은 대부분 미혼 젊은이들이었는데 기혼자는 모두 18명뿐이었다. 귀족 청년들의 부인들은 황실로부터 "국가에 반역한 남편을 버리고 귀족의 신분을 유지하면서 재가를 가든지, 아니면 귀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버리고 시베리아 유형을 가든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런데 11명의 부인들이 혁명가 아내의 길을 선택하고 삼만리 여정의 시베리아 유형을 떠났다.

 

당시 시베리아 유형은 아무 교통 수단이 없는 북풍한설의 얼음길을 걸어서 1년 넘게 가야했고, 영하 30-40도 혹은 50도의 살인적 추위와 맞서 유형길을 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도중에 죽은 사람도 있었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했을 때 총독은 강제노동 중인 남편을 만나기 전에 귀족 신분을 버리고 재산을 포기하며 자녀들은 농민 신분으로 살 것이며, 남편이 죽어도 귀족사회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을 서약하도록 했다. 러시아의 최고 가문에서 자란 귀족 여인들은 모든 가정일들을 처음부터 배워야했다.

 

 

 

남편을 따라 유형지 시베리아로 기꺼이 떠나온 데카브리스트 아내들의 초상

 

 

 

이 박물관 집의 안주인으로 살았던 마리아 발콘스카야(1805~1862)도 그런 여인 중의 한 사람이다.

 

10대 중반 소녀 시절 러시아 민족시인 푸쉬킨과의 연인으로 크림반도로 휴양을 가기도 했던 마리아는 집안의 반대로 17살 연상의 발콘스키와 결혼한다.

 

 

이곳에 마리아의 초상이 셋이 보이는데, 양쪽의 사진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사랑스럽고 우아한 데 비하여, 가운데 사진은 시련과 고난 속에서 결기와 의지가 다져진 강단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남편을 따라 이곳에 온 뒤의 모습을 담은 초상인 듯하다.

 

 

 

 

 

발콘스키의 부인 마리아 발콘스카야는 사건이 터진 지 20여 일 뒤에 첫 아들을 낳았다. 나폴레옹을 패퇴시킨 전쟁 영웅인 마리아의 아버지 라옙스키 장군은 발콘스키로부터 이혼 동의를 받아왔다. 마리아는 당국과 가족들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거부하며 "귀족사회에서 자랄 행복한 아기보다 나는 불행한 남편을 따라가야" 한다며 첫 돌 지난 아기를 친정에 맡겨놓고 시베리아로 떠난다.(그녀는 2년 후 아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수 개월에 걸친 여행 끝에 네르친스크 블라고다스크 광산에서 족쇄를 찬 남편을 마주친 그녀는 발콘스키의 무릎에 엎어져서 족쇄들에 입맞추고 그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회고록에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어렵게 세르게이가 머무는 감방에 들어섰을 때 방은 길이가 3아르쉰(1아르쉰=71.12cm), 너비가 2아르쉰 정도 되었다. 그리고 천정이 너무 낮아서 서 있을 수 없었는데, 이 좁은 방을 트루베츠코이와 오블렌스키 이렇게 셋이서 같이 사용한다는 거다. 오볼렌스크는 침상마저 놓을 수가 없어서 트루베츠코이의 침상 위에 나무 판자들을 고정시켜서 거기서 눈을 붙였다. 어두워서 안이 보이지 않는 방문을 내가 조심스레 열자 남편이 발에 채워놓은 족쇄를 철거덩철거덩거리며 달려와서 내 앞에 엎어졌다. 그 족쇄들이 내 가슴에 불을 붙이고 나를 찢어버렸다. 나는 그의 무릎에 엎어져서 먼저 그의 발에 채인 족쇄들에 입을 맞추고 나서 그에게도 키스를 퍼부었다.                 - <발콘스카야의 회고록>에서

 

 

마리아는 모스크바대학 창설자이자 인문, 이공계의 모든 학문을 섭렵했던 천재 로마노소프의 증손녀라고 한다. 마리아는 일기에서 "나와 남편의 진정한 삶은 시베리아에서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버티기 힘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함께 하려한 마리아의 끈끈한 사랑이 절로 가슴에 다가온다.

 

결혼 당시 18세에 불과했던 마리아는 주변의 설득과 회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편이 석방될 때를 기다리며 현지 어린이들에게 피아노와 음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마침내 남편이 석방되고 복권이 된 후에는 자기 집에서 시 낭송회와 미니 콘서트를 열었다.

 

마리아는 1862년에, 발콘스키는 1865년 한겨울에 죽음을 맞이한다.

 

 

 

안주인, 발콘스키의 아내 마리아의 거실. 그 당시의 가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푸른 천에 수놓은 그녀의 수예 작품이 눈길을 끈다.

 

 

 

 

 가운데 초상은 발콘스키의 것으로 보인다.

 

 

 

거실 한쪽에는 마리아가 쓰던, 세계에 2대밖에 없다는 피라미드형의 포르테피아노가 놓여 있다. 1792년에 제작된 피아노로,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연주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데카브리스트들의 당시 유형 생활 모습을 묘사해 놓은 그림.

 

 

 

 

 

앙상하게 야윈 모습의 데카브리스트들의 발목에는 22kg 무게의 쇠고랑이 채워져있다. 옆에서 음식을 나눠주고 있는 여인과 아래의 여인들은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의 혹독한 겨울을 선택한 아내들.

 

당시 시베리아로 남편들을 찾아온 열한 명의 부인들은 이틀에 한번씩 돌아오는 면회 시간을 통해 옥바라지를 했다. 아침 다섯 시, 발목에 쇠사슬을 찬 채 광산으로 은을 캐러 가는 소리에 잠을 깬 부인들은 손수 만든 음식을 수발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일 주일에 한번 일요일에 교회에 갈 때와 목욕을 할 때만 쇠사슬을 풀 수 있었을 뿐, 잠 잘 때나 일할 때는 내내 쇠사슬을 차고 있었다.

 

 

 

 

 

 

큰 액자 속의 인물이 집 주인인 발콘스키

 

 

 

 

 

피아노

 

 

 

 

데카브리스트들의 육필 흔적들...

 

 

 

 

 

 

 

 

 

발콘스키의 집 현관 앞에서 마지막 흔적을 남기고 우리는 데카브리스트와 이별을 고한다. 

 

 

 

 

 

발걸음이 멀어지면서도, 어쩌면 혁명에 대한 이들의 순결한 열정이 지난 시대 우리 청춘의 가슴 속에도 알게 모르게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데카브리스트들의 혁명적 열정과 사랑은 근대 러시아 청년 지식인들에게도 크나큰 흔적을 남겼고, 세계사적으로도 19세기~20세기 초의 러시아 지성사와 정신사는 조국과 민중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전 세계 청춘들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역사로 기억될 것이다.

 

 

 

다시 바이칼호텔의 서울식당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한다. 러시아에서 느끼한 식사만 하다 김치와 오이 겉절이를 먹으니 얼마나 상쾌한지!

 

 

이제 러시아에서의 여행은 끝나고 몽골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 이르쿠츠크에서 울란바타르까지 2박 1일의 대륙 횡단 열차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강을 건너 이르쿠츠크 역으로 달린다. 오늘 따라 유난히 덥다. 이르쿠츠크 역 앞 도열해 있는 매점에서 스베따의 도움을 받아 시원한(?)음료수와 맥주를 산다.

 

그리고 가이드 스베따와 기사 빅토르 부녀와 함께 러시아의 마지막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고 러시아와의 이별을 고한다. 이르쿠츠크여 안녕~!!!

 

 

 

 

 

 

 

※ 데카브리스트와 그 부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

 

● 네크라소프의 장편 서사시 <데카브리스트의 아내>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네크라소프는 1870년대 초기 러시아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의 여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서사시를 발표한다. 1826년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들이 러시아 시베리아로 추방되는데 아내들이 유형에 처한 자신의 남편들을 찾아가는 꿋꿋한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다.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제1부에서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 중 한 사람인 트루베츠카야를 그리고 있고, 제2부에서는 보르콘스카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남편을 찾아가는 길에서 겪게 되는 역경을 그린 작품으로 러시아 여성들의 강인함을 묘사해 놓았다.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라는 서사시를 통해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인해 유형지로 떠난 남편들을 따라 험난한 여정을 펼쳤던 그들의 아내들을 작품 속에 그려놓았다.

 

제 1부 : 담당관은 시베리아로 유형당한 남편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어떻게 해서든 설득시키려 노력한다. 떼를 쓰는 아이이고 낭만적 공상가라고 말하며 공작부인으로서 위엄을 포기할 것이냐고 몰아세운다. 트루베츠카야는 이미 남편을 도와주기로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설득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가는 도중에 코삭 도적떼를 만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그래도 길을 떠나겠다고 말한다. 결국 아무 소용이 없자 담당관은 자신이 동행해 주겠다며 같이 길을 떠난다.

제2부 : 보론스카야 공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1812년 조국전쟁의 영웅 라예프스키의 딸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보론스키 공작과 결혼하게 된다. 데카브리스트의 난에 참여한 남편이 유배형을 당하자 따라서 이르쿠츠크로 떠나게 되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작가는 제2부에 담아 놓았다. 남편이 형을 받자 보론스카야는 가족의 반대와 정부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로 향한다. 아이는 데리고 갈 수 없다는 명령에 누이에게 아들을 맡기고 1826년 길을 떠난다. 이르쿠츠크에 도착해서도 관청으로부터 돌아가라는 경고를 받지만 보론스카야는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 광산, 공장 등지로 옮겨 다니며 징역살이하는 남편과 데카브리스트 동료들의 힘든 운명을 같이 나눈다.



●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데카브리스트

톨스토이가 두 살 때 세상을 뜬 어머니 마리아는 러시아의 유서깊은 귀족 집안인 발콘스키 집안 출신이다. 발콘스키 집안은 톨스토이 집안보다 훨씬 유명한 가문이다. 톨스토이는 어려서부터 전쟁에서 무공을 세운 발콘스키 집안의 선조들과 데카브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 데카브리스트들의 리더 중 한 사람이었던 세르게이 발콘스키는 외가의 7촌 아저씨뻘이었다. 혁명 당일 현장을 지도할 지도자였으면서도 나타나지 않았던 트루베츠코이도 톨스토이의 외가쪽 집안이라고 한다.

톨스토이는 바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하였고 <전쟁과 평화>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집필하려고 했다. 제1부는 1805년부터 1812년까지, 제2부는 실패로 끝난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제 3부는 데카브리스트들의 귀환으로 할 구상이었다. 제1부는 <1805년>에서 <전쟁과 평화>로 제목이 바뀌면서 완성이 됐지만 2, 3부는 결국 미완에 그쳤다.

톨스토이는 미완성이 된 <데카브리스트들> 서두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856년(28세)에 나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소설이 나아갈 방향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이미 처자식과 함께 러시아로 다시 귀환하게 되는 데카브리스트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주인공’이 혼란과 불행에 휩싸였던 시기였던 1825년 당시로 갔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 데카브리스트였던 ‘나의 주인공’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그의 젊은 시절을 알아내야 했다. 그가 혈기 왕성한 젊은이였던 당시는 1812년의 러시아, 즉 러시아가 나폴레옹과의 조국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바로 그 시점과 맞물린다. 그래서 나는 1825년을 남겨두고, 소설의 시작 무대를 1812년으로 옮겼다. 아직까지도 1812년 당시의 그 충만한 기운과 그 생생한 소리들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 푸시킨의 시

푸쉬킨은 데카브리스트들 중에서 25명과 친척 관계이고 56명과는 친구 관계로 데카브리스트들의 비밀활동 깊숙한 곳에는 늘 푸쉬킨이 함께 하고 있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의 모임에서는 '자유', '마을', 차다예프에게'등 자유사상이 담긴 작품들을 낭송했다.

그는 전제정치에 대항하는 시들을 많이 썼고 이것이 황제의 눈에 거슬려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던 그는 1820년 시골로 추방된다. 이 덕분에 그는 데카브리스트 반란에 연루되는 것을 면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감시와 검열을 당한다. 푸시킨은 옛 연인을 비롯하여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고 살던 귀족 부인들이 만 리길을 멀다 않고 남편을 찾아 떠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고 데카브리스트와 그들의 부인들에게 다음 시를 바친다.

 

너는 자랑스럽게 명예를 지켜라
이 고통은 헛되지 않을 것이고
반항자의 가슴은 꽉 차 있느니

불행의 신실한 누이여
희망은 암흑의 지하 속에서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리니
그날은 오고야 말리라
사랑과 우정이 그대들에게 임하리
캄캄하고 닫힌 곳 빗장을 열고
지금 그대들의 감방 그 탄광 속으로
내 자유의 소리가 다다르듯이
쇠사슬은 끊어지리라

감옥도 신념 앞에 열리고
자유가 네 앞에 비칠 것이니
형제들은 너에게 칼을 주리라

 

 

더보기
※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나폴레옹 전쟁 후 알렉산드르 1세는 전 육군장관 아락체예프에게 국내정치를 일임하고 국제정치에 몰두하면서 신비주의에 탐닉한다. 아락체예프는 자유주의자들을 물리치고 반동정치로 일관하여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나폴레옹 전쟁 때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의 공기를 흠뻑 쐬고 돌아온 청년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이 같은 반동정치를 그대로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여기서 입헌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 운동이 생겨난다. 애국 청년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 트루베츠코이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결사 '구제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 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선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뒤떨어진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동맹은 '복지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국의 스파이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군관구가 있는 남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결사'로 갈라졌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페스텔 자신이 기초한 것으로써, 농노해방, 신분제 폐지, 공화제 등이 그 근간을 이루었다. 뒤에 이 결사에 슬라브 민족들의 연방을 목표로 하는 '통일 슬라브 결사'와 '폴란드 애국 동맹'이 합류한다.
북방결사에서는 니키타 무라비요프가 입헌군주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1823년에 들어서면서 북방결사에도 시인 릴레예프와 베스투제프 형제 등, 공화주의자들이 가입하여 의견이 갈라진다.

1825년 11월 19일 알렉산드르 1세가 흑해 연안의 요양지 타간로크에서 급사했다(일설에는 신비주의에 빠져 은둔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18세기 말 파벨 치세에 제정된 제위 계승법에 따르면, 바로 아래 동생 콘스탄틴이 제위를 계승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전에 카톨릭 교도인 폴란드 백작의 딸과 재혼한 뒤 제위 포기 의사를 비쳐 형 알렉산드르의 승인을 받은 바 있었다. 따라서 제위는 다음 동생 니콜라이가 계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이 중대한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 당사자인 니콜라이도 몰랐고, 국가평의회도, 장관들도 몰랐다. 임종에 입회한 측근들도 아무 말을 듣지 못했다.

이로 인해 혼란이 일어났다. 국민들은 콘스탄틴의 즉위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원로원과 군대는 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바르샤바에 있던 콘스탄틴이 제위 포기 의사를 거듭 확인하고 1822년에 쓴 알렉산드르의 비밀성명이 공표된 후 니콜라이가 제위를 수락하기까지 약 3주일 동안, 황제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1826년 봄에 거사할 계획이었던 모의자들은 이 혼란을 틈타 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계획을 숙의했다. 현재 동원 가능한 3개 연대가 각기 다른 한 연대씩을 끌어들여 모두 6개 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면 남은 군대들은 압도되어 행동에 나서지 못할 것이다. 그 뒤 공격에 나서 니콜라이를 체포하고 정부기관을 장악한 다음, 니콜라이에게 헌법제정의회를 소집케 하고 그 사이에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다른 의견들이 속출하여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한 장교의 배신으로 거사계획이 니콜라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주모자들은 다급해졌다.

시인 릴레예프는 거사의 지도자로 뽑힌 트루베츠코이 공에게 지금 곧바로 행동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차피 실패한 것이라면 앉아서 당하느니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우다가 죽자."

옆에 있던 동료가 릴레예프를 얼싸안으며 외쳤다.

"우린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광스런 죽음이다."

마침내 즉각 봉기를 하기로 결정이 났다.

12월 14일 니콜라이 1세에 대한 충성 선서식 날, 베스투제프 형제는 근위대 병사들에게 권력을 찬탈한 니콜라이에 맞서 콘스탄틴을 지키자고 호소하여, 약 3,000의 병사를 이끌고 원로원 광장으로 왔다. 소수의 다른 군대와 민간인이 합류했다. 이들은 전제정치 타도와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자 했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 트루베츠코이 공이 나타나지 않았다. 지도자가 없는 반란군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선 채로 광장을 지켰다. 몇 배에 달하는 정부군이 광장 주위를 포위했다. 양군은 몇 시간 동안 그대로 서서 대치했다.

새 황제는 자신의 통치 첫날을 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대주교를 보내 반란군을 설득했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다. 진무에 나선 밀로라도비치 장군은 민간인 카호프스키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겨울의 짧은 낮은 벌써 저물고 있었다. 이윽고 니콜라이가 발포명령을 내렸다. 한 시간 만에 광장은 깨끗이 정리됐다.

남러시아에서도 페스텔 등 지도자가 체포된 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와 류민의 지도하에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진압됐다.

니콜라이는 반란 관여자 약 600명을 체포하여, 그중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 이렇게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러시아어로 '데카브리')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고 불린 이 운동에는 엘리트 귀족청년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민중을 무시했다. 거사에 민중을 끌어들이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신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뜻을 이루려 했다. 그러나 하급장교가 주축을 이루던 이들은 군대를 확실하게 장악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데카브리스트 운동은 '고립된 귀족청년들의 무모한 항의'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그러나, 헛수고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농노제를 폐지하고 차르의 전제체제를 타도하고자 했다. 공화제 또는 입헌군주제가 전제체제를 대체해야 했다. 이런 뜻에서 데카브리스트 운동은 러시아 최초의 혁명운동이었다. 이들의 봉기와 처형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일생을 전제정치에 대한 투쟁에 바쳤던 러시아 혁명운동의 선구자 게르첸은 항상 '다섯 명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순교의 죽음으로 찬양했다. 또한 그는 정치적 계획을 가지고 일으킨 이 첫 번째 혁명운동의 의의와 도덕성을 이렇게 지적했다.

"이론은 확신을 불러일으키고 본보기는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데카브리스트들은 귀족의 특권과 보장받은 입신출세의 길을 버리고 조국 러시아와 인민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데카브리스트 운동은 이후, 푸시킨과 네크라소프의 시에 등장하여 널리 애송되고, 러시아의 뜻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 본받아야 할 귀감으로 깊이 각인되면서 러시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출처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26234&cid=814&categoryId=1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