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바이칼 여행

몽골 바이칼 여행 (2) 울란바타르, 자이승 승전기념탑-수흐바타르광장-울란바타르공항

모산재 2014. 5. 25. 23:58

 

제2일(7월 30일) / 울란바타르, 자이승 승전기념탑-수흐바타르광장-울란바타르공항

 

새벽 네 시가 넘도록 술잔 마주치며 정담을 나누다 잠들었는데, 7시가 좀 넘어 잠을 깬다.

 

오늘 일정에 좀 여유가 있어서 8시가 다 되어 아침 식사를 한다. 호텔 뷔페로서는 초라한 음식들, 그나마 달걀 프라이가 먹을 만한지 프라이팬 앞에 줄이 이어진다.

 

그런데 포교하러 온 듯한 우리 나라 스님들이 줄을 섰다. 두 개를 달라고 하는 스님도 있고... 보기에 민망하다. 쯧~. 이 스님들 나중에 밀실에서 맥주 잔치 벌이는 것도 목격하게 된다.

 

 

아침에 호텔에서 바라본 울란바타르의 남쪽 산, 몽골을 상징하는 소욤보 문양이 새겨져 있는 산을 배경으로 몽골의 마지막 왕인 보그드 칸의 겨울궁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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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욤보 문양

 

몽골의 국기와 국장 그리고 공식 문서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소욤보를 구성하고 있는 문양을 위에서부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은 일반적으로 영원한 성장, 풍요로움, 성공의 상징이며, 세 개의 혀는 과거, 현재, 미래를 뜻한다. 태양과 달은 아버지의 하늘(텡그리)에 대한 숭배사상의 상징이다. 두 개의 삼각형은 화살이나 창의 뾰족한 끝 부분을 암시하고 있으며, 삼각형이 아래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은 안과 밖의 적을 무찌른다는 것을 뜻한다. 세로로 된 두 개의 직사각형은 몽골 국민의 정직함과 정의를 뜻하며,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모두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태극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완전하게 해준다는 것을 뜻한다. 공산주의 시절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를 뜻한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경계심이 물고기가 눈을 감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된다고 설명되었다. 가로로 된 두 개의 직사각형은 요새의 벽으로 단결과 힘, "둘의 우정은 돌로 된 벽보다도 강하다." 라는 몽골 속담을 뜻한다.

 

멀리 왼쪽으로 자이승 승전 기념탑이 솟은 작은 산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몽골문자가 새겨진 산 앞에는 몽골의 마지막 칸 보그드 칸의 겨울궁전이 자리잡고 있다.

 

 

 

9시 반 호텔을 출발.  울반바타르의 생명줄 톨강(※ 몽골어 ‘ㄹ’ 받침 발음은 ‘ㅅ’촉음으로 닫아주는 특징이 있는지 '톨ㅅ'로 들린다. ‘바이를라’도 ‘바이를ㅅ라’처럼 들린다)을 건넌다. 톨강은 강이라기보다는 하천에 가까운데, 서늘한 여름 기후에 우리의 가을 강물처럼 여물어 맑고 서늘하게 흐른다.

 

자이승 승전 기념탑에서 바라본 톨강과 울란바타르 시내 전경. 정자가 보이는 곳이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 영역이다.

 

오늘의 첫 여정은 '자이승 승전 기념탑’. 

 

몽골어로 '언덕'을 뜻하는 '자이승'은 울란바타르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봉우리로 울란바타르의 남산이라 할 수있다. 자이승으로 오르는 언덕길은 상쾌함을 넘어 추울 정도로 바람이 서늘하다. 

 

자이승 승전 기념탑은 사회주의 혁명 50주년을 기념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 및 독일군에 대항해 싸우다 전사한 소련과 몽골 군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승전 기념탑이라는데, 구 소련이 기증한 것이라 한다. 몽골관광성이 필수 관광코스로 지정할 만큼 몽골인의 자부심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기념탑과 연결된 거대한 원형의 조형물이 독특하다. 레닌의 초상이 새겨져 있고 소련과 몽골이 연합하여 일본과 독일의 침공을 막아내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역사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중앙에는 거대한 봉화단형의 향로를 설치하였는데, 해마다 5월 9일 점화한다고 한다. 

 

 

 

 

2차대전 승전을 기념하는 탑이라는데, 레닌상을 비롯 벽화 주인공은 거의 러시아인이어서 조금 씁쓸한 느낌이 든다. 승전 기념탑을 러시아에서 기증했다고 하고 구 소련의 절대적인 영향력으로 두번째로 사회주의 국가가 된 몽골의 역사가 반영된 듯하다. 

 

몽골 꼬마 소녀들과 포즈를 취한 오선생

 

우표와 근속 기념뱃지, 그림 파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승전기념탑 뒤편에는 우리의 서낭당과 닮은 오보가 있다.

 

 

 

'돌무지'란 뜻의 몽골어 오보. '어워'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보는 몽골인들의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고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몽골인들은 오보를 만나면 해가 도는 방향을 따라 세 차례 탑돌이를 하며 돌 하나를 집어 던지며 술이나 우유를 바치며 하늘과 땅, 사람을 위해 석 잔을 세 번 공중에 뿌린다. 오보는 고갯길 정상 등 전망이 좋은 곳에 설치되어 있다. 초원이 바다보다 막막하게 펼쳐진 몽골에서 몽골인들에게 오보는 길의 안내자이기도 했을 것이다. 

 

 

 

 

기념탐에서 내려다본 울란바타르 시내. 톨강을 건너는 다리가 '평화의다리', 오른쪽에는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이 보인다.

 

 


내려오는 길, 주차장 앞 언덕에 양과 염소 떼들이 나타나 한결이와 아련이가 아주 즐거워한다.

 

 

 

 

승전기념탑에서 내려오는 길, 톨강 가에 이태준 열사(1883~1921)의 묘비가 보인다. 이태준은 독립운동가이자 몽골 마지막 황제의 어의(御醫)라고 한다.

 

낯선 땅에서 만나는 생소한 이름에 잠시 멍해지는 느낌이 든다. 잃어버린 독립운동사를 새롭게 만나는 느낌이 당혹스럽다고나 할까... 

 

 

이 태준 선생의 행적은 오랜 세월 잊혀져 있다가 1990년대 후반 몽골에 온 연세대 의료봉사단이 그 행적을 추적하면서 비로소 국내에도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 2000년 여름 몽골 정부가 대통령궁 인근 부지 2천여 평을 부지로 내놓아 이태준선생 기념공원이 조성되었고 그해 여름 묘비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몽골 정부에서 현상금을 걸었지만 유해는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태준 선생이 어떤 분인지 찾다보니 다음과 같은 사진과 글을 발견한다.

 

 

1911년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 6명과 교수진 사진. 이 중 한 명이 이태준 선생이라는데 누군지 밝혀지지 않은 상태란다.

 

이태준 선생은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07년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 1911년 졸업하였다. 재학 중인 1910년 고문 후유증으로 세브란스에 입원한 안창호 선생을 치료하다 민족애에 감화받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2년 사촌 처남인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의 권유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에서 기독회의원으로 인술을 펼치다가 울란바토르에서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金선생은 몽골에 비밀 장교양성소를 설립하고 항일 혁명단체를 조직할 계획이었다. 울반바트로에 동의의국(東義醫局)이란 병원을 열고 당시 몽골제국의 국왕이었던 잡잔담바 브그드 칸의 주치의가 되어 몽골 위생계몽활동 등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신의(神醫)로 추앙되었으며 또한 1919년에는 몽골의 최고 훈장인 '에르테닌오치르'를 받았다.

그러나 의열단에 참가, 독립운동 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고 헝가리 출신 폭탄제조 기술자 마자르를 섭외, 항일운동에 쓰일 무기를 만들게 하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펼치던 중 1921년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 장군인 운게른 스테른베르그 군대에 붙잡혀 38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평화의 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섰을 때 가이드가 안내를 한다.

 

바이쯔 군 : “오른쪽에 보이는 시설이 놀이공원입니다.”

나 : “놀이 시설이 안 보이는데…?”

바이쯔 군 : “예, 놀이 시설이 거의 없어요!”

일동 : (폭소)

 

 

우리가 머문 호텔 맞은 편에 몽골 올림픽 위원회 건물이 서 있고, 주변 경기장에는 양궁 연습하는 선수들 모습 보인다. 나담 축제도 이곳에서 열린단다.

 

오른쪽 햐얀 건물이 몽골올림픽위원회

 

 

시내로 접어들자마자 수흐바타르 광장이 나타난다. 광장 앞 도로엔 전차가 달리고 있다.

 

 

수흐바타르광장은 울란바타르의 중심부에 위치한 광장으로서 사방에 정부종합 청사, 국회, 문화센터, 드라마극장, 박물관, 울란바타르 호텔, 몽골국립대학 등 주요 시설이 몰려 있는 곳이다.

 

 

 

수흐바타르는 몽골인들에게는 민족의 독립 영웅이다. 몽골을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독립시킨 혁명가로 몽골인들이 칭기즈칸 다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이다. 

 

전면에는 몽골을 상징하는 소욤보 문장이 새겨져 있다.

 

그는 체첸 칸 아이막(행정구역명) 유목민 집안에서 태어나 16세 때 후레-캬흐타 간의 역전(驛傳)마차의 마부가 되었다. 1911, 몽골 독립 후 건군된 자치몽골군의 소집을 받고 입대, 하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관총소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웠다. 1918년 정부 인쇄소의 식자공이 되었는데, 그 동안 중국과 무능한 몽골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러시아혁명에 자극을 받은 그는 1920년 6월 허를러깅 처이발상 등과 몽골인민당(인민혁명당)을 결성,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들어갔다. 전후 두 차례에 걸친 래닌과의 회담을 통하여, 몽골혁명의 성공과 그 후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술 지도를 받고, 1921년 인민의용군을 결성, 그 총사령관이 되어 적군(赤軍)과 함께 마이마친에서 군사를 일으켜, 7월 10일 니슬렐 후레(울란바타르)에 인민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국방장관이 되었다. 30세 때 결핵으로 죽었다. 그의 부인은 양지마 (1893-1963) . -위키백과

 

 

 

사회주의 국가에도 노숙자처럼 구걸하는 사람이 있다. 이 선생님은 간식으로 준비해온 것을 이들에게 건네준다. 거리에는 우표와 그림 파는 사람들이 보인다.

 

 

몽골역사박물관을 관람한다. 유목민 문화이어선지 그리 볼 만한 유적이 별로 없어 퍼뜩 한바퀴 돌아보고 나온다. 

 

 

 

 

우택 형은 샛노란 양피 지갑 하나를 사 가지고 나온다. 먼저 나온 수현, 우택 형은 박물관 앞 작은 매점에 앉아서 시원한 생맥주를 즐긴다. 가게 주인에게 우리 담배 ‘시즌’ 한 개비 권하며...

 

 

 

점심은 근처 그리스식 식당이라는 그릴하우스 ‘스리코’에서 그리스식 덮밥을 먹다.

 

슬라이스빵과 버터, 야채샐러드가 먼저 나오고, 이어 양고기 미트볼 국에 덮밥이, 그리고 또 큼직한 빵까지 나온다. 너무 기름지고 느끼한데 양도 엄청나다. 그런데도 우리 예쁜 낭자는 아주 맛있게 깨끗이 잘 먹는다. 

 

오 선생은 과음 탓인지 음식을 입에도 대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다가 자야겠다며 버스로 돌아가 버린다. 엊저녁 술자리가 끝나고 나서, 룸메이트 우택 형이 또 보드카를 사오는 바람에 장렬하게 전사한 모양이다.

 

 

거리엔 종종 몽골식 복장이 보이는데, 다 노인들이다. 몇몇 젊은이들은 아주 세련된 복장을 보인다.

 

 

점심을 먹은 후 이르쿠츠크로 가기 위해 배낭을 꾸리고 공항으로 향한다. 멀리 나무 하나 없는 초원의 산줄기를 배경으로 너무도 작고 아담한 공항이 그림처럼 내려다보인다.

 

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2시.

 

 

 

대기하는 시간, 몸이 찌뿌듯하여 청사 밖으로 나와 도로를 따라 한바퀴 돌아 뛴다. 좀 있으니 이 선생이 뛰고, 또 오 선생이 뒤따르더니 한결이까지 동참해 졸지에 청사 주변에 우리 일행의 조깅 진풍경이 벌어진다. 

 

좀 있으니 한 떼의 소들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더니 공항 앞 주차장가 언덕배기의 풀을 뜯기 시작한다. 국제공항에서도 몽골스러운 풍경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