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공주 공산성, 금강을 바라보며 느끼는 웅진 백제의 숨결

모산재 2014. 5. 11. 13:48

 

공주를 찾은 것은 처음이다.

 

지금은 너무도 한적하고 조용한 작은 도시, 1500년 전 한 나라의 도읍지를 찾은 날 아침 금강 건너 공산성은 흐릿한 내에 잠겨 있어 찾는 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만든다.

 


금강교에서 바라보는 공산성은 성이라기보다는 정원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담하다. 자연 지형이 요새라고는 하지만 작은 정자가 높아 보일 정도로 성벽은 담장처럼 낮다.

 

금강은 이름처럼 비단폭을 펼쳐 놓은 것처럼 잔잔하게 흐르는데, 그리 험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은 저 작은 성과 강에 의지해 도읍지를 정하고 고구려와 치열하게 대적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이 그리 실감나지 않는다.   

 

 


 

공산성은 산이 강가에 서리고 얽힌 그 모양이 공(公)자를 닮아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백제 때 웅진성으로 불렸던 것이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475년 개로왕은 고구려 장수왕 3만군이 침공하자 나제동맹으로 신라군 12만 명의 도움을 받지만 당하지 못하고 한산성이 함락 당한다. 개로왕은 잡혀서 참수되고 그 아들 문주왕이 웅진(공주)으로 천도하면서 공산성은 538년 성왕이 사비(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64년간 백제의 심장 노릇을 한다.

 

해발 110m인 공산(公山)의 정상에서 서쪽의 봉우리까지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폭이 좁은 성의 둘레는 2450m이다. 원래 토성이었는데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개축된 것이다.

 

 


금강교를 건너자마자 나타나는 주차장. 공산성의 정문 역할을 하는 서문 앞이다.

 

 

 


공산성 서문의 이름은 금서루(錦西樓), 아마도 금강의 서쪽에 있는 누각이라 하여 붙은 이름인 듯하다. 1993년에 복원한 것으로 현재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었다 한다. 

 

공산성의 4개 문루는 남문인 진남루(鎭南樓)와 북문인 공북루(拱北樓)만이 조선시대 성문이고 동문과 서문은 모두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정면을 담으려니 역광이 되었다...

 

 

 


금서문 들어가는 입구에 열을 지어 선 수많은 송덕비들...

 

 


모두 47기에 이른다는데... 원래 공주감영에 있던 것으로 1932년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한다.

 

이 중에는 선정을 기려 백성들이 세운 것도 있지만 임기말에 관리들의 압력에 의해 세워진 것들이 적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가진 것들의 행태는 비슷한 듯...

 

 


금서문은 출입 구조가 참 독특하다.

 

왼쪽으로는 성벽 아래로 입구자 모양의 넓은 통로, 금서루에는 문루 출입구를 둔 이중 출입구를 만들었다.

 

 


서문 자리에는 도로가 나면서 훼손이 심하였는데, 기록을 바탕으로 문루를 본래 문터의 남쪽에 새로운 형태로 복원한 것이다. 본래의 문터는 도로의 기능을 살린 성내의 출입시설로 사용되고 있으며, 복원된 문루는 옛 문루의 모습을 유지한 것...

 

 


그런데 출입구의 구조가 참 아슬아슬하다. 돌을 저렇게 쌓아서 하중을 제대로 견딜 수가 있을까. 안전을 위하여 철망까지 씌워 놓았지만, 옛 성의 모습도 아니고 현대적인 미감이 있는 것도 아닌 이런 희한한 석축 구조물을 참 이해하기 힘들다. 

 

 

 

성문 출입구 천정 그림 

 

 

 

금서루에서 바라본 공주 시내 풍경. 바로 앞으로 난 길은 무녕왕릉으로 가는 길이다.

 

 

 

 

금서루의 북쪽 성곽

 

 

 


금서루에서 성곽을 따라 북쪽 방향(금강쪽)으로 돌아보기로 한다.

 

 

 

뒤돌아본 금서루

 

 

 


금강을 바라보는 가장 높은 봉우리에는 공산정이란 정자를 두었다.

 

 

 

 

금강교

 

 

 


북문 쪽의 넓은 빈터.

 

옹기종기 허름한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던 곳이라는데, 지금은 모두 철거되고 빈터로 남아있다.

 

 

 

공북루 부근의 느티나무

 

 


느티나무란 이름이 '눋(누른)+회나무"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과연 그런지는...

 

 

 

넓은 빈터와 금강 사이를 지키고 있는 공북루(拱北樓)

 

 


1603년에 옛 망북루 터에 세운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 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고, 그 옆에 월파당을 지었다고 한다. 현종 4년(1663) 관찰사 오정위가 낡은 것을 다시 지었으며  월파당은 효종 5년(1654)에 붕괴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공북루 주변 성곽을 따라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어 옛 성곽의 운치를 느끼게 한다. 다소 휑한 공산성, 역사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을 그나마 위로해 주는 자연유산인 듯...

 

 

 


 

땅속으로 낸 터널 구조물이 눈길을 끄는데, 이름도 생소한 '잠종 냉장고'란다.

 

 


흔히 '누에씨'라고 하는 누에의 알을 저온 보관하는 저장 시설이다. 요즘은 누에를 기르는 집이 거의 사라졌지만, 30~40년 전만 해도 누에를 기르지 않는 농가가 드물던 시절이니까, 이 누에씨 냉장고는 정말 중요한 시설이었을 것이다.

 

 

 


다시 성곽길은 더 낮은 곳으로 내려서며 작은 빈터가 나타난다. 

 

 

 

성 바깥 금강 옆으로 보이는 정자와 연지

 

 

 


공산성 가장 깊숙한 곳, 안쪽 너른 마당에는 전각 몇 채가 보이는데 바로 영은사(靈隱寺)라는 절이다.

 

 


영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킨 곳으로 알려져 있단다. 임진왜란 때 산신령의 도움으로 왜적을 번번이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신령이 숨어 있는 절이라는 뜻으로 영은사(靈隱寺)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마곡사의 말사인 영은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모여 훈련을 받고 승병장 영규의 지휘 아래 금산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광해군 때는 이 절에 승병장을 두고 도내 사찰을 관리하게 하였다고 한다.

 

특히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인조가 이 절로 피난을 오기도 하였다. 뒤편에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이 있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의 합숙소로 쓰이던 관일루가 있다.

 


이 영은사 부근에서는 통일 신라시대 불상 6구가 출토되어 당시에도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 바깥 금강 가에 있는 정자 이름은 만하루(挽河樓).

 

 


1754년 충청감사 김시찬이 공산성 동쪽 연못가에 6칸으로 건립하였다. 만하루라는 명칭은 두보의 시 '세병마(洗兵馬)'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8각으로 다듬어진 초춧돌과 주위의 기단석 디딤돌 등은 원형대로 이용하고, 건물은 당시의 모습대로 1984년에 복원하였다. 

 

 

 

만하루는 풍류를 즐기는 보통의 누정과는 달리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기능이 중심이 된 점이 특징이다.

 

 

정자 뒤편의 연지

 

 


공산성에는 우물이 3개 있었다고 전해지나 이곳과 쌍수정(雙樹亭)남쪽 추정 궁궐터의 것 2개만 확인되고 있다.

 

발굴 전까지는 흙으로 덮여 있던 것을 정비한 것이다. 연못의 가장자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돌로 층단을 쌓았으며 수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북쪽과 남쪽에 계단 시설을 하였다. 연못의 축석 상태를 보면, 모두 단을 두어 쌓았으며, 전체적인 모습은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이다.

 

 

 

 

보통의 긴병꽃풀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병꽃풀. 아마도 이게 그냥 병꽃풀이 아닐까 싶다.

 

 

 


동문 쪽으로 가파른 성곽길이 이어지는데, 성곽을 도는 일을 그만 두고 돌아서서 바로 남문 쪽으로 질러 가기로 한다.

 


그 길에서 만난 아름다운 인동과의 나무 열매.

열매가 붙어 있는 걸로 보아 올괴불나무는 아닌 듯하고 길마가지나무 열매로 보인다.

 

 

 

 


공산성의 남문 진남루(鎭南樓)에 도착한다. 

 

 


 

남문을 통하여 조붓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공주 시내로 접어들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으로 양쪽에 높은 석축 기단을 만들고 건물을 세워 2층 누각의 효과를 내고 있다. 조선시대의 문루로 지금의 건물은 1971년 전부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금서루 방향의 성곽길. 성곽 바깥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왕궁터로 추정되는 넓은 터로 들어선다.

 

 

 


공산성 내 정상부, 쌍수정 광장으로 불려 왔던 약 2천평(6,800㎡) 쯤 되는 너른 터가 추정 왕궁터이다.

 

<삼국사기>에 임류각이 궁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왕궁이 들어설 곳이 이 곳 밖에 없다는 논거로 발굴조사를 하엿는데, 건물터를 비롯하여 연못과 목곽고 및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어 왕궁터의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공산성에 대해 학습하고 있는 초등학생들. 

 

 

 


선생님의 설명이 귀에 쏙쏙 잘 들어와서 멀리에서 한참을 들었다. 좋은 선생님이다. 그리고 저렇게 열심히 들어주는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가...

 

 


왕궁터 마당의 남쪽에는 물 저장고 같은 깊은 연못이 있다.

 

 


원형으로 깊게 판 연못은 자연석을 쌓아 만들었다. 깊이 3m, 지표면 지름 7.30, 바닥 지름 4.8m란다. 


발굴 때 백제의 수막새 등 기와조각과 삼족 토기, 벼루편 등 백제계 유물만 출토되는 층이 있었고 , 그 위에서 신라계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왕궁터의 북쪽 가장 높은 곳에는 쌍수정(雙樹亭)이란 정자가 자리잡고 있다.

 

 

 


쌍수정에 올라 보면 북쪽으로 서울이 환히 보일 듯 전망이 훤하다.

 

 


1623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던 인조는 두 그루의 나무 밑에서 반란의 진압 소식을 듣고 그 두 그루의 나무에 정삼품 통훈대부를 명하고 성을 쌍수성이라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나무는 사라졌지만 영조 10년(1734)에 관찰사로 부임한 이수황이 그 자리에 쌍수정을 건립했다.  

 

1970년에 건물은 전면 해체되고 조선 후기의 형태로 복원하였다. 

 

 

금서루 방향으로 가는 성곽길

 

 

 

금서루 주변에는 백제인들의 의상체험을 하는 공간이 있다.

 

 

 

 

 


다시 금서루로 나오며 공산성 여행은 끝났다.

 


여행일 : 2013. 05. 12


 

산성 지도(출처 :다음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