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국보 제51호, 강릉 객사문 / 강릉객사 임영관

모산재 2014. 4. 4. 17:24

 

강릉대도호부로 지방 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강릉시 용강동. 임영(臨瀛)은 강릉의 옛 이름이다.

 

지금은 객사문 사거리에 강릉우체국만 남아있고 강릉객사 '임영관(臨瀛館)'이 복원되면서 객사문 안에 있던 경찰서도 이전되었다.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객사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그 정문은 국보 제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식 명칭은 '강릉임영관 삼문'이다.

 

 

 

 

 

 

 

객사문은 맞배지붕의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 배흘림기둥의 중후한 아름다움과 함께 구조의 정교함이 눈길을 끈다. 고려 말에 지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으로 강원도내 건축물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기둥의 배흘림이 심하고 장식화 경향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막돌주춧돌 위에 배흘림이 뚜렷한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측면 중앙 옆에서 문짝을 달게 된 기둥들은 네모기둥들이다.

 

 

 

 

 

 

 

 

 

 

 

 

강릉 객사 임영관은 2006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객사 건물 앞에 '중대청'이란 이름의 맞배지붕집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다른 객사에서 볼 수 없는 건물이다.

 

 

 

 

 

안내판에는 '고려 건축 양식'으로 설명되고 있고, 건물의 용도에 대해서는 "관찰사의 순력 등을 위한 장소로 추정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고 써 놓았다.

 

 

중대청 뒤로 보이는 건물은 3칸의 정당에 동서로 날개채를 가진 전형적인 객사의 모습이다.

 

 

 

 

 

 

 

 

임영관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객사 건물인데, 고려 태조 19년(936)에 세워져 83칸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규모는 전대청 9칸, 중대청 12칸), 동대청 13칸, 낭청방 6칸, 서헌 6칸, 월랑(月廊) 31칸, 삼문 6칸이다.

 

 

공민왕이 썼다는 '임영관(臨瀛館)' 편액. 객사문에 걸려 있던 것을 복원한 객사 정당에 다시 걸어 놓은 듯하다.

 

 

 

 

 

이 현판은 1366년(공민왕 15) 공민왕이 낙산사(洛山寺) 관음에 후사를 빌기 위하여 신돈과 그의 종 반야를 데리고 왔다가 비에 막혀 강릉에서 10일간 머무를 때 썼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계속 객사로 사용한 임영관은 1584년 이후에만 10여 차례의 중수와 증축을 거듭하였으며, 일제시대에 강릉공립보통학교(강릉국민학교) 시설로 이용되었고 1927년 일제에 의해 헐린 뒤에는 빈터로 남게 되었다. 그 빈터에 1967년 강릉경찰서 청사가 들어섰다.

 

 

남산의 오성정, 금산의 월화정, 경포의 방해정 등은 객사의 일부였던 것을 옮긴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