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강릉, 허균 허난설헌 고가(강릉 이광노 가옥)

모산재 2014. 4. 3. 17:11

 

경포대를 돌아보고 난 다음 경포호를 돌아 '허균, 허난설헌 생가'로 알려진 유적지로 향한다.

 

 

 

 

 

경포호 주변은 호수와 습지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고 여러 시인들의 시와 조각 작품들이 어울려 시민들의 좋은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강릉시 초당동 '허균, 허난설헌 생가' 유적지로 들어서는 입구.

 

경포호수길이 끝나고 하천을 건너면 아주 평지와 다름없는 얕은 언덕에는 울창한 적송숲이 자리잡고 있다.

 

 

 

 

 

하늘을 찌르는 듯한 아름드리 적송 숲속으로 난 호젓한 길, 머릿속을 환하게 정화해주는 듯한 맑은 솔향기를 맡으며 잠시 걸어가면 금방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강릉의 문화생태 탐방로 '강릉바우길' 11구간은 경포호를 끼고 허균 허난설헌 유적지에서 끝난다.

 

 

 

 

 

울울한 적송 숲 한가운데에 허균 허난설헌 공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허난설헌 생가와 함께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과 기념비 등이 조성되어 있다.

 

 

 

 

 

 

드디어 숲 사이로 황토흙을 바른 담장에 둘러싸인 한옥집, 허난설헌 생가가 눈앞에 나타난다.

 

아직은 겨울인데도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안겨 있는 전통 한옥엔 밝은 햇살이 가득 내리고 따뜻한 기운이 넘쳐난다. 넓고 평평한 터 속에 아기자기하게 자리잡은 모습에서 한옥의 넉넉한 멋이 절로 느껴진다.

 

 

 

오른쪽 끝, 초가는 디딜방앗간

 

 

강릉시 초당동, '허균·허난설헌 생가'로 널리 알려지고 있는 이 건물의 정식 명칭은 '강릉 이광노 가옥'으로 강릉시 문화재자료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선조 때 동인의 영수 허엽이 살았고, 그의 딸 허난설헌이 태어난 집이고 허균이 자라난 곳이다. 흔히 이곳이 허균의 생가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허균이 태어난 곳은 따로 있다. 이 집은 19세기 무렵 다시 지은 것이라 하며, 가옥명은 현재 집주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행랑채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3칸의 광이 있고, 왼쪽으로는 행랑방과 마구간이 있다.

 

 

 

 

 

솟을대문은 사랑채를 출입하는 남자들이 주로 사용하며, 방앗간 부근에 협문이 있어서 안채로 출입하는 여자들이 사용하였다

 

 

 

 

 

행랑채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에 ㅁ자형의 본채가 자리잡고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하고 그 사이에는 광을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기와로 된 팔작지붕으로 이어져 있고, 전면에 툇마루, 오른쪽에 대청 2칸이 있다.

 

 

 

 

 

사랑채의 왼쪽 끝 상노인방은 안채 출입문간으로도 드나들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잘 다듬어진 정원이 앞에 있고, 그 앞으로 공간을 구분하는 담과 협문이 있다.

 

 

사랑채 내부 공간

 

 

 

 

방 안에 모셔진 허난설헌의 초상

 

 

 

 

 

 

기둥은 네모기둥이 아닌 두리기둥인 점이 눈에 띈다.

 

 

 

 

 

 

오른쪽 너른 마당 쪽으로는 툇마루가 달려 있어 편안한 공간을 만들고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넓은 부엌과 방,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안방의 문은 두짝세살문과 용(用)자 창호로 된 이중문으로 되어 있고, 마루에는 네짝분합문으로 되어 있다. 마루방은 장마루로 되어 있다.

 

 

후원은 넓고 편안하다.

 

 

 

 

 

 

담장 밖에 있는 방앗간의 디딜방아

 

 

 

 

 

 

솟을대문 왼쪽 방앗간 옆과 사랑채 뒤편 우물로 가는 곳에 좁은 문을 두어 여성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허균의 생가는 흔히 알려진 경포호 부근 초당동 송림 속이 아니다. 그곳은 그의 누이인 허난설헌의 출생지다.

 

 

 

기념공원에서 바라본 가옥 풍경

 

 

 

허균의 생가는 강릉과 주문진 사이에 있는 사천진이란 곳에 있다. 오대산 줄기가 바다를 향해 이무기처럼 기어가는 듯한 야산에 생가터가 있다고 한다. 허균의 외조부인 예조판서 강릉김씨 김광철이 살았던 '애일당(愛日堂)'이란 곳이 허균의 생가라고 한다. 지금은 허균의 생가이자 외가인 애일당의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고, 언덕 위에 허균을 기념한 시비가 하나만 서 있다고 한다.

당시 동인의 우두머리였던 초당 허엽이 김광철의 딸을 두번째 부인으로 맞으면서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가 태어난다. 애일당 터는 오대산 정기를 이어받은 명당 중의 명당. 허균의 외할아버지 김광철은 아들 없이 딸만 두었는데 본인이 아들을 얻기 전에는 사위와 딸이 애일당에서 자고 가는 것을 금했는데, 허엽은 장인의 눈을 피해 애일당에서 동침하여 허균의 형인 허봉, 누이 허난설헌, 그리고 허균까지 낳았다고 한다.

 

애일당의 뒷산은 이무기가 누워 있는 모습으로서 그 지맥이 사천 앞바다 모래사장에서 그치므로 교산(蛟山)이라 하였는데 허균이 이 산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허균이 바다 낚시를 즐겼던 사천 앞바다에는 교문암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무기가 떠나면서 바위를 두 동강 냈다는 전설이 있다. 모두 뛰어난 학문과 사상을 지녔음에도 뜻을 이루지 못한 허균 자신을 상징하는 듯하다.

 

허균은 1569년 애일당에서 태어난 뒤 강릉의 친가 초당동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고 그 뒤에는 서울의 마른내(지금의 오장동 부근)에서 살았다. 24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로 피난 갔다 돌아오는 길에 애일당을 찾아 2년간 살았으며 그때 퇴락한 애일당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 허균 허난설헌 시비 공원, 기념관

 

1998년 고가 곁에 허균·허난설헌 기념 공원을 조성하였는데, 아버지 허엽과 남매인 허성과 허봉과 함께 허씨 5문장의 시비를 함께 세우고 시민들이 휴식할 수 있는 문화 산책로를 만들었다.

 

 

 

 

 

 

 

허난설헌 동상

 

 

 

 

 

 

 

2007년, 공원에는 두 사람을 기리는 기념관도 세워졌다. 영상자료는 물론 두 사람의 문학작품인 국조시산, 하곡조천기, 난설헌집, 석란유분 등이 전시되고 당대 뛰어난 시재와 문재를 발휘했던 '허씨 5문장'도 소개하고 있다.

 

 

 

 

 

 

 

강릉이 낳은 대표적 인물을 들라고 하면 이율곡과 신사임당, 허균과 허난설헌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율곡과 신사임당은 강릉을 찾는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지만 허균과 허난설헌은 외면받고 있다. 오죽헌에는 관광객이 넘치지만 이곳은 한적하기만 하다.

 

이율곡은 성공한 주류 학자이자 정치인으로, 그를 길러낸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영원한 어머니상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개혁의 열망을 불태우다 끝내 능지처참 당한 허균과 불행한 시집살이 끝에 요절한 허난설헌 남매는 잊혀진 존재나 다름없다. 그만큼 우리 현실이 허균이 살던 시대와 다름없이 개혁적 열정이 사라진 시대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씁쓸하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난 뒤 경포해변으로 향한다.

 

 

 

 

 

 

경포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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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균에 대하여

 

허균(1569~1618)의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허성이 이복형이며, 혀봉과 허난설헌이 동복형제이다. 12세 때 아버지를 잃었고, 학문은 유성룡에게 배웠으며, 시는 삼당시인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뒤 26세 때인 1594년(선조2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고, 1597년에 문과 중시에 장원하였다. 이듬해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는데,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 달 만에 파직되었다. 뒤에 춘추관기주·형조시랑을 지내고,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했으며, 그해에 원접사 이정구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 수안군수로 부임했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1606년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치고,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여기서도 석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쫒겨났다. 그 뒤 공주목사로 다시 기용되어 서류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또다시 파직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을 만났고 천민출신의 시인 유희경과도 교분을 두터이 하였다. 1609년(광해군 1)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 이상의 종사관이 되었다. 그해에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 전시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되었다. 그 뒤 몇 년간은 태인에 은거했는데,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 출신의 서양갑·심우영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에게 아부하여 대북에 참여하였다. 1614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1617년 좌참찬이 되었으며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과 사이가 벌어지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 문 앞에서 살벌한 국문이 열렸다. 이른바 허균의 역모사건과 관련된 국문이었다. 바로 이전 해 12월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이 비밀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허균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기준격의 상소로 인해 시작된 허균과 관련된 논란은 본인 스스로 무고함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해를 넘기게 되었다. 그리고 1618년 광해군 10년 8월 남대문에 한 장의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허균의 심복 현응민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 났으며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 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당시 허균의 죄상으로 거론되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무오년(광해군 10년, 1618년) 무렵에 여진족의 침범이 있자. 중국에서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러자 조선이 여진의 본고장인 건주에서 가까워 혹시 있을지도 모를 여진의 침략으로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는데 허균은 긴급히 알리는 변방의 보고서를 거짓으로 만들고 또 익명서를 만들어, “아무 곳에 역적이 있어 아무 날에는 꼭 일어날 것이다.” 하면서 서울 도성 안 사람을 공갈하였다. 또한 허균은 밤마다 사람을 시켜 남산에 올라가서 부르짖기를, “서쪽의 적은 벌써 압록강을 건넜으며, 유구국 사람은 바다 섬 속에 와서 매복했으니, 성 안의 사람은 나가서 피하여야 죽음을 면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노래를 지어, “성은 들판보다 못하고, 들판은 강을 건너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또 소나무 사이에 등불을 달아놓고 부르짖기를, “살고자 하는 사람은 나가 피하라”고 하니,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아침저녁으로 안심할 수 없어 서울 안의 인가가 열 집 가운데 여덟아홉 집은 텅 비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김윤황을 사주해서 격문을 화살에 매어 경운궁 가운데 던지게 한 것, 남대문에 붙여진 격문이 허균이 했다는 것 등이다.

허균을 둘러싼 이 같은 의혹에 대해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광해군일기>에서는 이것이 당시 대북 정권의 핵심이었던 이이첨과 한찬남이 허균 등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한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허균의 문집에 실린〈관론官論>·〈정론政論〉·〈병론兵論〉·〈유재론遺才論〉등에서 그는 민본사상과 국방정책.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으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으며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는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한정록閑情錄〉이 있어 그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을 했으니, 이는 곧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고 훗날 20세기 초에 이르러 선산 근처에 가묘가 조성되었다.

그가 죽은 뒤 아버지 허엽의 묘소도 부관참시되었다고 한다. 이후 비오는 날이면 허균의 선영에는 울부짖음소리가 나, 어느 선비가 없는 자식으로 생각하라는 내용의 위령제를 지낸 뒤 울음소리가 그쳤다 한다. 허균 사후 그의 후손들은 끊긴 것으로 알려져왔으나, 그의 후손들 중 일부는 파가 다른 타 문중(허목 봉례공파)에 양자로 가거나 타인의 후손인 것처럼 변성명을 하고 후손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허균의 살아남은 아들(허굉)의 직계 자손들이 가첩을 통해 허균의 직계 후손임을 주장하여 오다가, 1995년 양천허씨 허추자산공파 세보에 판도좌랑공 11세손(균)파 교산공파로 숨겨긴 혈통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의 문집은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 왕조 치하에서 모두 인멸(湮滅)될 뻔하였으나 그가 죽음을 예상하고 당시 소년이던 외손자 이필진에게 전해줘서 후대에 전래었다. 홍길동전과 성소부부고 등을 남겼다. 특히 홍길동전은 무명으로 발표하였으나 나중에 유몽인이 그의 작품이라는 기록을 남겨 알려지게 되었다.

당색(黨色)으로는 동인이었으며 북인, 대북으로 활동하였다.  손곡 이달과 서애 류성룡의 문인이다. 동인의 초대 당수 성암 김효원(金孝元)의 사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