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강릉 선교장 (2) 족제비가 점지해준 명문 사대부가 가옥의 품격

모산재 2014. 4. 1. 19:14

 

 

활래정을 지나니 바로 선교장의 너른 마당 너머로 시원스런 풍경이 펼쳐진다.

 

낙락장송 적송숲이 울을 두른 낮은 산줄기를 배경으로, 길게 늘어선 기와집들이 강릉 최고의 명문 사대부 가옥의 위엄과 품격을 드러내고 있다.

 

 

 

 

 

 

1748년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1703∼1781)이 족제비의 점지를 받아 이곳에 터를 잡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어느 날 족제비 몇 마리가 나타나더니 나중엔 한 떼를 이루어 서서히 북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보고 신기하게 여긴 이내번은 그 뒤를 쫓았고 서북쪽으로 약 2.5리(약 1km)가량 떨어진 어느 야산의 울창한 송림 속으로 족제비 무리가 홀연히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신기한 생각에 한동안 망연히 서있던 그는 정신을 가다듬어 주위를 살피고는 이곳이야말로 하늘이 내린 명당이라고 여기고 터를 정하게 되었다.

 

 

 

 

 

 

 

선교장은 남서향으로 자리잡았는데, 낮은 산줄기는 울울이 들어선 낙락장송들이 비보해 주고 있다.

 

 

시루봉에서 벋어 내리는 그리 높지 않은 산줄기가 평온하게 둘러져 장풍(藏風)을 하고 남으로 향해 서면 어깨와도 같은 부드러운 곡선의 좌우로 벋어, 왼쪽으로는 약동 굴신하는 생룡(生龍)의 형상으로 재화가 증식할 만하고, 약진하려는 듯한 호(虎)는 오른쪽으로 내려 자손의 번식을 보이는 산형이라 생각되었다. 더욱이 앞에는 얕은 내가 흐르고, 그 바른편에는 안산(案山)이 있고, 왼편 시내 건너엔 조산(朝山)이 있어 주산에 대한 객산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훌륭한 터였던 것이다.    -이기서, <강릉 선교장>, 열화당

 

 

 

맨 오른쪽에 자리잡은 외별당채는 지은 지 얼마되지 않은 새 건물이다.

 

 

 

솟을대문 오른쪽 건물은 안채를 두르고 있는 문간채인데, 가운데에 안채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평대문이 있다. 솟을대문은 남자와 손님이 출입하는 공식 대문이지만 오른쪽 평대문은 여자와 아이들이 출입하는 대문이다.

 

 

오른쪽 끝이 외별당채 입구.

 

 

 

 

 

바깥에서 잠시 들여다본 외별당 내부.

 

출입문이 잠겨 있다. 뜰에 장독이 가득한데 현재 살림집으로 사람이 살고 있다.

 

 

 

 

 

솟을대문에는 '선교유거(仙嶠幽居)'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배다리마을'을 뜻하는 '선교'라는 말을 '신선이 사는 산'을 뜻하는 선교(仙嶠)로 바꾸어 놓았다. 신선이 머무는 그윽한 산속 거처'라는 뜻.

 

현판은 산수화와 난죽도에 능하였던 서화가 이희수(1836~1909)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동별당과 안채, 왼편으로는 서별당과 중사랑채와 열화당(悅話堂)이 자리잡고 있다.

 

 

안채가 있는 솟을대문 오른쪽을 문간채라 하고, 반대쪽 행랑을 행랑채로 구분한다. 문간채 영역은 가족들의 공간이고 행랑채 영역은 남자들과 손님과 하인들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아래는 솟을대문 바로 안쪽에서 바라본 행랑채 영역으로 정면에 중사랑채, 그 오른쪽에 열화당, 행랑채와 마주보는 오른쪽에 서별당이 자리잡고 있다.

 

 

 

 

 

 

※ 선교장 건물 배치도

 

 

 

 

 

 

 

동별당과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솟을대문에서 동쪽의 이 일각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 일각문 안 쪽에서 문간채에 있는 평대문을 통해서 바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일각문을 지나야 한다. 왼쪽에 보이는 동별당 현판.

 

 

 

 

 

일각문을 들어서면 '오은고택(鰲隱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린 동별당과 그 안쪽으로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동별당은 1920년에 경농 이근우가 세웠는데, 안채와 연결된 별당으로서 주로 건물 주인이 거처하며 생활하던 곳이다. 가족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안채와 공간을 트고 이어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안채에 비해 기단 석축이 껑충하니 높고 전망이 탁 트인 듯 시원스럽다.

 

 

 

 

 

 

현판 글씨를 쓴 이는 '여초거사(如初居士)'이니 이 분은 바로 서예가 김응현(金膺顯,1927~2007)이다.

 

 

 

 

 

안채는 동쪽으로 동별당, 서쪽으로 서별당과 이어져 있는 비교적 소박한 건물이다.

 

 

 

 

 

선교장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안채 주옥(主屋)은 약 1748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전한다.

 

안채는 전주이씨가의 큰살림을 맡은 주인의 부인이 사용하던 곳으로 맏며느리가 머물던 건넌방과 함께 마련되었다.

 

선교장은 많은 손님들을 접대하고 대가족을 꾸리기 위해서는 음식을 차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는데 이는 안채 동쪽에 이어진 큰 부엌과 건넌방의 작은 부엌에서 이루어졌다.

 

 

 

 

 

안채 오른쪽 칸의 부엌

 

 

 

 

 

 

동별당 앞 일각문에서 서쪽 행랑채 방향으로 난 통로.

 

일각문과 일각문 사이의 이 공간은 솟을대문과 연결된 공간으로, 동쪽 일각문을 통해서 안채로 서쪽 일각문을 통해서 서별당으로 갈 수 있는 현관 역할을 한다.

 

 

 

 

 

솟을대문 맞은편에서 협문을 통해 서별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서별당은 안채와 열화당 사이, 선교장에서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의 앞쪽에 있는 안채와 기단이 같은 높이로 이어져 있다.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던 것을 1996년에 복원한 것이다. 전주이씨가의 서재와 서고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서고는 누마루형식으로 되어 문을 열면 통풍이 잘되고, 마루는 여름철 방은 겨울철의 독서실로 이용되었다.

 

 

왼쪽으로 굴뚝이 보이는 건물이 연지당으로, 집안 일을 도와주던 여인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중사랑채는 행랑채의 서쪽 끝에 같은 마당을 쓰는 열화당과는 직각 방향으로 북서쪽에 세워져 있다.

 

 

 

 

 

주로 손님맞이를 위한 곳으로 전국의 학자와 풍류객들이 교분을 나누었던 곳이다. '해동풍월(奚東風月)'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무슨 뜻일까? 관동대 한문학 교수 한상갑이 썼다고 한다. 

 

 

 

 

 

 

 

열화당은 큰사랑채로 선교장 주인의 거처이다. '안빈낙도'를 신조로 삼았다는 오은 이후가 1815년에 세운 선교장의 가장 대표적인 건물이다.

 

 

 

 

 

열화당은 돌계단 7, 8개를 딛고 올라설 정도로 높직하며 보기에도 여간 시원하지 않다. 내부는 대부분 마루로 되어 있고, 외벽을 모두 들어열개 문짝으로 만들어 여름철에 전부 떼어 걸어놓으면 사방이 통풍이 되어 자연의 흥취를 만끽할 수 있다.

 

처마가 높아서 전면에 별도의 차양을 달았는데, 제국주의 침략시기 러시아공사관 직원들이 각종 조사차 이곳에 잠시 머무르며 신세진 데 대한 선물로 지어 준 것이라 한다.

 

 

 

 

 

'열화당'이라는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野去來離)'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世與我而相遺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으니
復駕言兮焉求    다시 어찌 벼슬을 구할 것인가.
悅親戚之情話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 즐겨 나누고
樂琴書以消憂    거문고와 서책 즐기며 우수를 떨쳐버리리라.

 

 

열화당의 주인들은 관동팔경 유람을 오는 풍류가들을 맞아들여 즐겨 정담을 나누었고, 그것에 삶의 의미를 두고 있었다.

 

 

 

 

 

뒤쪽 언덕에서 내려다본 열화당

 

 

 

 

 

 

선교장은 사랑채가 셋이나 된다. 강릉은 사대부들이 꿈꾸었던 관동팔경과 금강산 유람의 길목이었고 선교장 주인들은 이들에게 기꺼이 머물 자리를 내주었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로부터 일제 강점기 몽양 여운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당대의 명사들이 찾았다. 선교장 주인들은 3채나 되는 사랑채(별당)를 지어 놓고 이들을 환대하고 교분을 나누면서 전국적 문화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영향력을 키웠던 것 같다.

 

 

 

 

※ 선교장의 두 얼굴

 

 

<선교장의 현판 작품들>

선교장은 양반들의 관동팔경과 금강산 유람의 길목에 있었다. 주인의 환대에다 좋은 문화적 분위기에서 많은 명사들이 선교장을 찾았다. 당시 선교장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명부를 기록한 방명록인 활래간첩이 24권이나 되고, 선교장엔 손님용 밥상 소반만 300개가 넘었다고 한다. 머물다 떠나는 이들에겐 일일이 옷을 한 벌씩 만들어줬는데 옷 만드는 침모용 건물이 따로 있었다 한다.

환대받았던 명사들은 떠날 때 글이나 그림을 남겨 보답했고, 선교장 곳곳에 있는 명필의 글씨와 그림은 모두 이런 손님들의 작품들이다.

 

 

<선교장과 갑오농민군>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선교장 주인은 승지 벼슬을 지내던 이희원. 그는 강릉 관아를 점령한 강원도 농민군들이 선교장으로 쳐들어올 계획을 알고 돈과 쌀을 보내 농민군을 안심시킨 뒤, 민보군을 조직하여 강릉 관아로 쳐들어갔다.

방심하던 농민군들은 많은 사상자를 내며 대관령으로 물러났고, 이희원은 그후 강릉 부사로 임명되었으며 강원도 농민군들을 토벌하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제국주의가 밀려오던 당시 시대 상황과 갑오 농민군들에 대한 이해는 그다지 없었던 모양. 선교장 주인들은 안빈낙도를 내세우고 유유자적을 즐기며 우아한 삶을 추구했던 양반들의 위선적인 계급 의식에서 그다지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