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강릉 선교장 (1) 월하문 지나서 활래정으로

모산재 2014. 4. 1. 18:56

 

이보다 더 좋은 날씨는 없을 듯 맑은 공기에 따사로운 햇살 내리는 2월 하순, 강릉 배다리마을 선교장을 찾는다.

 

정확하게 기억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번 방문이 다섯 번째쯤 되지 않을까 싶다.

 

 

 

 

 

 

경포호가 이곳 선교장에까지 이어져 있어서 배를 타고 건너 다녔는데, 그래서 이 마을은 배다리마을(船橋里)로 불렸고 이 집의 이름도 선교장이라 불린 것이다. 선교장은 강원도에서 가장 넓고 큰 민가 주택으로 만석군으로 불렸던 전주 이씨의 호화 주택이다.

 

 

선교장에 터를 잡은 이는 효령대군의 11세손인 이내번. 경포대 주변 저동에서 살고 있던 그가 족제비떼를 쫓다가 이곳 시루봉 산줄기에  근하게 안긴 천하의 명당을 발견하고 짓게 되었다 한다. 그 뒤로 가세가 크게 번창하였고 지금도 그 후손이 살고 있다.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연지와 활래정(活來亭)이란 정자!

 

네모난 연못에는 연꽃으로 가득하고 작은 섬에는 솔이 심어져 있어 운치를 더한다. 예전엔 저 섬을 노송이 있는 봉래선산으로 삼고 활래정을 잇는 나무다리가 있어 건너다닐 수 있도록 했다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활래정 기문(記文)에 따르면 '활래정'이란 이름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半畝方塘一鑑開     조그만 네모 연못이 거울처럼 열리니
天光雲影共徘徊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 그 안에 떠 있네.
問渠那得淸如許     이 연못이 이리 맑은 까닭은 무엇인가
爲有源頭活水來     샘이 있어 맑은 물이 솟아나오기 때문이지.

 

활래정(活來亭)의 '활래'라는 명칭은 이 시의 마지막 구절 '위유원두활수래(爲有源頭活水來)'에서 집자한 것이다.

 

맑은 물은 근원에서 흘러나온다는 것! 선교장 서쪽 태장봉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활수(活水)는 활래정 연못의 연꽃을 활짝 피우고 있으며, 선교장을 찾는 사람들은 활래정에서 풍류를 즐기며 삶의 활기를 잦는다.

 

 

 

 

 

활래정은 별당이나 사랑채 구실을 톡톡히 한 정자로 그 입구에는 '월하문(月下門)'이라는 문을 세워 운치를 더했다.

 

 

 

 

 

월하문 양쪽 기둥에는 '퇴고(推敲)'라는 고사의 유래가 된 그 유명한 가도의 시 구절이 적혀 있어 눈길을 끈다.

 

 

 

 

 

 

당나라 시인들과 작품을 평한 책 <당시기사(唐詩紀事)>에 나오는 유명한 고사.

 

당나라 때 시인 가도(賈島)가 노새를 타고 길을 가다가 문득 시상이 떠올라 '제이응유거(題李凝幽居)'라는 오언율시를 쓴다. '이응의 그윽한 거처에 부친다'는 뜻의 제목. 

 

閒居隣竝少     한가로이 사니 이웃도 드문데
草徑入荒園     풀숲 오솔길은 거친 정원으로 들어간다.
鳥宿池邊樹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자는데    
僧敲月下門     중이 달 아래에서 문을 두드린다.

 

친구 이응을 만나러 갔다가 만나지 못한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 가도는 4구에서 '두드린다'는 의미의 '고(敲)'자가 좋을지 '민다'는 의미의 '퇴(推)'자가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경조윤(京兆尹, 수도의 장관)이자 최고의 문장가인 한유의 행차를 알아채지 못하고 서 있다가 한유에게 끌려가게 된다. 사정을 알게 된 한유는 '두드린다(敲)'가 더 낫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함께 말을 타고 가며 시에 관해 논했으며 그 뒤로 이들은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

 

 

이 주련의 의미를 "언제든지 문을 두드리십시오. 환영합니다."라는 주인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활래정은 사랑채인 열화당을 건립한 다음 해인 1816년(순조 16)에 오은거사 이후가 건립하였는데, 현재 건물은 1906년에 이후의 증손 이근우가 중건한 것이라 한다.

 

 

 

 

 

 

활래정에는 놀랍게도 '活來亭'이란 편액이 사방에 6개나 걸려 있다.

 

월하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곳, 흰 바탕에 금색 행서로 쓴 '활래정' 편액은 규원 정병조(1863~1945)의 글씨다. 동궁(東宮) 시종관을 지낸 학자로 시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행서와 초서에 능한 서예가였다 한다.

 

 

 

 

 

 

그리고 정면에 녹색 글씨로 쓴 현판은 해강 김규진 선생의 글씨이고, 양쪽 주련은 농천 이병희 선생의 필적이라고 한다.

 

 

 

 

 

활래정 안쪽에서 보면 여러 개의 현판이 보인다.

 

청색에 흰 행서 글씨의‘활래정’ 편액은 규원 정병조의 작품이고, 성당 김돈희와 성재 김태석의 작품에 또 하나의 규원의 글씨가 더 있다. 성당의 글씨 편액이 가장 크다. 성재는 합천 해인사의 ‘자통홍제존자사명대사비’ 등 많은 비명을 남긴 분으로 중국에 갔을 때 위안스카이의 서예 고문으로 그의 옥새를 새겼다 한다. 추사 김정희도 만년에 이곳에 들러 ‘홍엽산거(紅葉山居)’라는 편액을 남겼는데 선교장 민속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편액 사진 출처: 영남일보 2013.12.11

 

 

 

활래정은 연못 속에 네 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겹처마 팔작 기와지붕집인데 여름을 지내는 별당 건축으로 외부는 전부 창호로 되어 있다.

 

 

 

 

 

외부의 벽면이 모두 분합문의 띠살문으로 구성되어 있어 장지문을 지르면 한쪽은 온돌방이 되고 다른 한쪽은 대청이 된다. 방과 마루 사이에는 다실이 있는 점도 특징적이다.

 

벽이 없이 문으로만 둘러져 있어 한층 개방성이 강조되었다. 모두 열어놓으면 정자 속에 앉아서도 자연과 일체가 될 수 있다.

 

 

 

 

 

 

활래정은 손님을 맞이하는 사랑채 역할도 훌륭히 수행했던 곳. 안채에 있는 열화당이 늦가을로부터 초봄까지 따듯이 정담을 나누는 곳이라면, 활래정은 따뜻한 계절 문을 활짝 열고 연꽃과 계절의 정취를 한껏 나눌 수 있었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무더운 여름날 밤 저 방에 앉아 분합문을 다 열어제치고 연꽃 피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시 한 수쯤 흘러나올 수 있을까. 문득 옛 사람들의 풍류가 그리워진다.

 

 

지금은 흔적을 찾기도 어렵게 변해버렸지만 예전엔 활래정 바깥에는 초라한 노비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고 한다. 중요민속문화재로 대가집을 살리면서 노비들의 삶의 터전이 모두 헐려서 사라져 버린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