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강릉 김시습기념관, 김시습 이야기

모산재 2014. 3. 31. 18:03

 

선교장 구경을 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 걷다가 바로 옆 동쪽에 김시습기념관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지나치는 길, 입장료도 없기에 잠깐 돌아보고 가기로 한다.

 

 

 

 

 

 

김시습이 강릉과 무슨 상관이길래 싶어 확인하다보니 매월당이 강릉김씨이고 또 어머니 시묘살이한 곳이 바로 이곳 강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정도 인연으로 기념관까지 세우나 싶은데, 어쨌든 강릉시에서 전통문화 시범도시 및 강원의 얼 선양 사업의 하나로 이곳 경포도립공원 내에 기념관을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길가의 좁은 터를 가득 채워 지은 한옥 건물이지만 그래도 정성이 느껴지는 기념관이다. 

 

 

 

 

 

 

기념관 안에는 25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고, 김시습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금오신화 애니메이션 영상실, 매월당문집 영상자료 3개 시설과 학생들이 체험학습할 수 있는 한국인물찾기, 김시습의 나이 3살 때 지은 시를 그래픽화해 직접 영상체험을 할 수 있는 2개의 시설물이 설치되어있다.

 

 

대표적인 고서로는 김육이 쓴 <기묘록(己卯綠)>과 1796년 목판본으로 인쇄된 <장릉사보(章陵史補)>, 1800년대 쓴 것으로 추정되는 <동학사지(東鶴寺誌)>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외에 매월당전집, 김시습전(필사본), 명원보감, 증보해동시선, 매월당집동활자본 등이 있다.

 

 

 

금오신화 영인본

 

 

 

매월당집

 

 

 

 

 

 

매월당 김시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담장 구석에는 따스한 햇살을 받고 큰개불알풀이 청보랏빛 해맑은 꽃을 피웠다.

 

 

 

  

 

 

 

 

※ 무량사 김시습 묘탑 => http://blog.daum.net/kheenn/15854971

※ 김시습이 입적한 무량사 => http://blog.daum.net/kheenn/15854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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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월당 김시습에 얽힌 일화

 

굳센 지조와 고결한 인품을 지키며 시대와 불화했던 체제 밖의 지식인, 생후 8개월에 글 뜻을 알고 세 살 때 한시를 지었으며 다섯 살 때 <중용><대학>을 통했다는 신동. 김시습에 관한 일화는 흔히 이 두 가지 면모와 관련되어 전하고 있다. 세 살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無雨雷聲何處動(무우뇌성가처동)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黃雲片片四方分(황운편편사방분)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당시의 재상 허조는 이 소문을 확고 직접 김시습의 집을 찾아가 늙은 자신을 위해 '늙을 老'자를 넣어 시 한 구절을 부탁한다. 신동 김시습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다음 구절을 바로 써내려간다.

 

老木開花心不老(노목개화심불로)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소문을 들은 세종 임금에게 불려간 김시습은 시를 지어 보였고 세종은 감탄하며 비단 50필을 하사했는데, 그 비단들을 끝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시습(時習)이란 이름도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논어>‘학이’편(學而篇)에서 따서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사건(계유정난)으로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방랑의 길을 떠난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

 

사육신 주살에 앞장섰던 계유정난의 일등공신 한명회와 관련된 일화도 전한다. 10년이 넘은 오랜 은거 끝에 잠시 서울에 머물렀을 때 서강을 지나다가 어느 벽에 붙은 한명회의 글을 보게 되었다.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다.

 

 

이 시를 본 시습은 붓을 들어 '扶(부)'자를 '亡(망)'자로, '臥(와)'자를 '汚(오)'자로 고쳐 버렸다.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다.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선 매월당은 1893년 59세의 나이로 충남 부여 무량사에사 입적한다. 김시습이 입적하자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지 않고 매장하였는데, 3년 후에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시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다비를 거행하고 사리를 수습하여 부도를 세웠다 한다. 그의 부도는 무량사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