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나주목사 내아, 금학헌(琴鶴軒)

모산재 2014. 1. 27. 23:27

 

나주곰탕집에서 곰탕 한 그릇 후딱 먹은 뒤 바로 부근에 있는 나주목 수령의 살림집 내아(內衙)를 돌아본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

 

 

 

나주목사가 집무를 보던 동헌은 사라지고 없고, 관아의 정문인 정수루(正綏樓)와 관사인 내아가 남아 있다. 2층 누각 정수루 오른쪽 뒤편 고목이 서 있는 곳에 바로 나주목사 내아가 자리잡고 있다.

 

정문 이름 '정수(正綏)'는 갓끈을 단정히 한다는 의미로 관아에 들어서는 바른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표현한 것이다. 정수루 누대 위에는 커다란 북이 걸려 있는데,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선생이 47세이던 1584년 나주목사로 부임할 때 설치하여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하소연하는 신문고로 사용됐다고 전해진다.

 

 

 

 

 

 

 

내아는 정수루에서 서쪽으로 약 70m 되는 곳에 있다.

 

 

 

 

 

 

문간채 중앙으로 들어서면 '금학헌(琴鶴軒)'이라는 내아 현판이 걸려 있다.

 

 

 

 

 

'금학(琴鶴)'은 '거문고와 학'이라는 뜻으로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자 하는 군자의 마음가짐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또한 중국 송나라 때 조변(趙抃)이란 관리가 부임할 때 거문고와 학만 싣고 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관리의 청렴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금학(琴鶴)'은 청백리를 가리키는 한자성어 '삼마태수(三馬太守)'를 떠올리게 한다. 조선 시대에는 지방 관아에 부임할 때 부사(府使)의 경우 말 3필과 수행원을 위해 4필, 모두 7필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중종 때의 청백리로 유명한 송흠은 장흥부사와 이곳 나주목사로 부임하며 말 3필로 단촐하게 이용하고 떠날 때도 말 3필 그대로 물러났다. 이로부터 송흠은 '삼마태수'라 불리고 삼마태수라는 말은 청백리를 뜻하는 성어가 되었다.

 

 

 

 

 

건물은 ‘ㄷ’자형 평면으로 된 팔작지붕이다.

 

 

 

내아는 현재 본채와 문간채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은 전퇴를 둔 5칸으로 왼쪽에서부터 대청 3칸과 그밖의 여러 곳을 크게 고쳐서 원래의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손님 접대를 위해 부엌 공간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기단은 현재 모르타르로 마감되어 있고 주춧돌은 막돌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정면에만 원형을 쓰고 나머지는 사각기둥을 사용하였다.

 

 

 

1872년(고종 9)에 그려진 나주의 고지도에는 다른 관아 건물은 모두 그려져 있으나 내아가 그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내아가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문간채가 1892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그 무렵에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이후 군수 관사로 사용하면서 고쳐서 원래의 형태를 많이 잃어버렸다.

 

 

 

 

 

 

500년 수령의 벼락 맞은 팽나무. 벼락 맞은 나무는 행운을 준다고 하여 사람들이 이 나무를 찾아 소원을 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