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눈내리는 날의 나주목 객사, 금성관(보물 제2037호 )

모산재 2014. 1. 27. 23:24

 

동료들이 나주곰탕집에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보물 제2037호 나주목 객사 금성관(錦城館)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갑자기 눈발이 빗기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는 눈이 강한 바람에 실려 눈보라가 되어 렌즈를 덮친다. 사진을 찍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객사의 정문은 망화루(望華樓).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형태의 팔작지붕집이 웅장한데, 전라도에서는 전주부 다음으로 가장 큰 도시였던 나주목의 위엄을 잘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 2003년에 복원한 모습이라 한다.

 

 

 

 

 

 

이곳 망화루 앞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김천일이 출병식을 거행했던 역사적인 장소라고 한다. 그 외에도 영조 때 나주괘서사건, 단발령 의거, 일제강점기 항일학생운동 등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정문을 지나니 너른 뜰 가운데 내삼문이 나무목 객사 정관(正館)을 가리고 섰다.

 

 

 

 

내삼문을 지나자 '금성관(錦城館)'이란 현판을 단 객사 중앙 정청이 모습을 드러낸다. '금성(錦城)'은 나주의 신라시대 고을 이름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의 객사는 중앙 건물인 정청이 좌우에 날개채인 동익헌(東翼軒)과 서익헌(西翼軒)을 거느리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정청 건물은 앞 뒤 지붕이 마주보는 맞배지붕이고, 좌우로 연결되는 날개채는 맞배로 이어지다 끝부분에서 팔작지붕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기본적인 형태이다. 

 

그런데 이 나주목 객사 금성관은 정면에서 보면 중앙 정청이 일반적인 맞배지붕이 아닌 팔작지붕의 형태를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나주향교 대성전이 일반적인 조선시대 향교 대성전의 맞배지붕과 달리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 고을의 특수성이랄까...)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동익헌은 정면 6칸인데 서익헌은 5칸으로 살짝 대칭이 무너져 있는 것. 왜 이런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동익헌은 정3품 이상의 당상관이, 서익헌은 당하관이 머무르던 공간이다. 

 

 

조선 성종 연간(1475∼1479)에 세워진 금성관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며 군청 건물로 사용하면서 원형이 파괴되었던 것을 1976~1977년에 완전 해체하여 복원하였다고 한다.

 

 

 

 

금성관 정청은 조선시대 객사 건축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희귀성으로도 주목을 끈다. 중앙의 정청은 앞면 5칸 옆면 4칸의 팔작지붕집에 주심포 양식으로 중앙 3칸의 넓이가 바깥 2칸에 비해 넓고 기둥이 높아 위엄이 느껴진다. (여기에 월대와 평면 및 입면 그리고 천장 등을 일반적인 객사와는 달리 궁전의 정전과 유사하게 구성하고 있다.)

 

창건 시기는 조선 초기로 전체적인 건축물의 규모와 골격은 1617년 중수시의 것을 유지하고 있다고 추정되며, 목조 가구와 세부 공포형식은 1775년과 1885년 중수시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임금의 위엄을 나타내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 나주목사와 관원들이 궁궐을 향해 절을 올리는 망궐례를 향하던 곳이기도 하다. 또 어명을 받고 행차한 사신들이 머무르는 공간이기도 하다.

 

 

 

 

 

동익헌은 정면 6칸 측면 4칸으로 2칸씩을 방으로 들이고 나머지 공간은 대청으로 두었다. '벽오헌(碧梧軒)'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당시 동쪽에 벽오동 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동익헌에 비해 규모가 다소 작은 서익헌, 정면 5칸으로 되어 있다.

 

 

 

 

 

 

현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있는 금성관은 전라남도문화재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보물 승격 신청을 한 상태라고 한다.

 

 

 

 

한쪽에 정렬되어 있는 송덕비 등의 비석들

 

 

 

 

 

뒷뜰에서 바라본 금성관 풍경

 

 

 

 

 

 

 

객사정문 앞 나주곰탕집과 나주곰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