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영주 순흥, 금성대군 신단(神壇)

모산재 2014. 1. 26. 11:17

 

영주 순흥, 소수서원 앞 도로 맞은편 서북쪽 약 200m 가량 떨어진 곳에 금성대군신단이 있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세조의 아우로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를 당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및 그와 연루되어 순절한 의사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설립된 제단이 바로 금성대군신단이다. 사적 제491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성대군신단으로 들어서는 길

 

 

 

와문을 들어서면 바로 재실(齋室)과 주사(廚舍) 영역이 나타난다.

 

 

 

재실은 정면 4.5칸 측면 4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인데, 담장을 ㄴ자로 설치하여 네모난 뜰을 이루고 있다. 담에 일각문이 있다.

 

 

 

 

 

관리인이 거처하는 주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ㄷ자형 건물로, 역시 ㄴ자형의 담장이 감싸고 있다.

 

 

 

단종 1년(1453) 수양대군이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통하여 전권을 장악하자 어린 단종은 영의정이던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긴다. 세조 원년 금성대군은 수양대군 일파로부터 모반의 누명을 쓰고 유배되었는데, 이듬해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며 그 일에 연루되어 다시 이곳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위리안치(圍籬安置)생활을 하던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이 고장 선비들과 의기가 통하여 단종 복위를 위해 격문을 짓게 하고 군비를 모으며 군사를 조련하여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 복위를 꾀하였는데, 거사가 무르익어가던 세조 3년(1457) 가을 어느 날 이를 엿들은 순흥부의 한 관노가 밀고하며 관군의 습격을 받고 순흥 고을은 피바다를 이루는 도륙을 당하면서 폐부(廢府)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죽임을 당하고 금성대군은 사사되고 순흥부사 이보흠은 참형되었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 한다.

 

고려 충렬왕과 충목왕이 태를 봉안하여 순흥부로 승격되었고, 조선 태종 때 영월, 단양, 봉화, 안동, 예천의 일부까지도 그 행정권이 미치는 도호부로 바뀌었던 순흥은 피로 물들인 이 사건으로 거덜나 순흥부는 혁파되었으며 토지와 백성들을 모두 풍기군에 붙이고 창고와 관사를 파괴하고 기지를 허물어 버렸으며 순흥지방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때 참화를 당한 도호부민들의 시신일부가 죽계천에 수장되었고 핏물이 10여 리 흘러가 멎었다는 곳의 마을 이름이 피끝마을(동촌1리)이다.

 

 

내문을 들어서면 단소 영역이다.

 

 

 

신단에는 잔디를 잘 입힌 넓은 뜰 중앙에 금성대군 위(位), 오른쪽 편에 부사 이보흠 위(位), 왼편에 무명 의사 위(位)를 모시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웠다.

 

 

 

이 신단은 200여 년이 지난 숙종 9년(1683)에 순흥부가 복원되고 순절 의사들이 신원(伸寃)되자 1719년 그 유허지에 설치된 것이다. 1742에는 경상감사 심성희가 주창하여 정비되었고 1980년에 단소 앞에 재청과 주사를 건립함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매년 봄가을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금성대군 위(位)

 

금성대군신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