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메밀꽃 필 무렵> 허생원의 발길 따라 (3) 팔석정에서 여울목까지

모산재 2013. 11. 10. 18:16

 

효석문학 100리길.

 

‘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 허생원과 동이의 여정을 따라 봉평에서 대화를 거쳐 평창까지 이어진다. 총 53.5㎞ 5구간으로 조성되었는데, 전국적인 걷기 열풍을 타고 지난해 7월에 처음 길을 열었다고 한다.

 

 

 

효석문학 100리길 안내도

 

 

 

 

제1구간/문학의 길(봉평 관광 안내센터~장평 여울목) : 약 7.8km. 소요 시간 2~3시간

제2구간/대화장터 가는 길(장평 여울목~대화 땀띠공원) : 약 13.3km. 소요 시간 약 3~4시간

제3구간/강 따라 방림 가는 길(대화 땀띠공원~방림 농공단지) : 약 10.4km. 소요 시간 약 3시간

제4구간/옛길 따라 평창강 가는 길(방림 농공단지~용항리 경로당) : 약 10.2km. 소요 시간 약 3시간

제5-1구간/마을길 따라 노산 가는 길(용항리 경로당~평창 바위공원) : 약 7.5km. 소요 시간 약 2~3시간

제5-2구간(평창 바위공원~평창초등학교) : 약 4.3km. 소요 시간 약 1시간

 

 

 

오늘 걷는 길은 이 중 제1구간 정도에서 만족해야 할 듯하다. 봉평장터와 효석문학관, 효석 생가 등을 돌아보고 나니 벌써 11시를 훌쩍 넘어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대화장터까지 갔으면 싶은데, 서울로 돌아가야 할 시간을 생각하면 무리다.

 

 

 

점심 때가 다가오니 배도 살살 고파지는데, 제1구간 걷는 길에서 점심 먹을 만한 데가 있을 성싶지도 않다. 먹을 만한 곳이 나타나면 점심을 해결하기로 하고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 가기로 한다.

 

 

제1구간을 보니...

 

 

 

 

 

흥정천 둑방 길을 따라 걷는 길에서 만나는 주요 여정은 팔석정, 금산교, 백옥포리, 백옥표교, 노루목.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울목에 이르게 된다.

 

 

홍정천 주변의 들판은 온통 메밀밭인데, 아쉽게도 꽃은 다 지고 열매를 달고 있어 꿈결 같은 풍경을 기대한 마음에 아쉬움이 밀려온다.

 

 

대신 둑방 길에 꽈리가 예쁜 꽃과 열매를 달고 있지 않느냐!

 

 

 

 

 

 

길 중간 중간 이런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봉평의 너른 들판을 한 2km쯤 걸었을까. 다리가 나타나면서 그 아래로 예사롭지 않은 계곡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강 주변이 아기자기한 암반과 솟은 바위로 구성된 이 풍경이 '효석문학 100리길'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바로 팔석정(八石亭)이다.

 

 

 

 

 

 

붉은 소나무와 바위와 홍정천 맑은 물이 어울린 풍경은 언뜻 거창의 수승대를 떠올리게 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팔석정이라 하여 당연 정자 이름인 줄 알았는데,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유래를 알고 보니 글이 새겨진 여덟 개의 바위를 일컫는 이름이다.

 

 

 

 

 

 

 

 

 

이곳은 '태산이 높다하되~'로 유명한 조선 중기의 문인 양사언과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양사언이 강릉부사로 재임했던 모양. 그가 영동지방을 돌아보며 그 아름다움에 탄복하다 영서 지방도 돌아보게 되었는데, 당시 강릉부 소속이던 이곳 봉평에 이르러 아담하면서도 수려한 경치에 반해 정사도 잊은 채 8일을 노닐며 경치를 즐기다가 팔일경(八日景)이란 정자를 세우게 하였단다. 원래 정자가 있었다는 이야기...

 

이곳 바위에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니, 삼신산을 가리키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 '낚시 바위'라는 뜻의 석대투간(石臺投竿), '연꽃바위못'라는 뜻의 석지청련(石池淸蓮), 낮잠 즐기는 석실한수(石室閑睡), '뜀뛰기 바위'라는 석요도약(石搖跳躍), 바둑 두는 석평위기(石坪圍碁) 등이 그것이다. 아쉽게도 내를 건널 수가 없으니 글씨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양사언은 나중 고성부사로 떠나게 되자 이곳에 찾아와 정자를 관리하기 위하여 집 한 채를 짓고 '봉래고정'이라는 우물울 파고 여덟 개의 바위에 이곳의 경치를 "天通九曲中流白 地接三山半落靑"이라 읊었는데, 이는 "하늘과 통한 무이구곡 중간 물길이 희게 흐르고 땅은 삼산에 이어져 푸름 속에 잠겼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이백의 ‘등금릉봉황대(登金陵鳳凰臺)’에서 "三山半落靑天外 二水中分白鷺洲"를 본 뜬 것으로 보인다.

 

또한 '4미9기(四美九奇)이란 것이 새겨져 있는데, '사미'는 "동으로 봉산, 남으로 청강, 서로는 삼산, 북으로 노송(東有逢山 南有靑江 西有三山 北有老松)"이며 '구기'는 "만길이나 되는 용이 바위를 지나간 구룡소(萬丈 血龍行石九龍沼)"를 가리킨 것이라 한다.

 

구룡소는 바로 두 바위 사이로 흐르는 깊은 물을 일컫는 듯하다. 언젠가 팔석정 바위 옆 소나무에 매어져 있던 황소가 사라졌는데, 용이 황소를 잡아먹었다는 전설이 전하기도 한단다.

 

 

 

 

 

 

 

봉평이나 봉산 같은 지명이나 '봉래고정' 등이 모두 양사언의 호 '봉래'와 관련 있는 것을 보면 양사언은 이곳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팔석정에서부터 들길을 벗어나 산자락 오솔길로 들어선다. 가을 숲이 주는 고즈넉한 분위기에 운치가 느껴진다.

 

 

 

 

 

숲길 곳곳에서 꽃을 피운 놋젓가락나물을 만난다.

 

 

 

 

 

 

'선덩굴바꽃'이라고도 불리는 이 식물은 투구꽃과 비슷하지만 줄기가 실처럼 물체를 감고 올라가는 점이 특징...

 

 

 

팔석정에서 건너편 국도 옆 봉산이란 기슭에는 율곡 선생을 모신 봉산서재라는 사당이 있다고 한다. 율곡의 부친 이원수 공이 수운판관으로 이곳에 거주하던 시절 신사임당이 율곡을 잉태하여 이를 기리기 위하여 지은 사당이라 한다.

 

현종 때 사방 5리를 위토로 하사 받아 세워졌지만 유지되지 못하다가 1906년 유생들의 성금으로 중건되어 봉산재라 했던 것을 의병장 유인석이 이곳에서 활동하면서 봉산서당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을 창건할 때 위정척사운동이 중심인물 이항로의 문인인 최익현, 유인석, 추성구 등이 조직한 강수계(講修契)의 힘이 컸다 하여 강수재(講修齋)라고 부르기도 하며 유인석의 글씨로 쓴 '강수재'란 현판이 걸려 있다. 이항로의 영정이 율곡의 영정과 나란히 걸려 있는 연유인 듯하다.

 

 

길이 다른 방향이라 가지 못하는 아쉬움...

 

 

 

 

 

오솔길을 벗어나 다시 넓은 강길로 들어선다.

 

늦은 가을, 때 아닌 꼬리조팝나무가 강가 언덕 곳곳에서 제철처럼 꽃을 피우고 있어 발길을 자꾸 붙든다

 

 

 

 

세잎쥐손이도 꽃을 피웠는데...

 

 

 

 

또 다시 꼬리조팝나무의 아름다운 꽃...

 

 

 

 

늦은 봄에 피는 꽃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진다.

 

 

 

 

 

다시 들이 열리면서 길은 갑자기 강가로 내려선다.

 

 

 

 

 

들판을 가로지르기 어려운 곳이어서 길이 아니었던 강변을 길로 다듬어 놓은 듯하다.

 

 

편안한 느낌에 상쾌한 강바람을 맞으며 걷는데, 갑자기 역한 냄새가 바람에 실려온다. 발동기 소리가 들리더니, 보니 농부들이 무밭에서 농약을 살포하고 있다. 이런 깊은 산골에서도 친환경 농업은 어려운가 보다.

 

 

강길의 끝에서 금산교를 만난다.

 

 

 

 

 

금산교를 지나면서 제법 넓은 들이 펼쳐지고, 또 마을집들도 꽤 보이기 시작한다.

 

 

 

 

 

풍경이 어쩐지 낯익다 했더니 두 해 전 평창수련원 왔을 때 산을 넘어 왔다 되돌아간 들판이다. 그때 위에서 바라보았던 낙락장송 보호수를 오늘은 올려다 보며 지난다. 

 

 

 

 

 

들판에 자리잡고 있는 백옥포리라는 마을.

 

들길을 지나 다시 마을 앞 강길을 걷다 언덕에서 낯선 꽃을 만난다. 페루꽈리다.

 

 

 

 

남미 원산의 페루꽈리가 어지 이 깊은 골짜기에 귀화하여 살고 있는지...

 

 

 

백옥포리의 넓은 들판과 마을을 지나자 길은 다시 달뿌리풀이 숲을 이룬 강가로 내려선다.

 

 

 

 

 

 

길은 엉뚱하게 끝없이 수로를 타고 옹색하게 이어진다.

 

두해 전에는 길을 찾지 못해 다시 벼랑을 타고 산 을 넘었는데, 이런 길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기야 '효석문학 100리길'이 작년에 열렸으니, 그 전에는 이 수롯길이 정식 길이 아니었으리...

 

 

 

 

 

수로는 산과 강 사이 가파른 언덕에 매달려서 이어진다.

 

 

 

 

나도송이풀도 예쁘게 꽃을 피웠다.

 

 

 

 

 

국립평창수련원 바로 너머 쪽쯤 수롯길에서 지도를 보며 판관대(判官垈)가 바로 건너편 도롯가일 거라고 짐작해 본다. 봉산서당과 함께 율곡의 전설이 서려 있는 집터 자리이다.

 

마침 강 가운데 솟아 있는 큰 바위가 눈길을 사로잡는데, 저 곳이 혹시 신사임당이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궁궁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움툼한' 바위가 있어 거기에 들어앉으면 밖에 사람들이 안 보여 사임당이 몸을 씻었다고 하며 그 옆에는 관인처럼 생긴 인바우라고 하며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공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판관대는 율곡 선생의 잉태지로 전하는 곳으로 이원수 공의 관직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었던 데서 말미암은 것.(수운판관이란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배로 실어나르는 일을 하는 관직이다.)

 

전설에 따르면, 봉평에서 사임당과 4년간 살았던 이원수공이 파주 율곡에서 봉평으로 오던 중 날이 저물어 평창군 대화의 한 주막에서 하루 밤을 묵을 때 용꿈을 꾼 주모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다음날 봉평에 도착하였고, 강릉의 친정에 가 있던 사임당 역시 용이 품에 안기는 꿈을 꾸고 140리 길을 달려와 봉평 집에서 만나 그날 밤 율곡이 잉태되었다고 한다. 율곡의 어릴 적 이름이 현용(見龍)이란 것과 사임당이 꿈을 꾼 강릉 오죽헌의 방이 몽룡실(夢龍室)로 불리게 된 것도 이 전설에 따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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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곡 탄생 설화

 

일찌기 율곡선생의 아버지인 李元秀공이 인천지방 수운판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에 산수가 아름다운 봉평에 4년간을 살았었다. 인천에 있던 율곡선생의 아버지가 여가를 틈타 본가로 오던 중 평창군 대화면 반정(상안미)에 이르렀을때 날이 저물고 피로에 지쳐 하루 밤을 쉬어 가려고 길가의 주막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 일찍이 혼자 몸이 되어 홀로 주막을 경영하던 주모의 꿈에 용이 가슴 가득히 안겨 오므로 이상히 여겨 홀연 꿈을 깨고 일어나 앉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주모는 이것이 틀림없이 잉태할 꿈이며 비범한 인물을 하늘이 점지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식을 얻을 기회가 왔구나 하였다. 주모는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보니 혼자 몸이요, 그날 밤 대상이 될 사람은 주막에 묵고 있는 원수공 뿐이라 여러 모로 살핀 끝에 그 분이 예사 사람이 아니므로 여자의 수치심도 잊어버리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 "손님 저를 물리치지 마십시오."하니 놀란 원수공이 "이 무슨 해괴한 짓이요, 내 그대를 행실 바른 여인으로 알고 묵으려 했는데 이러면 되겠오."하고 달래니 "손님 아무 말씀 마시고 하루밤만 정을 맺게 해 주십시오."하고 애걸 하였으나 원수공이 완강히 뿌리치고 말아 주모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 부끄럽고도 서운한 마음으로 작별을 하는데 원수공의 얼굴에는 범할 수 없는 상서로운 기운이 어려 있는것을 보고 이는 도저히 내 운수가 아니구나 하며 체념하였다. 그 무렵 율곡선생의 어머니 師任堂 申氏는 강릉 오죽헌 언니집에 머물러 있었다. 역시 하루밤 꿈에 용이 가슴 가득히 안겨 오는 꿈을 꾸고 나서 즉시 귀가하려고 하였다. 언니는 며칠 더 머무르기를 간곡히 권하였으나 사임당 신씨는 이를 뿌리치고 그날로 140리 길을 걸어서 집에 돌아와 있던 중 마침 원수공이 도착했다.

신씨는 오랜만에 만난 남편을 대하여 반기기는 고사하고 말도 않고 표정에 변화도 없이 묵묵히 남편을 대하였다. 부인의 성품이 남다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원수공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날 밤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율곡선생을 잉태하게 되었고, 그 후 9개월만에 강릉 오죽헌으로 이사하여 율곡선생을 낳았다 한다. 한편 원수공은 며칠을 이곳에서 머물다 임지로 돌아가던 길에 또 다시 반정 주막에 들게 되었다. 지난 일을 생각해 보니 사나이 대장부로서 아녀자의 청을 못 들어 준 것이 마음에 걸려 "여보시오 주모, 내 전날에는 대단히 미안하게 되었오. 오늘 밤 당신과 정을 맺을까 하오."하니 "어르신네의 말씀은 대단히 고마우나 지난번 하루 밤 모시고자 한 것은 홀로 사는 아낙네에게 하늘이 점시하신 비범한 영재를 얻고자 함이었는데 오늘 어르신네의 얼굴에는 전날의 상서로운 기운이 없어졌으므로 뜻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며 말을 이어 "이번 길에 댁에서는 귀한 아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를 틀림없이 인시에 낳을 것이니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호랑이한테 해를 입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당황하여"그 무슨 말이요, 만약 참으로 그러하다면 앞일을 예견하는 당신께서는 그 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알 것이니 제발 묘법을 가르켜 주시오." 했다. 그러자 주모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그러면 돌아가 사람을 천 명 살리는 셈치고 밤나무 천 그루를 심으십시오. 그랬다가 아이가 다섯살 되는 해 아무 날에 금강산에서 어떤 늙은 중이 와서 아기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기는 절대로 보이시지 말고 나도 덕을 쌓은 사람이니 아기를 함부로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버티시고 덕을 쌓은 것을 보자고 하거든 밤나무 천 그루를 보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 해 12월 26일 인시에 사임당이 아들을 낳으니 원수공은 주모의 말이 맞았구나 싶어 강릉에서 남쪽으로 백리 쯤 되는 노추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다.

그 후 율곡이 다섯 살이 되는 해 주막 여인이 말한 바로 그날 늙은 중 한 사람이 나타나 "금강산에서 살고 있는 중인데 이댁 아드님을 데려가려고 왔읍니다."하니 원수공이 "나도 덕을 쌓은 사람이니 우리 아들을 데려가지는 못합니다." 하자 중이 "무슨 덕을 쌓았다는 것입니까?"하고 반문했다. 이원수공이 "노추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습니다." 하니 중이 "그렇다면 그것을 보여 주십시오."했다. 이원수공이 중을 데리고 산으로 가 밤나무를 하나하나 세는데 아무리 헤아려도 천 그루에서 한 그루가 모자랐다. 원수공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늙은 중이 "한 그루가 모자라니 기어코 아드님을 데려 가야겠읍니다."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갑자기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하고 소리치자 늙은 중이 혼비백산하여 큰 호랑이로 둔갑하여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장평에 거의 가가워질 무렵, 흥정천 물굽이가 급히 돌아나가는 곳에서 수로가 끝나고 영동고속도로 아래 백옥포교가 나타난다.

 

 

 

 

 

백옥포교를 건너고 나니 여러 갈래의 도로가 갈리면서 갑자기 길 표시가 사라진다. 한참을 방황하다가 그냥 장평 방향의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나중 보니 걷기 길은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 도로를 따라 가서 그곳에서 산길을 따라 넘어야 했다.

 

 

↓ 장평 오르는 길에서 뒤돌아 본 백옥포교 주변 풍경. 산 너머 쪽에 국립평창학생수련원이 있다.

 

 

 

 

 

도로를 따라 오르자 바로 장평이다.

 

늦은 점심을 먹을 곳을 찾아 산 밑으로 들어섰더니 바로 식당 입구에 노루목고개라는 표지석이 나타난다.

 

그런데, 바로 그 뒤로 보이는 고갯길, 허생원이 헐떡거리며 넘어왔던 길이다. 저기로 넘어와야 했던 것을....

 

 

 

 

 

봉평에서 흘러내리는 흥정천과 용평에서 흘러내리는 속사천은 표고차가 꽤 많이 나는데, 두 하천 사이에서 산이 솟아 노루목 고개를 이루었다.

 

노루목 고개는 <메밀꽃 필 무렵>의 허 생원이 "숨이 차 몇 번이고 다리를 쉬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말했던 대로 가파라 보인다.

 

 

고개가 앞에 놓인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내렸다. 둔덕은 험하고 입을 벌리기도 대근하여 이야기는 한동안 끊겼다. 나귀는 건듯하면 미끄러졌다. 허생원은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나이가 알렸다. 동이같은 젊은 축이 그지없이 부러웠다. 땀이 등을 한바탕 쪽 씻어내렸다.

 

 

 

 

노루목 고개 바로 아래 있는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돼지갈비를 시켞는데, 식용접착제로 살을 붙인 맛없는 엉터리 갈비. 문학의 길에서 맛보는 배신감... 아쉬웠다.

 

 

 

서울에 돌아갈 시간이 그리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어서 1구간 종착지인 여울목까지만 확인하고 가기로 한다. 장평에서 1킬로 채 못 간 지점에서 여울목 표지석을 만난다.

 

 

 

 

표지석에는 소설 속의 몇 구절을 인용해 새겨 놓았다.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 동이, 조선달의 여정은 이곳에서 마감되며 소설도 끝난다.

 

 

소설의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가 볼까...

 

 

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이었다. 장마에 흘러버린 널다리가 아직도 걸리지 않은 채로 있는 까닭에 벗고 건너야 되었다. 고의를 벗어 띠로 등에 얽어매고 반 벌거숭이의 우스꽝스런 꼴로 물 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흘린 뒤였으나 밤 물은 뼈를 찔렀다.
"그래 대체 기르긴 누가 기르구?"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의부를 얻어가서 술장사를 시작했죠. 술이 고주래서 의부라고 전 망나니예요. 철들어서부터 맞기 시작한 것이 하룬들 편한 날 있었을까. 어머니는 말리다가 채이고 맞고 칼부림을 당하고 하니 집 꼴이 무어겠소. 열여덟살 때 집을 뛰쳐나서부터 이 짓이죠."
"총각 낫세론 동이 무던하다고 생각했더니 듣고 보니 딱한 신세로군."
물은 깊어 허리까지 찼다. 속 물살도 어지간히 센데다가 발에 채이는 돌멩이도 미끄러워 금시에 훌칠 듯하였다. 나귀와 조선달은 재빨리 거의 건넜으나 동이는 허생원을 붙드느라고 두 사람은 훨씬 떨어졌다.
"모친의 친정은 원래부터 제천이었던가?"
"웬걸요. 시원스리 말은 안 해주나 봉평이라는 것만은 들었죠."
"봉평, 그래 그 아비 성은 무엇이구?"
"알 수 있나요. 도무지 듣지를 못했으니까."
"그 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흐려지는 눈을 까물까물하다가 허생원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디디었다. 앞으로 고꾸라지기가 바쁘게 몸째 풍덩 빠져버렸다. 허위적거릴수록 몸을 걷잡을 수 없어 동이가 소리를 치며 가까이 왔을 때에는 벌써 퍽으나 흘렀었다. 옷째 쫄딱 젖으니 물에 젖은 개보다도 참혹한 꼴이었다. 동이는 물 속에서 어른을 해깝게 업을 수 있었다. 젖었다고는 하여도 여윈 몸이라 장정 등에는 오히려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안됐네. 내 오늘은 정신이 빠진 모양이야."
"염려하실 것 없어요."
"그래 모친은 아비를 찾지는 않는 눈치지?"
"늘 한번 만나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지금 어디 계신가?"
"의부와도 갈라져 제천에 있죠. 가을에는 봉평에 모셔오려고 생각 중인데요. 이를 물고 벌면 이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죠."
"아무렴, 기특한 생각이야. 가을이랬다?"
동이의 탐탁한 등어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 더 업혔으면도 하였다.
"진종일 실수만 하니 웬일이요, 생원."
조선달이 바라보며 기어코 웃음이 터졌다.
"나귀야, 나귀 생각하다 실족을 했어. 말 안했던가. 저 꼴에 제법 새끼를 얻었단 말이지.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말일세. 귀를쫑긋 세우고 달랑달랑 뛰는 것이 나귀새끼같이 귀여운 것이 있을까. 그것 보러 나는 일부러 읍내를 도는 때가 있다네."
"사람을 물에 빠뜨릴 젠 딴은 대단한 니귀새끼군."
허생원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 쉬어.나귀에겐 더운 물울 끓여주고, 내일 대화장 보고는 제천이다."
"생원도 제천으로?……"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허생원, 동이, 조선달이 건넜다는 개울, 그러나 개울을 건널 만한 접근로도 보이지 않고 개울 건너편으로 이어지는 길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으니, 여울목에서 실감나는 감흥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대화장까지 허생원이 걸었던 길은 개울에서 콘크리트 옹벽으로 차단된 채, 개울을 따라 난 콘크리트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표지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인 여울목을 어째서 1구간의 종착점과, 2구간의 출발점으로 정해 놓았을까. 1구간을 완주하고 돌아가야 할 곳은 장평인데,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교통 동선으로 본다면 1구간은 그냥 노루목까지로 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대화까지 갔으면 참 좋았으련만...

 

소설 속에서 끝난 길에서 나의 여행길도 끝나고 여울목에서 돌아선다.

 

둑방 길을 따라 장평의 전경이 보인다.

 

 

 

 

 

 

허생원은 결코 볼 수 없었던 미국쑥부쟁이를 본 것을 마지막으로 허생원의 길을 따라 나선 나의 여행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