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메밀꽃 필 무렵> 허생원의 길 따라 (1) 봉평장과 충주집, 가산공원

모산재 2013. 11. 10. 15:56

 

가을이 깊어가는 9월 하순, 가산 이효석이 태어나고 그의 작품이 태어난 배경이 된 평창의 봉평 마을을 찾았다. 효석과 <메밀꽃 필 무렵>의 장돌뱅이 허생원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트레킹!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두 시간쯤 가면 영동고속도로변에 있는 장평이란 곳에 닿는다. 봉평은 장평에서 6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장평에서 고속도로를 지나 흥정천만 건너면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국립평창수련원이 있고 ,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과 조선달, 동이가 대화장까지 걸었던 길은 바로 봉평에서 흥정천을 끼고 이곳 장평을 지나 대화까지 이어진다.

 

 

 

 

 

 

 

 

 

일단 봉평으로 가서 봉평장, 이효석문학관과 생가를 둘러보고 난 다음, 봉평에서 평창까지 조성한 '효석문학 100리길' 5구간 중 제1구간을 걷기로 한다. 

 

봉평은 흥정산(1277m)에서 흘러내린 홍정천이 잠시 넓은 들판을 열어 놓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평창군의  면소재지이다.

 

 

 

마을 입구는 조형물이 설치된 넓은 마당이 설치되어 있는데, 여느 마을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재지의 거리로 이어지는 큰길로 들어서니 오른쪽으로는 훨씬 넓은 공터가 펼쳐진다. 봉평장인가 했는데, 시골 장터 분위기도 아니고 터가 도시의 광장처럼 너무 크다. 알고보니 해마다 열리는 효석문화제 행사를 위해 이곳 주민들이 조성한 공간인 듯하다. 

 

 

 

 

 

그런데, 도로 바로 맞은 편에 자리잡은 학교로 보이는 공간. 어쩐지 휑하고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감도는데 학생들이 학습하고 있는 공간 으로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이곳 역시 봉평중고등학교가 있었던 곳인데, 바로 몇 해 전에 마을 외곽 쪽으로 이전하고 현재는 비워 놓은 공간이란다. 

 

학교가 마을의 중심에 있다 보니 학교 정화 구역 때문에 상가 운영에 애로가 있고 또 이 지역 최대의 행사인 효석문화제 운영에 걸림돌이 되었던 모양. 그래서 학교를 옮기고 학교 부지를 효석문화제 행사장 등으로 활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앞으로 이곳은 봉평의 랜드마크, 효석 광장으로 만들어 효석문화제와 연계할 계획이라고 한다.

 

 

 

좀 더 안 쪽으로 이동하니 가산공원(可山公園)이 나타난다. 

 

 

 

 

 

이런 작은 산골 마을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 뜻밖이라 놀랍고 신기하다.

 

봉평은 1990년 대한민국 제1호 문화마을로 지정되었는데, 바로 "메밀꽃 필 무렵"을 낳은 이효석 선생을 기리기 군민이 힘을 모아 1993년에 이 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1,300여 평의 부지에 효석의 흉상과 문학비, 조형 광장 등이 자리잡고 있다.

 

가산공원의 중심에는 효석의 흉상이 자리잡고 있다. 

 

 

 

 

 

 

 

 

가산의 흉상을 둘러싸고 있는 고목들이 유난히 시선을 끄는데, 살펴보니 거의 대부분이 돌배나무.  수령이 200년이나 된 돌배나무라는데 20여 그루는 되어 보인다. 봄날 하얀 배꽃이 피면 정말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낼 것 같다. 

 

이 예사롭지 않은 나무들이 잘 보존된 것은 이곳이 서낭당이 있었던 자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1980년까지 서낭당이 존재했다고 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이곳 봉평면 창동리 주민들이 3월과 10월에 풍요를 비는 제사와 풍요를 알리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그런 전통적인 제의는 사라졌지만, 대신 해마다 5월 25일이면 가산선생의 추모제가 열린다고 한다.

 

 

 

돌배나무 속에 빨간 열매를 단 산사나무 고목이 눈에 띄어 렌즈에 담아 보았다.

 

 

 

 

 

 

 

가산공원 안쪽으로 봉평장터가 자리잡고 있다. 사방이 트인 장터 건물은 별로 보이지 않고 공터 가장자리 쪽으로 건물 몇 채가 늘어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산공원 쪽으로 이어지는 곳에 '메밀꽃 필 무렵'의 '충줏집'이 자리잡고 있다. 복원된 건물인데, 시장 분위기가 없어서인지 주막이라기보다는 여염집처럼 보인다.

 

 

 

 

 

이 울타리 밖에서 허생원이 동이와 농탕치고 있는 충줏집을 애를 태우며 엿보고 있었을까...

 

 

 

 

 

 

벽에 그려진 채색 그림이나 등롱의 그림이 충줏집 분위기로는 좀 어색하게 다가온다.

 

 

 

 

 

 

 

 

충줏집까지 보았으니, 이제는 흥정천 건너편에 있는 이효석 문학관으로 갈 차례... 

 

 

 

 

 

● <메밀꽃 필 무렵>에 그려진 허생원과 충주집, 동이의 관계

 

"생원, 시침을 떼두 다 아네..... 충줏집 말야."

   계집 목소리로 문득 생각난 듯이 조선달은 비죽이 웃는다.

   "화중지병(畵中之餠)이지. 연소(年少)패들을 적수로 하구야 대거리가 돼야 말이지."

   "그렇지두 않을걸. 축들이 사족을 못쓰는 것두 사실은 사실이나, 아무리 그렇다군 해두 왜 그 동이 말일세, 감쪽같이 충줏집을 후린 눈치거든."

   "무어, 그 애숭이가? 물건 가지구 나꾸었나부지. 착실한 녀석인줄 알았더니."

   "그길만은 알 수 있나..... 궁리 말구 가보세나그려. 내 한턱 씀세."

   그다지 마음이 당기지 않는 것을 쫓아갔다.

 

   허생원은 계집과는 연분이 멀었다. 얽둑배기 상판을 쳐들고 대어 설 숫기도 없었으나 계집 편에서 정을 보낸 적도 없었고, 쓸쓸하고 뒤틀린 반생이었다. 충줏집을 생각만 하여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 소스라쳐버린다.

   충줏집 문을 들어서서 술좌석에서 짜장 동이를 만났을 때에는 어찌 된 서슬엔지 발끈 화가 나버렸다. 상위에 붉은 얼굴을 쳐들고 제법 계집과 농탕치는 것을 보고서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녀석이 제법 난질군인데 꼴사납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낮부터 술 처먹고 계집과 농탕이야. 장돌뱅이 망신만 시키고 돌아다니누나. 그 꼴에 우리들과 한몫 보자는 셈이지. 동이 앞에 막아서면서부터 책망이었다. 걱정두 팔자요 하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상기된 눈망울에 부딪칠 때, 얼결김에 따귀를 하나 갈겨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동이도 화를 쓰고 팩하고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허생원은 조금도 동색(動色)하는 법 없이 마음먹은 대로는 다 지껄였다--어디서 주워먹은 선머슴인지는 모르겠으나, 네게도 아비 어미 있겠지. 그 사나운 꼴 보면 맘 좋겠다. 장사란 탐탁하게 해야 돼지, 계집이 다 무어야. 나가거라, 냉큼 꼴 치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