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메밀꽃 필 무렵> 허생원의 길 따라 (2) 이효석문학관, 이효석 생가

모산재 2013. 11. 10. 17:23

 

봉평장터와 충줏집을 돌아보고 난 뒤 흥정천을 건너 이효석문학관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효석 문학관은 건너편 산허리에 자리잡고 있다.

 

 

 

 

 

흥정천에는 섶다리가 놓여 있어 예스런 정취를 즐길 수 있다.

 

 

 

 

현대의 대형 교량에 너무 가까이 있어 다소 치이는 느낌이 들어 좀 불편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반가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지자체마다 축제 경쟁에 나서면서 섶다리는 단골메뉴가 된 듯하다. 무주에서도 섶다리를 만났고 청송에서도 섶다리를 만나지 않았던가.  

 

 

천변 어느 막국수집 앞, 여러 형태의 조각상들이 재미있어 담아 보았다. 

 

 

 

 

 

 

 

 

 

 

 

이효석 문학관으로 가는 길 중간...

 

허생원이 성서방네 처녀와 일생에 단 한번밖에 없는 사랑을 나눈 물레방앗간이 조성되어 있다.

 

 

 

 

 

왼쪽에 있는 현대식 건물은 관광안내센터.

 

 

 

 

 

물레방앗간 옆으로는 힘차게 떨어지는 물을 안고 물레방아가 돌고 있고, 초가지붕에는 잡초가 자라고 있어 예스런 정취를 물씬 풍긴다.

 

 

 

 

 

방앗간 내부에는 한쪽에는 디딜방아, 정면에는 상투를 한 허생원과 저고리를 벗은 성서방네 처녀의 야릇한 러브신을 담은 그림판을 배치해 놓았다.

 

 

 

 

 

성서방네 처녀와의 '무섭고도 기막힌' 하룻밤의 사랑을 원작을 통해 엿보기로 하자.

 

 

● 물레방앗간에서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의 만남

 

  그렇다고는 하여도 꼭 한번의 첫 일을 잊을 수는 없었다. 뒤에도 처음에도 없는 단 한번의 괴이한 인연! 봉평에 다니기 시작한 젊은 시절의 일이었으나 그것을 생각할 적만은 그도 산 보람을 느꼈다.
   "달밤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어."
>  허생원은 오늘밤도 또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조선달은 친구가 된 이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렇다고 싫증을 낼 수도 없었으나 허생원은 시치미를 떼고 되풀이할 대로는 되풀이하고야 말았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생원의 이야기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줏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나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팔자에 있었나부지."
  아무렴 하고 응답하면서 말머리를 아끼는 듯이 한참이나 담배를 빨 뿐이었다. 구수한 자줏빛 연기가 밤기운 속에 흘러서는 녹았다.
   "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는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짐작은 대고 있으나 성서방네는 한창 어려워서 들고날 판인 때였지. 한집안 일이니 딸에겐들 걱정이 없을 리 있겠나? 좋은 데만 있으면 시집도 보내련만 시집은 죽어도 싫다지.....그러나 처녀란 울 때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 걱정 있을 때는 누그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제천인지로 줄행랑을 놓은 건 그 다음날이렷다."
   "다음 장도막에는 벌써 온 집안이 사라진 뒤였네. 장판은 소문에 발끈 뒤집혀 고작해야 술집에 팔려가기가 상수라고 처녀의 뒷공론이 자자들 하단 말이야. 제천 장판을 몇 번이나 뒤졌겠나. 허나 처녀의 꼴은 꿩궈먹은 자리야. 첫날밤이 마지막 밤이었지. 그때부터 봉평이 마음에 든 것이 반평생을 두고 다니게 되었네. 반평생인들 잊을 수 있겠나."

 

 

 

물레방앗간 뒤편으로 이효석 문학관으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문학관은 물레방앗간 뒷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문학관 앞 언덕의 이효석 문학비

 

 

 

 

 

 

 

 

문학관 전경

 

 

 

 

 

 

 

 

문학관 내부 모습

 

 

 

 

정원 마당 끝에는 집필하고 있는 모습인 효석의 좌상이 세워져 있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참 잘 생긴 미남으로 표현되었다. 방문객들(특히 여성들)은 저마다, 옆 의자에 앉아서 좌상을 끌어안고 사진을 찍어댄다. 차가운 동상이지만 그윽한 눈빛이 문학소녀들의 마음을 끌 만할 정도로 섬세하게 잘 표현되었다.

 

 

언덕 전망대에서 바라본 봉평면 소재지 풍경

 

 

 

 

흥정천이 흘러가는 장평 방향 풍경

 

 

 

 

 

문학관을 돌아보고 난 뒤 생가로 향한다.

 

주변은 온통 메밀밭인데, 이미 꽃이 다 지고 열매가 달렸다. 어쩌다 꽃이 남아 있는 것을 담아 본다.

 

 

 

 

 

 

이효석 생가는 문학관으로부터 서쪽 700m 거리에 있는데, 다른 사람의 개인 소유지가 된 데다 원래의 모습을 이미 잃은 상태라, 문학관에 가까운 곳에 땅을 매입하여 고증을 바탕으로 복원해 놓았다.

 

산자락을 배경으로 앉은 생가의 모습은 '고향의 봄' 노랫말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정겹다. 

 

 

 

 

 

 

 

건물의 재목을 너무 반듯한 것만 사용한 것이 그리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평창군에서는 효석의 묘소도 이곳 문학관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효석의 묘소는 현재 파주 통일동산에 있는 실향민 묘지에 있다. 

 

효석은 1942년에 사망하여 처음 진부 고등골에 모셨는데, 1972년 영동고속도로 건설로 장평 묘포장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다시 1997년 영동고속도로 확장공사로 장평 묘포장이 폐쇄되면서 파주로 이장되었다 한다.

 

 

한참 생가 장면을 담고 있는데, 누가 사진 좀 찍어 달랜다. 같이 여행 다니는 아줌마들 몇이 나란히 포즈를 취하고 섰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몇 마디 나누며 찍어줬더니 내 음성이 너무 좋다고 칭찬이다. ㅎㅎ 그런가...?

 

 

 

복원 생가 앞을 흐르는 실개천. 

 

물이 이렇게 맑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효석을 기념하는 공간을 다 돌아보고난 다음, 이제 흥정천을 끼고 장돌뱅이 허생원이 걸었던 길을 따라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