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영월, 단종의 한이 서려 있는 관풍헌과 자규루

모산재 2013. 11. 9. 12:33

 

어라연 트레킹을 위해 찾은 영월에서 잠시 단종의 한이 서린 관풍헌과 자규루를 찾아 보았다.

 

하필이면 찾은 날이 발굴 공사로 마당이 온통 파뒤집혀져 있어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6월부터 시작된 공사는 11월 말에 끝날 것이라고 한다.

 

 

담장 밖에서는 껑충 솟은 자규루만 보이는데, 출입문을 찾으니, 보덕사 포교당 현판이 걸려 있다. 객사 건물이 무슨 연유로 조계종 포교 시설로 이용되게 된 것인지...

 

 

 

 

 

 

 

 

단종 임금 당시의 건물은 아니지만, 단종은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짧은 날들을 저 누각 위에 올라 한양에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하며 쓰라린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관풍헌은 조선 건국 원년에 건립된 영월 객사의 동헌으로 현재 강원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유배 당한 이듬해인 1456년(세조 2), 청령포에 큰 홍수가 나면서 단종은 이곳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고, 단종은 관풍헌에 머물며 자규루에 올라 자신의 처지를 소쩍새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견준 '자규사(子規詞)'와 '자규시(子規時)'를 읊었다고 한다. 원래는 '매죽루(梅竹樓)'라 불리던 정자는 이 때문에 '자규루'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하지만 바로 1457년, 세조가 단종복위운동을 구실로 사약을 내리게 되고 단종은 이 해 10월 24일 17세의 어린 나이로 이 곳에서 죽었다.

 

 

 

자규루에는 단종이 지은 '자규사(子規詞)'란 6언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月白夜蜀魂추 (월백야촉혼추)     달 밝은 밤 두견새 울 제
含愁情依樓頭 (함수정의누두)    시름 못 잊어 누 머리에 기대어라.
爾啼悲我聞苦 (니제비아문고)     네 울음 슬프니 내 듣기 괴롭구나.
無爾聲無我愁 (무니성무아수)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없을 것을
寄語世苦榮人 (기어세고영인)     세상에 근심 많은 이들에게 이르노니
愼莫登子規樓 (신막등자규루 )    부디 자규루에는 오르지 마오.

 

 

 

 

 

일반적인 객사 건물과 마찬가지로 중앙 정사는 맞배지붕으로 좌우 날개채는 팔작지붕 형태로 3동이 이어진 형태이다. 정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인 단층 맞배지붕 이익공집으로, 전면 3칸에는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을 달았다.

 

 

관풍헌 객사 정문은 '백운루(白雲樓)' 또는 '관풍루(觀風樓)'라 부른다.

 

 

 

 

 

단종의 지은 또 하나의 시 '자규시(子規詩)'는 다음과 같다.

 

 

一自寃禽出帝宮(일자금원출제궁)     원통한 새 한 마리가 궁궐에서 나오니
孤身隻影碧山中(고신척영벽산중)     외로운 몸 그림자마저 짝 잃고 푸른 산을 헤매누나
假眠夜夜眼無假(가면야야면무가)     밤은 오는데 잠들 수가 없고
窮恨年年恨不窮(궁한년년한불궁)     해가 바뀌어도 한은 끝없어라
聲斷撓岑殘月白(성단효잠잔월백)     산에 울음소리 끊어지고 달이 흰 빛을 잃어 가면
血流春谷落花紅(혈류춘곡낙화홍)     피 흐르는 봄 골짜기에 떨어진 꽃만 붉겠구나
天聾尙未圓哀訴(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먹어 하소연을 듣지 못하는데
胡乃愁人耳獨聰(하내수인이독총)     서러운 이 몸의 귀만 어찌 이리 밝아지는가

 

 

사방이 높은 산과 깊은 물로 끊긴 산중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을 품은 채 쫓겨난 새에 비유하고 있어 더욱 애통하게 느껴진다. 단종의 시편들은 조선 왕들의 시문을 모아 엮은 ‘열성어제’에 실려 있다고 한다.

 

 

 

 

 

관풍헌 가는 길에는 '라디오스타'라는 영화를 촬영했다는 다방이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