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청송 주왕산 (2) 주왕암과 주왕굴, 학소대 가는 아름다운 산허릿길

모산재 2012. 11. 21. 20:30

 

청송(靑松), 하늘을 찌르는 금강송들이 숲을 이룬 두메산골.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꺾이는 백두대간에서 동해안을 따라 부산 몰운대까지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동쪽에 영덕이, 동쪽에는 청송이 자리잡고 있다.

 

 

 

 

 

 

 

주왕산은 백두대간이 끝나고 낙동정맥이 남으로 흐르는 가운데에 우뚝 솟은 산이다. 수백 미터의 바위봉우리가 병풍처럼 솟아 있어 옛날에는 석병산(石屛山)이라 했는데, 주왕산이라 불리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전설과 얽혀져 있다.

 

 

주도(周鍍)라는 사람이 동진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스스로 후주천왕(後周天王)이라 칭하고 당나라에 쳐들어갔다가 크게 패한 뒤 신라로 건너와 주왕산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이에 당나라가 신라에 주왕을 없애달라고 부탁하자, 마일성 장군이 자기의 아우인 이성 삼성 사성 오성과 합세해 석병산을 포위해 주왕을 죽였다고 한다. 그 후로 석병산을 주왕산이라 부르고, 절은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大典道君)의 이름을 따서 대전사라 했다고 한다. 

주왕은 중국 당나라때 진나라 재건을 위해 반역을 일으킨 주도로 알려진다. 반역은 실패했고 주도는 쫓기고 쫓겨 신라 땅까지 들어서게 된다. 이에 당나라는 신라에 그를 잡아달라고 요청했고 신라 마일성 장군은 주왕굴에 숨어있던 주도를 잡아낸다. 생포된 주도는 당나라 장안에서 참수되었다고도 전해지고 주왕굴에서 최후를 맞았다고도 전해진다. 주도를 잡은 후 마장군은 주왕산에서 가장 잘 보이는 암봉에 깃발을 꽂았단다. 기암(旗岩)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그런데 1990년대 말 청송의 한 향토사학자(김규봉)가 주왕산 전설의 주인공은 원성왕과 왕위쟁탈전에서 밀려나 반란을 일으켰던 신라의 김주원 김헌창 김범문이라 주장한다. 개연성이 있는 이 주장은 위의 전설에는 뒷받침할 만한 역사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신라 37대 왕인 선덕왕이 후손이 없어 29대 무열왕의 6대 손인 김주원을 38대왕으로 추대하였으나 때마침 그가 왕도에서 200리나 떨어진 곳에 있었고 홍수로 알천이 범람하여 건너올수 없게 되자 김경신이 쿠데타를 감행하여 대신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김경신을 왕(원성왕)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왕위에서 밀려난 김주원은 그의 근거지인 명주(강릉)로 은퇴하였는데, 그가 이곳 주왕산으로 피신하였다는 것이다.

 

그럴 듯한 이야기다.

 

 

 

 

 

 

출근길처럼 붐비는 등산객들로 호젓한 산책의 즐거움은 사라졌지만, 대전사를 나와 주방천을 끼고 걷는 길은 시골길처럼 정겹다.

 

계곡의 물의 흐름이 줄어든 것은 아쉬움을 주지만 햇살에 반짝이는 단풍 속으로 걷는 기분은 절로 명랑해진다.

 

아침 햇살을 받아 주방천에 비치는 주왕산의 가을빛이 수채화처럼 맑고 아름답다.

 

 

 

 

 

물가에 놓인 저 앞에 보이는 바위를 아들바위라 한다.

 

 

 

 

 

주방천 길을 따라가다 저 바위 앞에서 왼팔로 양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돌을 던져 바위 위에 얹히게 되면 아들을 얻는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이다.

 

아들바위의 내력을 알지 못하고 지나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멈춰 서서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보인다. 남아선호사상은 많이 사라졌건만 바위 위에는 돌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주방천을 따라 걷는 길은 한동안 평탄하게 이어진다.

 

 

 

 

 

 

 

대전사에서 약 1km쯤 걸었을까... 제1폭포와 주왕암·주왕굴 갈림길에 이르러 자하성(주방산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자하성(紫霞城)은 주왕이 이곳으로 피난하여 신라의 군사를 막기 위해 쌓았다고 전한다. 지금은 성터의 일부만 남아 있지만 원래 높이 6 m 30리를 넘는 큰 성이었다고 한다. 대전사 동쪽 계곡 1km 지점에서 시작하는 산성으로 주왕암 입구에서 나한봉을 거쳐 주왕굴을 중심으로 사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이쯤에서 주왕산 안내도를 참고해 보기로 하자.

 

 

 

↓ 주왕산 탐방로 안내도

 

 

 

 

 

직진을 하면 제1폭포, 오른쪽 다리 자하교를 건너면 주왕암과 주왕굴로 가게 된다.

 

 

 

 

 

 

지난번에 생략했던 주왕암과 주왕굴 방향으로 가기 위해 자하교를 건넌다.

 

자하교 아래 주방천 곳곳에서 사람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주방천 상류쪽으로 연화봉(蓮花峰)이 아침햇살을 받아 환한 이마를 드러내었다.

 

 

 

 

 

 

 

주왕암까지는 다소 오르막인 계곡길을 따라 200m쯤. 그리고 주왕암에서 50m를 더 들어가면 주왕굴이다.

 

 

금방 나타나는 주왕암(周王庵>)...

 

 

 

 

 

2층누각과 높은 축대 위에 앉은 누각이 아침햇살 속에 명암 대비를 이루며 시야를 가득채우고, 촛대봉으로 보이는 바위봉우리가 햇살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성문처럼 좁은 골짜기를 가로막고 있는 2층누각의 이름은 가학루(駕鶴樓).

 

'가학(駕鶴)'은 학의 날개를 타고 난다는 뜻인데, 협곡을 지키는 성문 같은 누각의 이미지에 어째서 도교적 분위기를 띠는 이름이 붙은 것일까...

 

 

 

 

 

가학루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요사채가 있고 한 단 위에 나한전이 있으며, 그 뒤에 칠성각과 산신각이 있다.

 

 

 

 

나한전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6나한이 모셔져 있는데, 영험이 있어 많은 참배객들이 찾는다고 한다.

 

주왕암은 대전사의 부속암자로 대전사를 창건한 의상이 지었다고도 하고, 919년(고려 태조 2) 대전사를 중창한 눌옹(訥翁)이 지었다고도 한다. 이곳에 은거하다 최후를 맞이하였다는 주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암자라고 하는데 그 역사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암자를 지나 주왕굴(周王窟)로 들어서는 계곡은 더욱 좁아진다.

 

암자 주위에는 병풍암을 비롯하여 나한봉·관음봉·지장봉·칠성봉·비로봉·촛대봉 등 불교적 이름을 가진 봉우리들이 성채의 벽처럼 에워싸고 길은 미로처럼 골짜기 안으로 이어진다.

 

 

 

 

 

 

협곡이 다시 한 굽이 왼쪽으로 꺾어지며 드디어 주왕굴이 눈 앞에 나타난다.

 

더욱 가파르게 더욱 좁게 안으로 이어지던 협곡은 마지막 철계단을 올라서자 더 이상 퇴로를 열지 않고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와 절벽으로 골짜기를 가로막고 섰다.

 

 

 

 

50m쯤 되는 절벽 아래에는 그리 깊지 않은 자연동굴인 주왕굴이, 주왕굴 바로 옆에는 주왕이 세수했다는 폭포수가 가늘게 흘러내리고 있다.

 

 

 

 

길이 2m 높이 5m 너비 3m 정도인 이 굴이 주왕이 피신한 곳이며, 그가 굴 입구에 세수하러 나왔다가 들이닥친 신라 마장군의 화살에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주왕이 마장군 형제의 화살에 맞아 쓰러지자 그의 피가 계곡을 따라 붉게 흘러 내렸는데 이듬해부터 주왕산 계곡에는 진달래꽃보다 붉고 꽃잎에 검붉은 반점이 있는 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이 꽃이 유명한 주왕산의 수달래다.

 

 

 

 

동굴 안에는 산신상을 새긴 것으로 보이는 석재가 놓여 있고 촛불이 밝혀진 간소한 제단도 마련해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전설 속 비운의 주인공을 향해 배례하고 있다.

 

 

 

 

 

 

주왕굴과 주왕암을 나와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고, 주왕암 바로 앞에서 학소대로 이어지는 산허리 오솔길로 접어든다.

 

 

 

 

 

오솔길의 즐거움!

 

계곡과는 달리 수십 년생인 소나무가 숲을 이룬 이 길은 주등산로인 계곡길과는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길이라 호젓할 뿐만 아니라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는 솔향기가 묻어 있어 온 정신이 상쾌하다.

 

 

 

얼마쯤 가다보니 마당바위를 조망하는 전망대가 나타난다.

 

 

 

 

 

전망대에 오르니 주방천 건너편 연화봉(왼쪽)과 병풍바위(오른쪽)이 손에 잡힐 듯 건너다보이고...

 

 

 

 

 

 

피안의 병풍바위와 차안의 급수대가 마주보는 장관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느냐...!

 

 

 

 

 

길은 깎아지른 듯한 주상절리 급수대 아래를 지나 학소대를 향해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급수대에도 주왕의 전설이 서려 있으니, 이곳에 피신하였던 주왕(또는 김주원)이 궁궐을 건립하였는데 산 위에는 샘이 없으므로 계곡의 물을 퍼올려 식수로 사용하여 그 후로 이곳을 급수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주왕산의 기암괴석과 암벽의 생성

 

 

주왕산을 형성한 화산 활동은 지금으로부터 약 7천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지질학적으로는 중생대 백악기 후기로 한반도에 공룡들이 떼 지어 살던 시기이다.

주왕산의 절경을 이루는 암석들은 화산의 분화구에서 폭발한 뜨거운 화산재가 지면을 따라 흘러내리다가 쌓여 굳어진 회류 응회암(ash flow tuff)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회류응회암들은 침식이 약하기 때문에 풍화차이에 따라 수직절벽이나 계단 모양의 지형, 폭포 등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급수대를 지나자 금방 골짜기의 주등산로와 만나는 지점인 시루봉과 학소대가 마주보는 골짜기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시루봉과 학소대에서 제1폭포까지 이어지는 골짜기는 주왕산 최고의 절경이 펼쳐진다.

 

 

 

 

 

※ 주왕산 시루봉, 학소대, 제1폭포 => http://blog.daum.net/kheenn/15856006

※ 주왕산 대전사 => http://blog.daum.net/kheenn/15856004

※ 주왕산 주왕산 제2폭포, 제3폭포 => http://blog.daum.net/kheenn/15856008